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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31)화 (31/107)

제31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작님.”

“뭐라고 했지, 지금?”

날이 선 랜돌프 공작의 목소리가 찌를 듯 귓전을 때렸다. 충성심에 이글거리는 눈동자, 멜빈 역시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건 아닌 것 같다…… 말씀드렸습니다.”

“아, 그러면 이대로 모르는 척. 반역을 도모하게 둬라, 이 말인가? 가뜩이나 그 여자는 황제에게 미운털을 박혔는데?”

에드먼드가 마른 입술을 쓸어내리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옅게 미소 짓는 공작의 눈동자에 일순, 살기가 서렸다.

“멜리사 영애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메트린 마법단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릴 이유가 없습니다.”

“글쎄. 그 여자가 과연 비밀에 굳혔을까?”

“부인께서 사실을 공유했다 하더라도, 이대로 응접실에 들이닥치셨다가는 의심 많은 남편, 예의 없는 귀족으로 낙인찍히실 수도 있습니다! 이게 다…… 공작님을 위해서입니다.”

멜빈의 적나라한 말에 에드먼드의 미간이 빠르게 씰룩였다. 이내, 나른한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내가 언제부터 귀족이었지?”

따사로운 얼굴과 달리 얼음장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작위를 받은 지난 3년간 공작께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건수를 잡은 멜리사 측에서 소문이라도 퍼트리신다면!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이…… 더 떨어질 겁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전쟁통이나 뒹굴던 몰락 귀족에게 평판은 사치지.”

“공작님!”

“지금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가? 언제부터 내가 항명을 받았지?”

“하…….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만약 두 사람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면요? 되레 위험한 쪽은 우리입니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갔다가는…….”

에드먼드의 동공이 멜빈을 향해 매섭게 번뜩였다. 시선을 느낀 멜빈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그렇죠, 걱정이! 부인께서 마법단과 관계가 있다고만 하셨지, 그곳의 수장이라니요! 이건 또 이야기가 다르잖습니까?”

“그래서 겁먹었나? 며칠 전부터 말이 무척 많군? 옆에서 계속 짹짹짹.”

“공작님!”

“그런 게 아니라면 잔말 말고 비켜. 둘이 무슨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에드먼드가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우며 말했다.

“안 됩니다.”

그 순간 멜빈이 양팔을 벌리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귀찮게 구는 것인지, 마음은 알겠으나 불필요한 충성심은 온화한 마음을 부수기에 충분했고.

“안 돼? 그러면 대책이 있나?”

“일단 영애께서 돌아가신 뒤에 부인과 따로 말씀하시는 게……!”

“그러다 내 아내가 정말로 마법단을 이끌고 반역에 가담이라도 하면? 그 가녀린 여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예? 지금…… 부인을 걱정하신 건가요?”

“아, 아니! 그럴 리가! 나 말이야, 나. 클로엔 하나 때문에 내가 다치면! 그건 문제잖나?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모두가 죽을 수는 없잖아? 멜빈, 너, 죽고 싶어?”

“어휴, 그럴 리가요. 그런 무서운 말을. 저는 되도록 무병장수할 겁니다! 오래 살 거라고요.”

멜빈이 손사래 치며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에드먼드가 낮게 한숨 쉬며 하던 말을 이었다.

“그저 상황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야. 겁도 없이 내 영역까지 온 불청객에게 경고도 해 줄 겸.”

“저는 또 공작께서 부인을 극진히 생각하시는 줄 알고, 순간 착각했습니다. 그사이 애처가라도 되신 줄 알았지 뭡니까.”

일순 살기 어린 눈빛이 느껴졌다. 집요한 시선이 한동안 계속되고

“하하, 역시…… 그럴 리가 없죠.”

멜빈이 작게 읊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늘한 눈동자가 다시금 앞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두 개의 인영이 닫힌 문 앞에 섰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에드먼드는 체면도 잊은 채 귀를 바짝 붙였다.

“……모르겠…… 이유가…….”

웅얼거리기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그 말뜻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냥 문을 열까요?”

멜빈의 물음에 에드먼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귀를 기울인 채,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집중하던 그때였다.

“네가 일전에 부탁했던, 마법 서식.”

