제48화
“비교적 난도가 낮은 영애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샤샤가 들고 있던 작은 수첩을 펼치며 조곤조곤히 읊조렸다.
“리하프 포리스.”
곧이어 샤샤가 무리 정중앙에 있던 영애 하나를 가리켰다.
“포리스 백작 가문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막내딸이죠. 작년에 데뷔탕트를 마쳤고, 어려서부터 결혼, 결혼 노래를 불렀지만 아쉽게도 혼담이 오가는 곳은 없는 모양이에요.”
“이유는?”
“성격도 까랑까랑하지만 아무래도 얼굴에 진 흉들이…….”
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힐끔, 앞에 놓인 목표물을 살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이었으나, 얼굴 전반에 걸친 흉과 메이크업이 문제였다. 기초가 무너진 피부 위에 아무런 조치 없이 덕지덕지 덧바르기만 했으니 예쁜 얼굴을 망칠 수밖에.
“오케이, 접수. 다음.”
“그 옆은 릴리스 제니온. 제니온 백작의 외동딸인데, 리하프 양과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어디를 가든 떨어지지 않는데요.”
“약점은?”
“릴리스 양은 어려서부터 재채기 때문에 고생하셨대요. 한번 터지면 잘 멎지를 않는다나 뭐라나…….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아직 약을 찾진 못하셨나 봐요.”
“오케이. 릴리스도 접수. 그래서 저 둘이 이 구역 유명인사다, 이 말이지?”
“네! 소문난 파티광들이거든요. 듣기론 하루에 티파티만 세 탕씩 뛴다는 말도 있어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내 옆에 있던 에드먼드의 팔뚝을 덥석, 붙들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에드먼드가 미간을 구기며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나는 지금부터 전반전에 나설 거예요.”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칠 생각이지?”
에드먼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르곤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위치에서, 나는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요.”
“그 최선이라는 게 늘 최악에 가까워서 문제겠지.”
“됐고 당신은 내가 이따 손짓하면 그냥 호응만 해 주면 돼요. 최대한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알겠죠?”
“여기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클로엔은 몸을 반쯤 돌린 채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댄스 타임 전에는 돌아올 테니, 꼼짝하지 말라는 경고 또한 덧붙였다. 우렁찬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갔다.
* * *
“여러분, 안녕?”
들려온 인사말과 함께 어린 영애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멀찍이 떨어진 다른 무리를 제외하곤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혹시, 저희 말씀하시는?”
부름의 주인공을 확인하듯, 리하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슴께를 짚었다.
“리하프 양, 그리고 그 옆에는 릴리스 양 맞죠?”
“예…… 그렇습니다만.”
릴리스가 뒷말을 흐리며 리하프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 시선을 주고받던 두 영애가 약속이라도 한 듯, 허리를 굽혔다.
“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랜돌프 공작 부인.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저희가 주제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얘네 왜 이래?’
어린 두 영애가 몸을 작게 떨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매섭게 날이 섰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힐끔 뒤쪽을 살피자, 등 뒤에 있던 샤샤가 한 걸음 가까이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 부인께서 일전에 인사를 제대로 안 한다고 다른 영애의 뺨을 후려치신 적이 있으셨거든요.”
이거 완전 개쓰레기였잖아?
행여 큰소리가 나올까 나는 부러 이를 아득 물며 말했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저도 까먹고 있었죠. 우선 빨리 일으켜 세우세요. 이러다 오해라도 사면 곤란하잖아요.”
“참 빨리도 걱정해 주네.”
나는 조용히 입술을 삐죽이며 샤샤를 노려봤다. 다급한 두 손이 곧 땅에 박힐 듯한 리하프와 릴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둘이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어린 영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조금 친해지고 싶어서. 요즘 친구들은 뭐에 관심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마주쳤다. 이어진 박수 소리에 힐끔 눈치를 살피던 리하프가 장단을 맞췄다.
곧이어 멀뚱히 서 있던 릴리스가 손뼉 치는 원숭이 장난감이라도 된 양, 간헐적으로 손을 두드렸다.
“아하하. 그러셨군요, 하하하.”
한동안 이 바보 같은 짓거리가 계속됐다. 누구 하나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박수의 향연이 이어졌다.
‘이러다 손바닥에 구멍 나겠는데? 대체 왜 안 멈추는 거야?’
