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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45)화 (45/107)

제45화

“흠…… 조금 늦네.”

나는 후원 중앙에 놓인 예쁜 테이블에 앉아 열리지 않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에드먼드는커녕 그림자 하나 보이질 않았다.

“설마 글씨가 괴발개발이라 못 알아보나?”

밀려오는 지루함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그러곤 가장 가능성 큰 이유부터 하나씩 꼽아 보았다.

“아니면 오는 길에 누굴 만났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오기가 싫은가?”

고민하는 나와 달리, 케이지에 든 쀼는 연신 쳇바퀴를 굴리며 활력 소모에 한창이었다.

“차라리 나보다 쀼, 네가 낫구나. 너는 할 일이라도 있지. 심심하다……. 백수의 삶.”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난 작게 투레질했다. 이내 에드먼드가 오지 않는 여덟 번째 이유에 대해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벌컥! 소리와 함께 중앙에 난 유리문이 열렸다. 에드먼드의 길쭉한 두 다리가 허공을 가로지를 때면, 마치 유명 패션쇼를 보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열일하네. 저런 얼굴이면 내일모레 와도 인정이지. 미천한 내가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마침내, 산만한 에드먼드의 몸이 가까이에 섰다.

역광을 받아서일까, 가뜩이나 퇴폐적인 얼굴이 빛을 등져 어두웠다. 새카만 흑발, 그 아래 매섭게 번뜩이는 붉은 동공.

에드먼드를 이루는 모든 것이 ‘나는 위험한 남자다.’하고 말하고 있었으나, 아무렴 괜찮았다.

얼굴이 착하잖아.

“왔어요?”

“조금 늦었군.”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무심한 말과 달리, 멀끔한 이마 위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휴, 이 땀 좀 봐.”

의도하지 않은 척,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손수건을 꺼내 거뭇한 피부를 닦아 냈다. 삽시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에드먼드는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하곤 시선을 돌렸다.

“됐으니까 그만하지. 여기까지는 왜 불렀는지나 말해 봐.”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짧은 데이트라고나 할까요?”

“수업이라니?”

“당신이 나 춤 알려 주기로 했잖아요. 기선 제압, 그거 해야 한다니까.”

“알려 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이 그 말이죠. 생각을 해 봐요, 여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알려 주냐고요. 공작 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글도 모르고 춤도 못 춘다고 소문나면, 내가 너무 수치스럽지 않겠어요?”

나는 부러 입술을 삐죽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춤, 안 춰도 그만이었으나 이참에 살 붙여 가며 퍼석한 마음에 불을 지펴 볼 심산이었다.

‘무릇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이니까.’

꾀가 먹혔는지, 에드먼드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 침묵 끝에 에드먼드가 입을 열었다.

“대신 딱 한 곡만이야.”

“아휴, 물론이죠! 원래 장인은 원 큐거든요. 많이 보여 주지 않아. 한 번이면 뭐 그냥 난리 나지.”

팔짝 뛰는 클로엔을 보며, 에드먼드는 말려들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게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

“그럼 우리 협상도 끝났으니 후원이나 한 바퀴 돌아 볼까요? 이참에 당신 땀도 좀 식히고.”

말과 동시에 조그마한 인영이 곁으로 다가왔다. 가느다란 두 손이 에드먼드의 몸을 붙들며 팔을 얽혀왔다.

“나, 이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당신이랑 팔짱 끼고 같이 걷는 거. 근데 키가 너무 크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네. 이러다 목 빠지면 어떡하죠?”

“이런 거로 목이 빠지지는 않아.”

“아니 대체 뭘 먹고 이렇게 큰 거야. 얼굴도 잘생겼으면서 몸도 좋으면 이건 완전 반칙이지. 당신도 알죠? 본인 잘생긴 거? 그러니까 이렇게 콧대 높게 구는 거잖아요, 그렇죠?”

연신 조잘대는 클로엔을 보며 에드먼드는 작게 코웃음 쳤다. 이 시끄러운 일상도 차츰 적응된 것인지, 일자로 뻗어 있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 * *

“다리에 힘주고 자세를 끝까지 유지해. 그 상태에서 균형만 잡아도 반은 성공한 거야.”

“손끝은 자연스럽게, 턱은 조금 아래로 낮추고.”

“지금 여기에서 상체가 먼저 나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나? 다시.”

줄곧 연습에만 몰두하는 에드먼드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분명 이러려고 만든 자리가 아닌데.

‘어린이 너튜브도 이것보다는 덜 건전할 거야.’

불순한 머릿속과 달리 나는 순순히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고는 마주 본 샤샤를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부인, 어디가 불편하세요?”

샤샤가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물어왔다. 바라지 않은 터치에 나는 미간을 왈칵 구겼다.

“됐고, 이번엔 제대로 하자.”

“저는 안 틀렸는데 부인께서 계속 틀리시잖아요. 밀린 빨래도 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억울한 듯, 샤샤가 입술을 툴툴거리며 물었으나 뾰족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었다.

