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파사삭-
정체불명의 소리가 다시 한번 내부를 울렸다. 기척을 따라 가지런하던 커튼 위로 물결이 일었다.
둥글넓적한 그림자. 분명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인간이라면 저런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서, 설마…… 귀신?
커튼 뒤 물체는 반질반질 달걀을 연상시켰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귀신이라기엔 조금 애매한걸?
창가로 향해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잘게 접혔다.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이상 생물체는 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오롯이 커튼 뒤의 생물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 달걀 껍데기, 당신 눈에도 보이는 거죠?”
이어진 물음에 에드먼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보고 있는 걸 보아, 적어도 귀신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그렇다면 저건 대체 뭘까?
판타지 소설이라는 배경답게 저택을 침략한 마물? 아냐 아냐, 그러기엔 실루엣이 너무 하찮아.
“설마…… 스, 슬라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상대가 이상함을 알아차려 달아나기라도 하거나, 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피차 난감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기엔 공격성이 낮아. 이곳 베델른의 슬라임은 다른 지역과 달리 꽤나 난폭하거든.”
“하지만…….”
나는 말문을 흐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으니 무어라 반박할 수도,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그럼 저, 이상 생물체는 도대체 뭐냐고!’
그사이 날카로운 마찰음은 점점 더 커졌다. 소리의 빈도가 잦아질수록 내 눈망울 역시 빠르게 떨려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답답한 마음에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때였다. 겹쳐 있던 에드먼드의 몸이 슬며시 떨어져 나갔다.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 말릴 새도 없이 단단한 그의 팔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러곤 울상인 얼굴로 속삭였다.
“뭐, 뭘 하려고요!”
“쉿, 조용. 그냥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다가 정말 괴물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어쩌긴? 죽여야지.”
에드먼드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냥 평소답게 행동해. 혹여라도 낌새를 느끼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직은 저쪽도 눈치를 못 챈 듯하거든.”
에드먼드가 살랑이는 커튼 자락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냥을 앞둔 포식자의 모습을 눈앞에 둔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거다.
그가 지니고 있던 단도를 바로 세운 채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섰다. 커다란 손아귀가 너풀거리던 커튼 자락을 재빨리 걷히던 그때.
“쀼?”
앙증맞은 울음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 * *
“고……슴도치?”
나는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눈앞의 생물체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자그마한 손발과 동글동글한 검은 눈동자, 뭉뚝하게 튀어나온 주둥이.
그리고 까슬까슬해 보이는 가시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고슴도치가 분명했다.
“이 이상하게 생긴 생물체를 아나?”
잔뜩 일그러진 에드먼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에드먼드가 고슴도치를 향해 손은 뻗었다.
“조, 조심! 찔려요!”
“아악!”
경고가 무색하게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아래에는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가 “쀼! 쀼!” 성난 울음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에드먼드가 아픈 손을 부여잡은 채, 으르렁거렸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버럭 소리친 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가시에 찔린 모양인지 에드먼드의 피부 위로 불긋한 반점들이 곳곳에 올라와 있었다.
“저 좁쌀만 한 게 갑자기 가시를 세웠다고!”
“함부로 덤빈 당신 탓이죠. 작다고 얕봤다가는 큰코다친다고요.”
눈살을 찌푸린 채 부푼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제 손바닥만 한 작은 생물체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지금 웃은 건가?”
“아뇨, 잘못 본 거예요. 이런 쯧쯧……. 빨리 소독부터 해야겠네.”
“말 돌리지 말고.”
“말 돌리는 게 아니라, 난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라고요. 그대로 뒀다가는 염증에 가려움에 엄청 괴로울걸요?”
“당신. 저, 하급 몬스터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날카로운 시선이 어느새 저를 향했다. 조금 전과 달리 격양된 목소리와 불신에 찬 붉은 눈동자를 보아하니, 이번에도 크나큰 오해를 하는 게 분명했다.
“고슴도치.”
재빨리 그의 말을 정정했지만,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해 말했다.
“이번만큼은 모르는 척할 수 없을 거야. 살아 있는 증거가 여기 있으니까. 바른대로 말해. 하급 몬스터와 무슨 연관이 있지?”
“몬스터 말고 고슴도치.”
“뭔슴도치?”
“고! 슴! 도! 치! 개, 고양이, 새 뭐 이런 것처럼 동물이라고요. 몬스터가 아니라.”