슬슬 손바닥이 아려 왔다. 점점 커지는 고통의 크기에 서서히 박수 소리를 줄이자, 리하프와 릴리스가 힐끔 눈치를 살피곤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뭔 군기가 저렇게 바짝 들었어? 무슨 군대인 줄.’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름 친해져 보려 다가왔으나, 되레 짐만 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하면 내가 그냥 갈까요?”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전혀 안 불편해요. 편히 계세요.”
이어진 물음에 리하프가 손사래 치며 말을 이었다. 젖살로 통통한 두 뺨이 흔들리는 게 퍽 필사적이었다.
“연회에 오실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건강한 부인을 뵙게 되어 너무 기뻐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릴리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걸어왔다. 모아쥔 손이 달달 떨리는 걸 보아, 이 여자의 과거 행적이 알 만했다.
“나도 이렇게 예쁜 친구들이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요. 안주인으로서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모습을 자주 못 보였는데 이제라도 둘러볼 생각이에요. 공작께서도 그걸 원하시고.”
“예?! 랜돌프 공작께서요?”
이어진 내 말에 릴리스가 두 눈을 댕그랗게 뜨며 물었다. 곧이어 옆에 있던 리하프가 릴리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럼요. 우리 그이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한창 더울 때는 직접 몸보신 음식도 해 줬는걸요?”
“헙! 랜돌프 공작께서 정말로 그러셨다고요? 안 믿겨요.”
한창 이성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나이인 만큼, 잔뜩 경계했던 영애들의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영애들께서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누가 붙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인생이 달라지거든요.”
예를 들면 이 여자도 그렇지.
관심이 생겼는지 순간, 영애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사람들은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죠. 랜돌프 공작께서 보기에는 차가워 보여도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데요.”
“하지만…… 너무 무시무시한 분이시잖아요. 듣기로는 몇천 명을 살육하셨다고……”
“그 덕분에 우리 모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정면에서 싸워 준 그이가 없었다면, 라비스텔의 평화가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어진 내 말에 리하프와 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호응했다. 부쩍 친해졌다 여겼는지, 리하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질문을 건넸다.
“그럼 두 분이 서로 사랑하시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오늘……! 다른 분을 뵈러 오신 줄 알았거든요. 하하.”
“당연하죠. 부부가 사랑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걸요. 가끔 잘못된 소문이 들릴 때면 조금은 슬프답니다. 사실…… 누구보다 뜨겁거든요.”
나는 부러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부디 널리 널리 소식을 전하길 바라며 말이다.
‘하루에 파티를 세 탕씩 뛰어다닌다는 망둥이들이 입을 가만히 있을 리가.’
개떡 같은 원작을 바꾸기 위해선 무엇보다 에드먼드에 대한 대중의 재평가가 우선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랜돌프 저택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요?”
결국 그가 악한 마음을 먹은 게 된 건 고립된 상황이자 모두의 외면 때문이었으니, 그 원흉을 제거하는 게 급선무였다.
“네? 저희를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리하프가 잔뜩 긴장한 채 되물었다. 그사이 옆에서는 에취! 릴리스가 재채기를 연거푸 해댔다.
“저런, 재채기를 계속해서 어쩐담.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기는 한데, 그게 만들려면 시간이 조금 걸려서…….”
“정, 정말이세요?! 에취! 어떤 약을 먹어도 도통 나아지지를 않았거든요.”
그와 동시에 릴리스가 코를 훌쩍이며 눈망울을 반짝였다.
“완성되는 대로 서신을 보낼 테니, 그날 가벼운 차 한잔이라도 하겠어요? 릴리스 양에게만 주기 그러니까 리하프 양에게도 꼭 필요할 만한 것들을 준비해 둘게요.”
“하지만 랜돌프 공작께서 싫어하시는 거 아닐까요……?”
약속이라도 한 듯, 겁에 질린 두 영애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진 에드먼드에게로 향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 우리 그이도 좋아할 테니까.”
나는 부러 싱긋 미소 지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반가운 이를 만나기라도 한 듯, 저 멀리 보이는 에드먼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기…… 공작님? 부인께서 지금 이쪽에 손을 흔들고 계시는데요.”
동시에 뒤에 있던 멜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 본인이 조금 있다가 손을 흔들면 같이 흔들어 달라는데, 굳이.”
“그래도 저렇게 노력하시는데 대충 시늉이라도 하시죠. 적어도 사이가 안 좋다는 여론만큼은 피해야 하잖습니까?”
이어진 멜빈의 물음에 에드먼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내 쭈뼛거리던 랜돌프 공작의 손끝이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