곧장 호흡을 맞출 거란 예상과 달리 에드먼드는 기본부터 잡아야 한다며 참관을 자처했다. 덕분에 남편의 허리는커녕, 손끝 하나도 닿지를 못했다.

“이러다 내가 죽지. 죽어.”

나는 뚱한 표정으로 멀찍이 선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축 가라앉은 나와 달리, 남편은 진짜 춤 선생이라도 된 양 진지했다.

“이만 가 봐.”

열띤 수업이 끝나고 지쳐 헉헉거리는 샤샤를 향해 에드먼드가 말했다. 행여 말을 번복할까, 샤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재빨리 고개를 꾸벅이며 사라졌다.

“만지면 닳는 것도 아니고 뭘 저렇게 비싸게 구나 몰라. 나만 애가 끓지. 나만.”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난 볼멘소리와 함께 입술을 삐죽였다. 스파르타식 교육에 춤 실력은 일취월장했으나 이건 목적이 아니었다.

“혼자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지?”

다행히 귀는 막히지 않았는지, 에드먼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몸을 낮췄다. 어쩐지 놀리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는 삐쭉, 날을 세웠다.

“됐거든요. 하여간 철벽은. 나도 싫어, 나도! 내가 거기 가서 당신이랑 춤추나 보자고요.”

“시작에 앞서 기본을 탄탄히 하자는 건데 뭐가 문제지?”

“예예, 어련하시겠……!”

부러 뒷말을 늘리며 빈정거리던 찰나였다. 불현듯 손 위에 닿은 온기로 인해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뭘 그리 놀래? 부부끼리.”

듣기 좋은 저음과 함께 에드먼드의 두 팔이 가녀린 허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이내 한쪽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기초는 뗐으니, 지금부터는 실전이야. 힘들다고 징징댈 거면 이쯤하고.”

놀란 저를 희롱하듯, 에드먼드는 몸을 바짝 붙였다. 훅 끼친 새벽 향에 멍하게 풀린 보랏빛 시선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아니! 합시다, 해요! 뭐든 한다고요. 다리가 부러져도 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느리게 훑는 에드먼드의 모습은 실로 도발적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연회를 하루 앞둔 상황이었다. 에드먼드는 연일 강행군을 이어 갔고 덕분에 엉성했던 춤 실력 또한, 봐줄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막상 큰소리는 쳤는데, 당장 내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나는 뒷말을 늘리며 벌러덩 누웠다. 뒤바뀐 시야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드디어 천고마비의 계절이 왔구나. 아니 근데 로판에 무슨 사계절이 있냐. 하여간 고증이 쓰레기라니까.”

나는 미간을 구부리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곤 내일 있을 연회에 대해 생각했다.

“에드먼드는 물론이거니와 나에 대한 평판도 그리 좋지만은 않단 말이지…….”

요 며칠 소실된 원작의 내용을 기억해 낸 결과, 이곳에서 ‘클로엔 랜돌프’의 평판은 정말이지 똥 중의 똥이었다.

원치 않는 결혼 이후, 오롯이 에드먼드에 대한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올랐었으니, 주변인들을 살필 여력도 마음도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내일 파티에 가면 외톨이일 게 분명해. 이 구역 인싸가 되려면 응당 이목을 끌 만한 뭔가가 필요한데.”

“부인~!!”

고민을 이어 가던 찰나, 멀리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서두른다고 했는데, 요 앞에서 티모를 만났지 뭐예요. 잠깐 이야기한다는 게 조금 늦었어요.”

삽시간에 가까워진 샤샤가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가져온 것을 풀었다. 달콤한 빵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축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샤샤, 네가 생각하기에 내 강점은 뭐니? 전장에 나가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손에 들린 컵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남은 하나는 샤샤에게, 따로 준비해 온 라즈베리 열매는 쀼에게 건넸다.

“글쎄요……. 부인께 강점이랄 게 있을까요? 치명적인 약점이라면 모를까.”

샤샤가 건네받은 컵케이크를 베어 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이 맞네. 내가 강점이랄 게 어디 있겠니. 그저 사고만 치고 다니는걸. 어디 가서 싸움이나 안 붙으면 다행이지, 그치?”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너무 강점이 많아서 셀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하하.”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모양인지, 샤샤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 어디 그 강점이라는 거 어디 들어나 볼까?”

일순간 샤샤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언가 찾듯, 빠르게 주변을 훑던 샤샤가 침묵 끝에 말문을 열었다.

“영, 영물! 부인께는 영물인 쀼가 있잖아요. 그것만큼 큰 강점이 어디 있겠어요? 아마 이곳, 라비스텔에선 부인께서 유일하실걸요?”

말과 동시에 커다란 보랏빛 동공이 아래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정답이 있었는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커다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즈베리에 취한 쀼는 마주할 내일을 알지 못한 채, 연신 기분 좋게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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