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남은 시간, 단 6일.
헤슈턴 가문의 무도회가 열리기까지 내게 할애된 시간은 고작 6일이 전부였다.
큰소리 떵떵 치며 호기롭게 연회 참석을 외쳤으나 실상 날짜가 다가오니 불안했다.
“보자, 여기서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앞코로 찍어 주면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직관하며 홀로 자세를 잡아갔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뭘 하든 엉성했다. 연습을 이어 갈수록 어제의 내가 원망스러운 건 덤이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뭣도 모르면서 어디를 간다고. 하여간 이놈의 주둥이가 원흉이야.”
삐걱거리는 두 다리가 엉거주춤 움직일수록 옆에 있던 샤샤의 낯빛 또한 점점 어두워졌다.
“부인, 이래서는 춤은커녕 박자도 못 맞추실 것 같은데요.”
“이게 다 처음이라 그런 거지, 익숙해지면 뭐든 못 할까. 샤샤 네가 모르나 본데 내가 원래 배움이 엄청 빠른 사람이야.”
“그래서 글을 여태 못 떼셨죠…….”
샤샤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직 글을 못 뗀 건 팩트 중에 팩트였으니 말이다.
“흠흠, 됐고. 그러지 말고 내 앞에 딱 서 봐. 파트너가 있다고 생각하면 더 수월할지도 몰라.”
“에에? 제가요?”
“그래. 지금까지 나 알려 준 것도 너잖아. 그러니까 딱 서 봐. 내가 여자고, 샤샤 네가 남자인 거야.”
“에이~ 무슨! 저라고 뭐 춤을 아나요.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거로 이야기나 해 본 거죠. 차라리 공작님께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에드먼드한테?”
구미가 당기는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샤샤와의 거리를 좁혔다.
“네! 어차피 부인께서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걸 공작께서도 아시는데, 이거라고 모른다고 한들 이상하게나 생각하시겠어요? 도리어 아는 게 더 이상하죠.”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을 마친 난 곧장 걸음을 돌렸다.
“잠시만요, 부인! 갑자기 어디 가시려고요!”
들려온 말소리에 나는 새초롬히 고개를 돌렸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해 뭐 해? 이젠 척하면 척하고 알아야지.”
“하지만 공작께서는 지금쯤 연무장에 계실 텐데요?”
“알게 뭐람. 기다리면 되지. 여기 나보다 한가한 사람 있어?”
대답을 마친 난 빠르게 입구로 향했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은 오늘도 역시나 망설임이 없었다.
* * *
“여보!”
때아닌 불청객의 등장에 에드먼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긴 또 무슨 일이야?”
“일종의 서프라이즈?”
짝짝! 싱긋 미소 지은 그녀가 가녀린 손뼉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양손을 무겁게 한 사용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뭐긴요? 먹고 마실 것들이지. 당신이 너~무 빡빡하게 굴어서 단원들이 지쳐 간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마음이 아파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레틴한테 부탁했죠.”
“기사단 일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말라,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나도 안 하고 싶었어요. 근데 이 땡볕에 몇 시간씩 세워 두는 건 너무하잖아요. 아무리 더위가 꺾였다지만, 여름은 여름이라고요.”
딱히 받아칠 말이 없어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도 좀 유해질 필요가 있어요.”
나는 부러 구겨진 옷깃을 정리해 주며 퉁명스레 말했다. 여기에서 뒤로 물러났다가는 에드먼드의 폭풍 잔소리가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이럴 때는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가느다란 손끝이 옷깃을 지나 위쪽으로 향했다. 이내 훈련 중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정돈하며 거리를 좁혔다.
‘어떠냐, 나의 시간차 공격이.’
나는 부러 예쁘게 미소 지으며 눈살을 접어 댔다. 어젯밤 마주했던 에드먼드의 진득한 시선을 기억했다.
평소처럼 차가웠으나 그 안에 서린 은은한 갈망을 미처 숨길 수는 없었다. 한순간 탁해진 분위기에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긁으며 거리를 벌렸다.
“내가 알아서 하지.”
“하여간 부끄러워하기는.”
“그렇다 치고.”
에드먼드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정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클로엔의 말만 따라 굳이 이 땡볕에, 힘들여 가며 연무장을 찾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그냥 당신 보고 싶어서 왔죠. 어제만 해도 내 방에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오늘은 도통 소식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 당신이야말로 나 때문에 할 일을 못 한다고 얼마 전까지 툴툴거리지 않았던가?”
