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연회 시작, 약 여덟 시간 전.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공작 부인의 성화에 사용인들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샤샤, 여기 조금만 더 부풀려 봐. 빠글빠글하게 말아 둬야 시간이 지나도 안 풀린다고.”
“여기요, 여기?”
“그렇지, 거기. 다른 건 몰라도 윗뽕은 제대로 살려야 해. 그래야지 머리가 작아 보이거든.”
깐깐한 주문에 맞춰, 샤샤는 약하게 달군 쇠기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노력에 보상하듯, 생머리나 다름없던 백금색 머리칼이 점차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요?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샤샤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일찍부터 열과 성을 들여서인지 클로엔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옅은 화장, 라벤더 꽃잎을 담아 놓은 듯 은은히 반짝이는 연보랏빛 동공은 신비로운 공작 부인의 이미지를 부각했다.
“정말? 나는 조금 어색한데.”
“아니에요! 정말 예쁘시다고요. 장담하는데,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두 분이실 거예요. 아까 보니까 공작께서도 엄청나게 멋있으시던데요?”
“샤샤, 오늘따라 너 립 서비스가 아주 그냥, 죽여 주는데?”
말은 저리해도 내심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클로엔이 눈살을 가늘게 하며 샤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가 언제 입에 발린 말 하는 거 보셨어요. 진짜 예쁘세요.”
샤샤가 툴툴거리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내 클로엔이 입은 보랏빛 드레스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그런데 랜돌프 공작님은 안목이 진짜 출중하신 것 같아요. 공작께서 골라오신 건데, 부인께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잘 어울릴까요? 진짜 신기하다니까요.”
리본과 프릴, 진주와 같은 세부 장식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유독 손이 많이 갔으나 샤샤는 기쁘게 맡은 바 일을 해 갔다.
그사이 클로엔은 거울 속 제 모습에 집중했다. 가히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헤어스프레이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약간 아쉽단 말이지.”
“헤어스프레이요?”
어김없이 들려오는 생소한 단어에 샤샤가 두 눈을 댕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음…… 그게 머리를 딱딱하게 굳히는데, 그거 하나만 있으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머리가 망가지질 않아. 고정되거든.”
나는 부러 비밀 이야기를 해 주듯 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그와 동시에 가뜩이나 커다랬던 샤샤의 동공이 더욱 팽창했다.
“헙! 정말 그런 게 있다고요? 아니 어떻게, 그게 딱 굳어요?”
“근데 여기 기술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뭐가 있어야 만들어 보기라도 할 텐데. 진득거리는 게 없잖아.”
말과 동시에 혀를 끌끌 차며 몸을 뒤쪽으로 늘이던 그때였다. 샤샤가 미간을 좁히며 잠시간 침묵했다. 이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진드기 풀을 이용해 보는 건 어때요?”
* * *
“이 밤송이는 대체 뭘 하자고 데려온 거지? 이것들은 또 다 뭐고?”
미리 나와 있던 에드먼드가 이동식 케이지와 쌓인 상자들을 발견하곤 툴툴거렸다.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응수했다.
“이게 바로, 내 히든카드라고나 할까요?”
무슨 말이냐는 듯, 에드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우리가 그냥 가면 다들 시샘할 거 아니냐고요. 이렇게 완벽한 선남선녀가 가는데 자기들이 배가 안 아프고 배겨? 그래서 적당한 구경거리와 관심거리를 가져가는 거죠. 일종의 전략이에요, 전략.”
“이참에 영물로 이목을 끌어 보겠다, 그 말인가?”
“역시 이해력이 빠르다니까. 우리 평판 엉망인 거 당신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이런 거라도 들고 가야, 콧대 높은 분들이랑 친해질 구실을 만들죠.”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이건 또 뭔데?”
“아, 그거~. 그건 내 영업 비밀이라 알려 줄 수가 없는데 어쩌죠? 뭐가 됐든, 당신을 곤란하게 할 일은 없으니 안심해요.”
나는 샐쭉 웃으며 새초롬히 말했다. 미적지근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에드먼드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 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나는 부러 대화 화제를 돌리며 에드먼드의 이목을 끌었다. 힌트를 주듯 굽실굽실한 백금색 머리칼을 흩날려 주기도 했다.
“글쎄. 잘 모르겠군.”
딱딱한 반응과 함께 에드먼드가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닫힌 마차 문을 열며 어서 올라타라 손짓했다.
“하여간 무드가 없어, 무드가.”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뒤따랐다. 이내 부푼 치맛단을 정리하고 뒤뚱이며 마차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였다.
응?
트인 시야 너머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에드먼드가 늘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이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옆을 바라봤다. 놀란 나와 달리, 에드먼드는 무척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참이지?”
얼마나 지났을까, 에드먼드가 내민 손을 까딱거렸다. 무심한 말투에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고마워요.”
마주한 두 개의 손은 크기도 색상도 극명히 달랐다.
‘진짜 크다.’
