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실로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태울 듯 내리쬐던 무더위는 한풀 꺾여 선선한 바람을 만들었고, 줄곧 예민하게 굴던 영물께서도 나름의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클로엔은 어디 있지?”
“정원에 계십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쀼와 함께 디저트를 드실 겁니다. 오늘 들어 온 블루베리가 무척 싱싱하다며 꼭 같이 먹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공작의 물음에 멜빈은 재빨리 답했다. 괜한 심기를 건드려 새우 등이 터지는 신세는 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놈 같으니…….”
대답을 들은 에드먼드가 홀로 중얼거리며 이를 아득 물었다. 대체 누굴 보며 영악하다고 말하는지는 몰랐으나, 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
“그리로 가지.”
“하지만…… 오늘 꼭 살펴야 할 문건이 있으십니다.”
“들고 가.”
이어진 공작의 말에 멜빈이 “네.” 짧게 답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책상에 놓인 크고 작은 서신들을 한데 모아 챙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발걸음이 복도로 향했다. 스치듯 살핀 랜돌프 공작을 보며 멜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날 밤, 공작 부부의 침실.
“쀼쀼! 쀼! 쀼!!”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귀를 찌르는 소음이 허공에 울렸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참다못한 에드먼드가 미간을 왈칵 구기며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낮게 읊조린 그가 케이지가 있는 아래쪽을 봤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 안은 빈 상태였다. 그리고 그때.
“쀼!!!”
앙칼진 울음소리가 오른 귀를 자극했다. 에드먼드의 붉은 동공이 소리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간악한 밤송이가 삐죽 가시를 세운 채 울어댔다.
“벌써 며칠째지!? 왜 잠들 만하면 옆에 와서 울어……! 대냐고.”
버럭, 언성을 높이려던 그가 곤히 잠든 클로엔을 힐끔거리고는 소리를 낮췄다.
“쀼.”
바르작거리는 에드먼드와 달리 쀼는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몸을 돌렸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 아래로 내려가 케이지를 기어 올라갔다.
“한낮 짐승에게 이성을 구하느니, 사람인 내가 참아야지.”
흡사 저를 놀리는 듯한 태도에 에드먼드가 이를 사리물며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에드먼드가 수마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던 찰나.
끼릭, 끼릭, 끼리리릭!
의도가 분명한 밤송이는 보란 듯이 쳇바퀴를 굴려댔다.
“저 빌어먹을 밤송이.”
낮게 읊조린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아우라가 케이지 앞에 서자, 위기를 느낀 밤송이가 연신 날카롭게 울어댔다.
“쀼쀼!!! 쀼!!”
커다란 손아귀가 신경질적으로 케이지를 붙들려던 찰나.
“여름엔…… 생맥주에 오징어……. 흠냠.”
뒤척이는 소리에 에드먼드의 시선이 힐끔, 뒤쪽을 향했다. 열린 시야 너머로 단잠에 빠진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휴,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허공에 있던 에드먼드의 손이 스르르 거둬졌다. 곧이어 잔뜩 찌푸린 미간이 창살에 붙은 소동물을 향했다.
“클로엔이 깰 것 같으니 귀신같이 조용해졌군.”
“…….”
“지금처럼만 해, 밤송이. 나는 괜찮지만 클로엔까지 귀찮게 했다가는 진짜로 내쫓을 줄 알아.”
에드먼드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엄포를 놓았다, 기세에 꺾인 듯 연신 사납게 굴던 밤송이가 “쀼.”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 한쪽에 만들어 놓은 작은 동굴에 몸을 파고들었다.
‘영물이라더니 보통이 아니군.’
마르스의 말만 따라, 저 간사한 밤송이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게 분명했다.
* * *
“에드먼드?”
들려온 인기척에 클로엔이 아는 체를 해 왔다.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반가움을 표하려던 그때였다.
“쀼?”
테이블 위에 앉아 식사에 한창이던 쀼 역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빠지직!
그와 동시에 극명히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이글거렸다.
흡사 링 위의 전사들 같았다. 고작 손바닥만 한 생물체에 으르렁대는 꼴이 스스로 우스웠으나 에드먼드는 멈출 수 없었다.
연신 스파크를 뿜어내는 에드먼드를 바라보며, 클로엔이 낮게 한숨 쉬곤 한마디 거들었다.
“오자마자 또 왜 그래요. 그래 봤자 연약한 동물이잖아요.”
“순수한 낯짝으로 당신을 홀리고 있는 거야.”
“예예. 알겠으니까 어서 앉아요. 볕이 엄청 따뜻해요.”
“정말이래도 그러네. 당신이 잠만 들면 저 밤송이가 나한테 얼마나 영악하게 구는지 알기는 하나?”
“네, 너무 똑똑해서 내가 잠들 때만 쳇바퀴를 굴린다죠. 그것도 밤새도록.”
못 말린다는 듯, 클로엔이 심드렁히 되받아쳤다. 그러곤 멀뚱히 서 있던 멜빈을 향해 맞은 편에 앉으라 눈짓했다.
“이번에 샤샤랑 만든 허브차인데, 멜빈도 한번 마셔 봐요. 적당히 알싸한 게 지금 날씨에 딱 좋아요.”
