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샤샤, 이사 준비는 철저히 했어?”
“그럼요! 쓰시던 이불이랑 잠옷이랑 빠짐없이 준비했죠.”
“이불? 이불은 왜? 어차피 그이랑 한 이불 덮고 잘 건데, 굳이 챙겨 갈 필요가 있나?”
괜한 민망함에 길게 늘인 백금색 머리칼을 손으로 비비 꼬며 뒷말을 흐렸다.
‘이왕이면 야성의 짐승남이 좋겠는데. 낮이밤저, 뭐 그런 거 아니겠지?’
말간 머릿속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붉은 장면들이 빠르게 채워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르익은 상상에 샤샤가 불을 지폈다.
“이제 곧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에요. 공작님께 가시죠.”
그와 동시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거사를 치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수축하고 긴장이 몰려왔다.
“아…… 배 아픈 것 같은데.”
말과 달리 복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한 손에는 붉은 포도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쀼가 담긴 케이지를 들고 비로소 전장에 나섰다.
* * *
“여~보?”
애교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열린 시야 너머로 다소 편안한 차림의 에드먼드가 보였다.
“아, 왔군.”
소파에 있던 그가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무심히 말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려놓은 책을 고쳐 잡았다.
‘뭐야, 신개념 밀당이야 뭐야. 반응이 왜 저따윈데?’
미적지근한 남편의 반응에 퍽 기분이 상했다. 먼저 합방하자며 꼬셔댈 때는 언제고, 저렇게 꼬리를 자른단 말인가.
‘아~ 부끄러워서 그렇구나? 하여간 보기와 다르게 순 숙맥이라니까.’
그리 생각한 난 새초롬히 웃으며 에드먼드에게 다가갔다. 손에 들린 케이지에서 연신 “쀼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뭘 그렇게 재밌게 봐요?”
나는 부러 두 눈을 깜박이며 사랑스럽게 물었다. 물론 마주한 상대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미신이 미치는 시장 경제의 위험성과 그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 보고 있어.”
그게 뭔 개떡 같은 말이야.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진심을 애써 찍어 누르며 나는 퍽 흥미롭다는 듯 말을 붙였다.
“어머, 그것참 정말 재밌겠다. 근데 이제 슬슬 자야 하지 않겠어요? 벌써 자정이 다 돼 가는데.”
“그래, 어서 자. 피곤하겠군.”
“응? 당신은요?”
선을 긋는 듯한 에드먼드의 태도에 나는 두 눈을 끔벅이며 되물었다. 삽시간에 정적이 흘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커다란 에드먼드의 손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앉아 있던 붉은 벨벳 소파를 툭툭 두드렸다.
“난 여기에서 자야지.”
그와 동시에 고았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이를 아득 물며 최대한 이성을 유지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여기에서 잔다니?”
“말 그대로야. 나는 여기, 소파에서 자고 당신은 편히 침대에서 자고.”
“아니, 합방하자면서요?!”
“그래, 합방. 같이 방에 있자고. 지금처럼.”
황당한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걷어붙였다. 바닥에 놓인 밤송이 역시 같은 생각인지, 연신 “쀼쀼!”거리며 불쾌한 기분을 토로했다.
“참나,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죠. 그냥 같은 방에 있으면 그게 합방이야? 그럼 뭐, 멜빈이랑도 합방하고 티베로하고도 합방하고 그러면 되겠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여기서 그 두 사람이 이름이 왜 나오지?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당신이 생각해도 지금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죠? 내가 딱 그렇다니까요? 이 황당무계한 상황을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네?”
“뭘 어떻게 할 필요 없어. 그냥 저기 가서 편히 자면 돼. 당신 방처럼.”
“아니! 그럴 바엔 그냥 내 방에서 자고 말죠. 왜 굳이 여기까지 오냐고요. 아, 몰라! 나 갈래요. 사람 설레게 해놓고 흥 깨는 데는 선수라니까 정말.”
나는 연신 툴툴거리며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쐐기를 박듯, 내려놓았던 케이지를 다시금 집어 들었다.
“잠깐.”
말과 동시에 거침없이 나아가던 두 다리가 자리에 멈췄다. 이내 무슨 일이냐는 듯, 새초롬히 돌아봤다.
“왜요? 또 소파에서 잘 거라는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나 그냥 갈 거예요.”
“같이 자. 그래, 같이 자자고.”
그 말에 클로엔의 입꼬리가 간악하게 올라갔다. 눈앞의 존잘남을 어떻게 찜 쪄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에드먼드가 말을 덧붙였다.
* * *
자리에 누운 두 사람은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지런한 침대 위,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듯 부부는 각각의 모서리에 찰싹 붙어 있었다.
‘젠장, 열 받아서 잠도 안 와.’
나는 말똥한 두 눈을 끔벅이며 조금 전 나누었던 설전을 되새겼다. 호기롭게 한 침대에 눕자길래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후세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했지만, 결과는 FAIL. 실패 중에 대실패였다.
‘단, 조건이 있어. 절대 이 선을 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