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어서 오십시오, 랜돌프 공작님. 그 옆에 계신 분께서는 공작 부인되실까요?”
두 사람을 발견한 젊은 남자가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딱딱한 에드먼드를 대신해 클로엔은 말없이 눈짓 인사를 건네며 대답을 대신에 했다.
“두 분 모두 먼 길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곳의 집사인 ‘제이미’라고 합니다. 요제프 님께서는 안쪽에 계시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제이미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뒤따르던 샤샤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러곤 소리를 낮춘 채 은밀히 속삭였다.
“와, 부인 여기 정말 엄청나네요. 무슨 황실보다도 돈이 많은가 봐요.”
헤슈턴의 연회장은 그야말로 사치스러움의 끝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돈지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극에 다다랐다.
“이거 진짜 보통이 아닌데.”
곳곳에 붙은 보석들과 금딱지. 복도에서부터 느껴지는 소란스러운 내부, 이리저리 뒤엉킨 음식 냄새와 분주한 발걸음.
‘음~. 이거지, 이거.’
이제야말로 연회장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간만에 큰물에서 놀 생각을 하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가슴에 커다란 불이 일었다.
‘여기 오늘 내가 접수한다. 아주 다 조져 버리는 거야.’
외향적인 성향과 달리 타의에 의해, 정확히 말하자면 에드먼드에 의해 늘 저택에서 홀로 머물던 나였다.
그마저 샤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 아마 혼자서만 그 긴 시간을 보냈더라면 입에 가시가 돋아 죽고 말았을 것이다.
‘고로 여기는 내 욕망과 자아를 뽐낼 수 있는 큰 무대라는 말이지.’
밀려오는 기대감에 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입술을 훑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걸음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
“긴장되나?”
줄곧 침묵하던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팔짱을 건넸다. 전혀 긴장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네. 조금요. 이런 큰 연회는 처음이라 긴장돼요. 그래도 당신이 있으니 잘할 수 있겠죠?”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엮었다. 가뜩이나 큰 키 차이가 나란히 서니 극명했다. 빳빳이 세운 고개가 떨어질 것만 같았으나 인내했다.
“귀빈들께서는 모두 이 안에 계십니다. 부디 두 분께서도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그사이 도착을 알리는 집사의 말이 허공에 울렸다. 에드먼드가 침묵 끝에 말문을 열었다.
“어디 가서 허튼소리만 하지 않으면 돼.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영락없는 정상이니까.”
퍽 솔직한 답변에 나는 두꺼운 팔뚝을 가볍게 후려쳤다. 그러곤 어깨 남짓한 머리를 에드먼드에게 기대며 말했다.
“스름들 듣는데 등슨도 참.”
그 순간 집사인 제이미의 눈빛이 모호하게 변했음을 클로엔은 알지 못했다. 살벌한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영락없는 다정한 부부였다.
* * *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 있던 이목이 한데 쏠렸다. 랜돌프 부부를 발견한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클로엔 님께서 저 미치광이랑 지금 같이 오신 거예요?”
“우리가 같은 걸 보고 있다면…… 그게 맞는 거겠죠?”
가히 등장만으로도 그 여파가 엄청났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어린 영애들과 달리, 중년의 귀부인들은 화려한 부채 뒤에 표정을 숨긴 채 흥미롭다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랜돌프 내외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여러모로 흥미롭네요.”
“다른 곳도 아닌 헤슈턴의 연회라…… 이거 의도가 너무 빤한 거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전 약혼자에게 항의라도 하는 모양이죠. 왜 그때 날 잡아 주지 않았느냐, 클로엔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잖아요. 독하기로는 제국 제일가는 이이니.”
“이렇게 보니 랜돌프 공작이 짠한 것 같기도 하네요. 돈만 있지, 두 사람 사랑싸움에 껴서 등 터진 새우 노릇이나 해야 할 텐데, 쯧. 안타깝기도 해라.”
모여 있던 이들이 들고 있던 부채 단면을 펄럭이며 호호, 가식적으로 웃었다. 입으로는 걱정하는 듯했으나, 그 속뜻은 모욕이었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사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랜돌프 부부는 모여든 시선을 의식한 듯 얽혀 있던 팔짱을 더욱 꽉 그러쥐었다.
“웃어요, 웃어. 이런 데서는 첫인상이 반은 먹고 들어가요. 우리 지금 돈 받으러 온 거 아니잖아요? 표정 풀자고요.”
나는 부러, 에드먼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금 전 제게 긴장했냐 묻더니 되레 긴장한 쪽은 그 반대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없이 웃을 이유도 없지.”
에드먼드가 짧게 답하며 대화를 갈무리했다. 가뜩이나 무표정한 에드먼드의 인상이 차갑게 식어 매서웠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구라도 곁에 오면 죽이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에드먼드 나름의 보호색이라 생각하며 종용하기를 멈췄다.