“매번 감사합니다, 부인.”
건네온 호의에 멜빈이 샐쭉 미소 지으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지. 당신이 깰 기미가 보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자는 체를 한다니까? 내가 밤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면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샤샤 방에도 가져다 놔보고, 단원들 방에도 가져다 놔봤잖아요. 근데 그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클로엔이 앞에 놓인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적거리며 무심히 말했다. 그러고는 잘 우려진 찻물을 멜빈에게 건네며 쐐기를 박았다.
“되레 너무 잘 자서 문제였지. 안 그래요, 멜빈?”
“예. 영물의 기운 때문인지, 쀼와 함께 한 날이면 악몽 하나 없이 개운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도 차향이 무척 좋습니다, 부인.”
멜빈이 건네받은 차를 음미하며 눈을 반짝였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과일 향과 알싸한 허브향이 굳이 맛보지 않아도 그 맛을 가늠케 했다.
“그렇죠? 레틴에게 특별히 부탁했거든요. 좋은 재료들로 준비해 달라고. 멜빈의 입에 맞다니 나도 기쁘네요, 홍홍.”
오늘도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에드먼드는 소리 없이 으르렁댔다.
“아무튼, 당신이 유독 예민한 거라고요. 설사 밤에 그랬다고 해도 어떻게 당신한테만 그러냐고요. 아무리 우리 애가 똑똑해도 그렇게까지 명석할까.”
말도 안 된다는 듯, 클로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컵케이크 위에 장식된 라즈베리 하나를 집었다.
“쀼, 하나만 더 먹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들고 있던 과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찻잔 근처에 있던 쀼가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움직였다.
“부인께서 돌보아 주신 덕분에 쀼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왕이면 공작께서도 잘 지내시면 좋을 텐데, 왜 저리 어깃장이신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렇게 신경 쓰이면 전처럼 따로 자자니까 그건 또 싫다고 하고. 어차피 잠만 자는 거지 뭐, 손가락 하나도 안 건드리면서 고집이라니까.”
풉!
“하하하!”
멜빈이 마시던 찻물을 뿜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달아오른 뺨에 연신 손부채질했다.
“요즘 한가한 모양이야?”
피부 위로 매서운 공작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그 눈빛이 ‘이쯤 했으면, 적당히 먹고 빠져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씬 다가온 위기감에 멜빈은 앞에 놓인 찻물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오우, 저런……. 통각이 없으시나 보네. 많이 뜨거울 텐데.”
클로엔의 걱정 어린 추임새가 들려왔으나 목숨 보전이 먼저였다. 이대로 눌러앉아 있다가는 앞으로 보좌관 생활이 수월하지 않을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쿨, 쿨럭! 오늘도 잘 마셨습니다. 부인.”
멜빈이 타는 목을 잡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더 있다 가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공작님을 대신해 살펴야 할 문건도 많고, 단원들에게도 가 봐야 합니다. 제가 이럴 때가 아닌데 하하하.”
“그럼 뭐 별수 없죠. 나야 한가하다 못해 시간이 남아돌지만 바쁜 사람 잡아 두는 건 실례니까.”
커다란 두 눈이 멜빈을 향해 예쁘게 휘어졌다. 그에 따라 에드먼드의 동공 역시 매섭게 번뜩였다.
“공작님, 가져온 것들은 여기에 두겠습니다. 오후 중으로는 꼭 살피셔야만 합니다.”
멜빈이 말을 덧붙이며 빠르게 멀어졌다. 곧이어 말간 두 눈이 서류에 집중하던 에드먼드에게 닿았다.
‘왜 굳이 여기서 일을 하지?’
요즘 들어 왜 이리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뭐 잘생긴 내 남편 오래 보고 있으면, 나야 좋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드먼드에게 집중했다. 괜한 말로 부쩍 가까워진 관계를 망칠 이유는 없었으나 그래도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밤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굳이 합방을 고집하는 것도, 내내 잠을 못 자 괴롭다며 고집스럽게 쀼와 함께하길 원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부끄럼을 많이 타나? 아니면 보기와 다르게 밤에 좀 지는 스타일인가?’
시선을 느낀 그가 보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아니, 뭐 그냥…… 오늘도 참 한결같이 잘생겼다. 그런 생각을 했달까요?”
“싱겁기는.”
이제는 이마저도 익숙한지, 에드먼드가 무심히 답하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이혼만 면하면 장땡이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수북하게 쌓인 서신들 사이에 유독 화려한 봉투가 눈에 띄었다.
‘보자…… 어디서 많이 본 글씨인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갈겨쓴 글자에 집중했다. 처음엔 어려웠던 동대륙의 언어도 에드먼드의 도움 끝에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물론 간단한 이름자와 자주 쓰이는 단어 정도만 알아보는 수준이었으나 이만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수신인 : 클로엔 랜돌프]
“에? 여보, 이거 나한테 온 건데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발신인을 보며 절망했다.
[발신인 : 요제프 헤슈턴]
그는 헤슈턴 후작 가문의 맏아들이자, 원작 여주의 오랜 약혼자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갈라놓은 사람이 바로.
“…….”
에드먼드 랜돌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