또렷이 들려오는 말소리. 정면을 향했던 시선이 일순, 서로를 향했다. 조용히 신호를 주고받던 두 남자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공, 공작께서 여기엔 어떻게!”

응접실 안에는 당황한 멜리사와 작은 종잇조각을 집어 든 채, 예쁘게 미소 짓는 클로엔의 모습이 보였다.

“여보? 바쁘다면서요?! 나 보러 온 거예요?”

천진한 물음과 동시에 클로엔의 작은 몸이 그에게 엉겨 붙었다.

“……!”

후, 에드먼드가 낮게 신음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 다짐은 삽시간에 부서졌지만 말이다.

“아휴, 우리 남편이 또 이렇게 나를 생각해. 나 없이는 한시도 못 산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정말. 인사해, 내 남편이야. 에드먼드 랜돌프.”

“장난은 이쯤 하지.”

“부끄러워하기는, 귀여워 정말.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면 반칙이지, 반칙!”

클로엔이 에드먼드의 두 뺨을 비비적거리며 조그마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무너지는 평정심에 에드먼드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공작 부부를 제외한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클로엔을 붙잡은 채 낮게 일갈하는 에드먼드와 난감한 듯 뒤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보좌관.

그리고 눈앞의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대체…….”

멜리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벌어진 입매를 가로막았다. 원망을 하다못해, 공작을 향해 저주를 퍼붓던 친구의 모습은 어디를 가고.

“넘모 귀여워……! 오또카지? 딱, 잡아먹어 버리고 시푼데?”

“그만하래도!!”

기어코 큰 소리가 나왔다. 에드먼드의 격분 끝에 부부의 몸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아쉬운 듯, 클로엔이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부끄러워한다니까…… 쯧.”

에드먼드가 다소 지친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러곤 언제나 그랬듯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이군요, 멜리사 영애.”

“네, 오랜만이네요. 랜돌프 경.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네요.”

“이 사람이 걱정돼서.”

경고하듯, 에드먼드는 부러 클로엔의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으며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이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네요. 얼마 전 사고가 있었다길래 걱정돼서 와 봤는데 괜한 염려였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멜리사 영애. 제 아내는 제가 잘 지키고 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그렇담 다행이네요. 클로엔이 항상 우울해하길래 걱정했거든요.”

주고받는 대화 속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분명 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끼어들 수 없는 불편함.

‘더럽게 불편하네, 정말. 뭘 알아야 말리기라도 하지.’

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아! 저는 이만 돌아가야겠네요. 약속이 있는 걸 깜박해서. 미안해, 클로엔. 조금 더 같이 있어야 하는데 중요한 일정을 잊었지 뭐야.”

멜리사가 두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다정히 말했다. 온화한 미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그녀의 시선.

“쁠르, 슴겨.”

멜리사가 손에 들린 종잇조각을 힐끗거리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나는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응? 뭐라고?”

“숨기라고.”

은밀한 속삭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알았다. 재빨리 손에 들린 종잇조각을 옷자락 사이로 숨기려던 그때였다.

“잠깐.”

서늘한 목소리가 울리고, 에드먼드의 발걸음이 앞으로 향했다. 잡힌 손목 위로 멜리사의 손아귀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멜리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너 왜 이렇게 떨어.”

“…….”

정말 죄라도 지은 건지, 멜리사의 눈망울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옆 사람이 떨면 같이 떨린다더니, 괜히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손에 든 건 뭐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에드먼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멜리사가 가까이 왔다.

그러곤 빠르게 속삭였다.

“미안해, 아무래도 네 남편은 직접 처리해야겠어. 이건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라서.”

“응? 뭐라고?”

“로너스 스트릿 8번지, 붉은 차양 카페. 나머지 이야긴 거기서 해.”

옅게 미소 짓던 그녀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펑! 자욱한 연기와 함께, 멜리사의 모습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어머, 세상에! 어디 갔어. 멜빈, 봤어? 사람이, 사람이 사라졌어!”

놀라운 광경에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희뿌연 연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가려진 심연 뒤로 일그러진 에드먼드의 얼굴이 보였다.

“설명해야 할 거야.”

“…….”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상황을 보아, 아무래도 친구가…… 똥을 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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