“부인!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는데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어느새 몸수색을 마친 샤샤가 헤벌쭉 웃으며 곁으로 왔다. 그 뒤로는 멜빈이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제가 곁에서 계속 모셨어야 했는데, 헤슈턴이라는 명성에 맞게 절차가 엄청 까다롭네요. 자리를 비운 만큼 더 극진히 모실 테니 맡겨만 주세요!”
열의에 찬 샤샤와 달리 멜빈은 줄곧 진지한 태도로 보고에 임했다.
“초대받은 이들은 제외되었으나 함께 온 사용인들과 마부, 그리고 가져온 물건들은 빠짐없이 수색했습니다. 확실히 경계가 전보다 삼엄해졌습니다.”
“일종의 서열 확인이야. 여기 온 이상, 허튼짓하지 말라는.”
“아무래도 구조물을 파악하는 데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만 경비병이 족히 백은 되었으니, 안쪽은 더 하겠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해. 이쪽이 정리되면 나도 곧장 움직일 테니까.”
에드먼드가 주위를 살피며 대화를 일갈했다. 두 남자의 은밀한 속삭임에 클로엔은 눈을 가자미처럼 떴다.
* * *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주변은 건조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귀족들이 각자의 친분을 과시하는 사이, 멀찍이 거리를 둔 랜돌프 부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벌써 몇 분째 그 앞을 알짱거리고 있으나, 아는 체는커녕 눈길 한번을 주지 않는 귀족들이 짜증스러웠다.
‘이것들 봐라?’
오늘에서야 백조 무리에 낀 미운 오리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슈퍼 외향인인 나로서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시한다고? 어디 너희가 쀼를 보고도 그럴 수 있나 보자고.’
싸늘한 반응에 나는 말 없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언제 손에 쥔 패를 꺼내 이목을 집중시킬까 고심했다.
고민하는 사이, 귀부인들의 대화는 점차 무르익었다. 준비한 이야깃거리가 모두 동났는지 화제는 빠르게 바뀌었다.
“저 흉측한 손으로 사람 목을 몇천, 몇만은 베었겠죠?”
“듣기로는 매일같이 장갑을 끼는 이유도, 악룡의 저주 때문에 살이 다 녹아내려서라던데요?”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에는 에드먼드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이라거나 무분별한 모욕이 섞여 있었다.
‘저것들이 선 넘네? 까려면 앞에 와서 까던지.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하는 것들이.’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옆에 선 에드먼드를 뚫을 듯 바라봤다.
“향이 좋군.”
분명 들었을 텐데, 에드먼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부글거리는 나와 달리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보.”
“당신도 한잔해. 가벼운 음주는 긴장을 풀어 주니까.”
이어질 내 말을 예측이라도 한 듯, 에드먼드가 높게 쌓인 포도주잔 하나를 건넸다.
“뭘 그렇게 멀뚱히 보고 섰지? 마시래도.”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무감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단전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고작 한 잔으로 되겠어요? 주려면 궤짝은 줘야지.”
나는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에드먼드의 노력을 굳이, 무의미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역시 당신은 중간이 없군.”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네요. 에드먼드 랜돌프처럼 모든 걸 절제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나처럼 머리 풀고 사는 게 정신 건강에는 훨씬 좋아요.”
“알긴 아는 모양이야.”
“나처럼 자기 객관화 잘하는 사람도 드물걸요? 원래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는 거예요. 내가 당신한테 겁 없이 까부는 것도, 다~ 믿는 구실이 있으니까 하는 거라고요.”
“내가 져 줄 걸 알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럼요. 당신이 말을 좀 안 예쁘게 해서 그렇지, 모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원래 얼굴이 잘생기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법이거든요.”
“그 헛소리도 듣다 보니 익숙해지는군.”
스스로 어이없는 듯, 에드먼드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라도 그러네. 화가 막 나다가도 얼굴 보면 이게 또 싹 사그라든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잘 맞나 봐요.”
“아무리 그래도 두 잔은 곤란해. 가뜩이나 망둥이인 당신이 취하기라도 하면 같이 온 샤샤가 너무 고생스럽지 않겠어?”
에드먼드가 짧게 조소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건넸다.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들고 있던 음료를 홀짝였다.
‘뭔데 비 맞은 개새끼냐고.’
차가운 주변의 시선을 마주한 다음에야 원작 속 에드먼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넓은 어깨 위로 짊어진 보이지 않는 짐들이, 시답잖은 농담 속에 스며든 쓴웃음이 홀로 외로웠을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샤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뒤에 있던 샤샤를 불렀다.
“네, 부인.”
“지금부터 브리핑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