힐끔, 잡은 손을 살피곤 나는 차근히 계단을 올랐다. 단순한 호의였으나 어쩐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는 열이 올랐다.
* * *
랜돌프와 헤슈턴의 거리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갑갑한 마차 안에 갇혀 있으려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왜 그 흔한 빙의자 버프가 나는 없는 건데……. 더위에 이어 이제는 멀미냐?’
나는 반쯤 열린 창문을 지분거리며 힘없이 늘어졌다. 다른 걸 한답시고 빈속으로 마차에 오른 게 가장 큰 실수였다.
“차라리 밥을 먹을 걸 그랬어. 스프레이고 나발이고 만드는 게 아니었는…… 우욱.”
한동안 치미는 구역질을 애써 삼키며 고투를 이어 갔다. 발치엔 유리병이 든 상자가, 옆자리에는 단잠에 빠진 쀼가 있어 몸져눕기도 어려웠다.
“으으, 죽을 것 같아…….”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기운 없는 눈동자를 굴려 맞은 편을 바라봤다. 이 열악한 상황에도 잠이 오는 모양인지 에드먼드는 출발 이후 줄곧 같은 자세였다.
‘저건 진짜 사람이 아닌 건가? 더위도 빗겨 가더니 멀미도 없나 보네.’
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에드먼드의 완벽한 자태를 감상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뭘 그리 보냐며 방해할 일도 없을 거다.
짙은 눈썹과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그 아래 태평양처럼 벌어진 어깨와 흉부까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메인은 저기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진득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비록 지금은 옷 따위에 감춰 있으나, 근육으로 무장된 허벅지와 장딴지가 꺼내 달라 아우성쳤다.
“크…… 말로만 듣던 짐승남. 취한다, 취해.”
마주한 장관에 멀미도 가시는 기분이었다. 모처럼 온 염탐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 보자며, 목을 쭉 내밀던 그때였다.
“뭐 하는 거지?”
낮은 울림과 함께 경계심 어린 붉은 동공이 정면을 향했다.
“아, 그게…… 우욱! 멀미가 심해서 그쪽에 있는 창문 좀 열려고.”
집요한 시선에 나오지도 않는 헛구역질을 해 가며 기지를 발휘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옆자리로 옮겨 창문에 손을 뻗었다.
“제가 장거리에 약한 편이라.”
가늘어진 에드먼드의 시선에 부러 뒷말을 덧붙였다. 결백을 주장하듯, 나는 애꿎은 가슴팍을 팡팡 치며 신빙성을 더했다.
휴,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에드먼드의 몸이 창가로 기울었다. 그는 말없이 닫힌 창문을 열어 주었다.
‘뭐야, 요즘 왜 이렇게 끼를 부려. 사람 설레게.’
원래도 매번 착하던 사람이 한번 나쁜 짓을 하면 찢어 죽일 놈이지만, 애초에 못된 놈이 한번 착한 짓을 하면 개과천선 소리를 듣는 법이었다.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에드먼드 특유의 시원한 새벽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괜한 긴장감에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도 돼.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담백히 말한 그가 주머니에 든 무언가를 부스럭거렸다. 이내 작은 종이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이혼 서류? 지금껏 잘해 준 게 이혼 얘기를 꺼내려고 밑밥 깐 거였어? 말도 안 돼! 우리 지금까지 좋았잖아!’
나는 불안한 동공을 굴리며 미간을 구겼다. 뒤이어 조심스레 물었다.
“이, 이게…… 뭐예요?”
“약이야. 레틴이 챙겨 주더군. 혹, 멀미가 일거든 전해 달라고.”
다정한 그 말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단순한 호의였으나, 어쩐지 불안한 감정을 떨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내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옹송그렸다.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내가 엉뚱한 짓을 해도 화도 안 내고?”
이어진 물음에 에드먼드의 붉은 동공이 올곧이 나를 향했다. 짧게 조소한 그가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알기는 아는 모양이군. 당신이 엉뚱하다는 거.”
“말 돌리지 말고요. 나 진짜 심각해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그런 거예요? 며칠 전부터 여보 정말 이상하다고요. 이쯤 됐으면 화를 낼 법도 한데 대체 왜 그래요?”
“이제는 잘해 줘도 문젠가?”
“과해도 너무 과하니까 그렇죠. 넘어지지 말라고 손도 잡아 주고, 멀미 난다니까 문도 열어 주고, 또, 또 그 이상한 그것도 주고. 자꾸 주니까 이상하잖아요. 그럴 거면 입술도 주던지.”
제멋대로 터져 나온 말들에 나는 입을 가볍게 쳤다. 그 순간, 에드먼드의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들었으나 미처 보지 못했다.
“아무튼, 이상하다고……!”
클로엔이 작게 도리질하며 다음 말을 이어 가던 찰나였다. 모아 쥔 손 위로 낯선 온기가 내려앉았다.
“당신이 노력하는 만큼 보답하는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나직한 울림과 함께 헤슈턴의 성벽이 차츰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