“내가 언제요? 설사 그렇다 한들 괜히 단원들한테 화풀이하고 그러면 안 되죠.”
“그런 적 없어.”
“아닌 것 걔튼뒈~”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얄밉게 말했다. 한 번씩 놀려 먹을 때면 아닌 척, 정색해대는 게 얼마나 재미난지 에드먼드 본인은 모를 거다.
“개인별 연습량이 부족해서 훈련 시간을 늘렸을 뿐이야.”
슬슬 한계에 다다른 듯, 에드먼드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나왔다. 현자 왈, 언제나 멈출 때를 알아야 피박을 면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때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잠깐 이리로 와 봐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클로엔은 가뜩이나 작은 몸을 옹송그리며 주변을 힐끗거렸다.
“그냥 말해.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써.”
무덤덤한 반응에 클로엔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에드먼드는 낮게 한숨 쉬고는 마지못해 몸을 숙였다.
“뭔데 그래?”
“부탁할 게 있어요”
“부탁? 대체 뭐길래 이렇게 거창하지.”
“아무래도 당신이 시크릿 수업을 해 줘야겠어요.”
“시, 시크릿 뭐?”
“시크릿 수업. 춤을 좀 알려 줘요. 기억을 잃으니 이놈의 몸도 감각을 잃었지 뭐예요. 도통 스텝을 못 밟겠어요. 명색에 댄스파틴데 그래도 한번은 흔들어 줘야죠.”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헤슈턴의 연회에 가야겠어?”
얼토당토않은 부탁에 에드먼드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춤을 알려 주는 것이야 문제없었으나, 어쩐지 민망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연하죠! 사교계 유명 인사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내가 어제도 그랬잖아요, 이참에 우리 랜돌프 공작 가도 확실히 자리매김해야 한다고요. 원래 잘되던 가게도 동네 목소리 큰 아줌마가 맛없다고 하면 망하는 법이에요.”
하여간 뭘 모른다니까.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지금 상황에 맞는 예시라고 하는 건가? 동네 아줌마가 갑자기 왜 나오지?”
“됐고, 다른 부탁도 하나 더 있어요.”
오늘도 어김없는 일방통행식 화법에 에드먼드는 낮게 신음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는 듯, 공작의 붉은 동공이 색을 잃은 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샐쭉 미소 지은 그녀가 다음 말을 이었다.
* * *
에드먼드는 책상에 놓인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를 한동안 바라봤다. 이내 결심한 듯, 말려든 종이를 펼쳤다.
[3시, 후원]
종이 위엔 누가 보아도 클로엔의 것으로 보이는 엉성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겨우 자음자나 맞춘 삐뚤빼뚤한 필체였으나 노력이 가상했다.
“근래 들어 열심이더니, 제법 실력이 늘었군.”
에드먼드는 작게 코웃음 치며 벽면을 살폈다. 이내 2시 55분에 다다른 시계 초침을 확인하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라? 공작님, 어디 가십니까?”
때마침 들어온 멜빈이 말을 걸어왔다. 손에 들린 서류 뭉치를 보아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인 모양이었다.
“클로엔이 잠시 보자는군.”
에드먼드는 부러 양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말했다.
“부인께서요?”
“응.”
“아까 연무장에도 오셨다던데.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 건 아니겠죠? 그사이 요제프와 손을 잡았다던가…….”
힐끔, 공작의 눈치를 살핀 멜빈이 뒷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괜한 노파심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부인께서 기억을 잃으신 이후, 얼마나 저희 가문을 위해 힘을 쓰셨는데요. 그럼요.”
하지만 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기분일까?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절대 믿을 수 없다던 제 상관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 약속한 시각은 언젭니까? 저 때문에 부인께서 괜히 기다리시는 건 아닌지……?”
“유능한 자네 덕분에, 나는 2분 안에 후원에 도착해야겠군.”
에드먼드가 58분에 다다른 시계 초침을 가리키며 삐딱하게 섰다.
“오늘 보셔야 할 문건은 정말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두 분의 즐거운 시간을 응원합니다.”
전형적인 겉치레 미소와 함께 멜빈이 길을 터 줬다. 그와 동시에 도도한 공작의 발걸음이 쏜살같이 튀어 나간 건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