에드먼드가 콧방귀를 뀌며 느슨한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걸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 당신 말대로 저게 동물이라고 치자고. 그렇다면 저 고슴도치 나부랭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그거야 나도 모르죠! 당신이 얘랑 초면인 것처럼, 나도 얘랑 초면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저 하급 몬스터가 삼엄한 랜돌프 저택의 경계를 허물고 들어온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몬스터가 아니라 동물이라니까 그러네.”
“누군가의 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쐐기를 박으려는 듯, 한음 한음 강조하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의도가 분명했다.
“허! 촤! 그래서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아, 그래서 내가 길 문이라도 터 줬다? 무엇을 위해서? 왜?”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지 않나? 놀랍게도 딱딱 들어맞지. 당신의 오랜 친우인 멜리사가 마법서를 들고 왔고, 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후에 저 이상한 괴생물체가 내 집에 떡하니 있으니 말이야.”
논리적인 그의 주장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모든 정황이 딱딱 들어맞으니 사실을 말해도 변명이나 다름없을 터.
어떻게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그럼 얘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려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굽혔다. 그러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어디서 왔니?”
말과 동시에 좁쌀만 한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쀼쀼!” 앙증맞은 소리까지 내보이며 말이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탄성을 내질렀다. 일순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어이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하다면서요.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는데 얘한테 물어봐야죠.”
“그래? 당신이 모른다면 응당 이 생물체는 죽어 마땅하겠군.”
에드먼드가 들고 있던 단도를 세게 그러쥐며 말했다. 당장에라도 저 날카로운 칼날을 붉게 물들 일 기세였다.
“그, 그건 안 되죠!”
“왜? 갑자기 잊고 있던 사연들이 떠올랐나? 이 고슴도치가 사라진 멜리사 영애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멜리사가 여기서 왜 나와. 걔 이름은 꺼내지도 말아요. 내가 누구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는데!”
“그럼 왜 안 된다는 거지? 이까짓 거쯤, 죽여 버리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싸울 이유도, 의심할 이유도 모두 사라지는 건데.”
이어진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에드먼드의 말만 따라 연관도 없는 고슴도치 따위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저를 향해 반짝이는 저 검은 눈동자를 보며, 오밀조밀 자그마한 손발을 보며, 귀엽다 못해 하찮은 저 분홍색 발바닥을 보며! 어찌 죽음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귀엽잖아요!”
“……뭐?”
“생, 생명이잖아요! 암세포도 생명이라는데, 하물며 고슴도치는 더 소중하지!”
에드먼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래, 말하는 나도 어이가 없는데 듣는 너는 오죽하겠니.’
방황하는 눈동자가 넌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소리 없이 물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던 그때.
“공작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우렁찬 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흔들렸다. 멜리사까지 사라져 버린 이 상황에 제삼자가 끼어든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에드먼드 역시 같은 생각인지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문밖으로 공작님의 비명이 들렸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닫힌 문이 열리고, 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입구에 선 공작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별일 아니니까 나가 봐.”
“부인께서 또 멱살잡이라도 하신 겁니까? 그러기에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자고.”
멜빈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상함을 느낀 듯,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멜리사 영애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아하하, 급한 일이 있다고 갔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되받아쳤다.
“나가는 걸 보지 못했는데요?”
“그, 그럴 리가요. 조금 전에 갔는걸요. 우리 보좌관님도 참, 요새 시력이 안 좋아지신 모양이에요? 안 그래요, 여보?”
당황한 목소리 함께 에드먼드를 향해 눈짓했다. 이대로 멜빈까지 관여하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꼬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거다.
“됐으니까, 이만 나가 봐.”
에드먼드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둘러 축객령을 내렸다. “네.” 짧은 대답을 뒤로, 멜빈이 입구로 향하던 그때였다.
얼마나 갔을까, 이상함을 느낀 멜빈의 눈동자가 천천히 뒤쪽을 향했다.
“그런데 여기…… 저희 말고 무언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다, 다른 거? 보좌관께서 보기보다 예민하시네요. 여기 저랑 공작님 말고 누가 또 있다고. 하하.”
“아무래도 이상한데…….”
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세 사람 사이에 아슬한 정적이 이어지던 그 순간.
“쀼!”
돌아선 등 뒤로 눈치 없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