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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30)화 (30/107)

제30화

“찾아와? 누가?”

짧은 질문과 함께 서류를 살피던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피부 위로 꽂혔다. 멜빈이 마른침을 삼키며 재빨리 답했다.

“카타린 백작 가문의 차녀이신, 멜리사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멜리사 영애?”

“네, 부인의 오랜 친우이자…….”

“아메트린 사학회의 동문.”

멜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드먼드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평온하던 얼굴 위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내 저택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마. 절대.”

“그게…… 집사가 이미 응접실로 모신 상황인지라.”

“또 그 빌어먹을 영감인가?”

“…….”

짜증스러운 물음에 멜빈이 침묵을 유지하며 대답을 아꼈다.

“애초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에드먼드가 미간을 구기며 이마를 집었다.

데릭 요하테. 곧 여든을 앞둔 나이 든 집사는 대대로 엘리테른 백작 가문을 모시던 인물이자, 샤샤와 함께 클로엔이 공작 가문에 데리고 온 이 중 하나였다.

물론 에드먼드 역시 나이 든 집사의 지혜와 감각을 인정하는 바였다. 오랜 연륜을 자랑이라도 하듯, 데릭은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일 처리를 자랑했으며, 새 주인인 저 역시도 극진히 모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던가?

유년기는 물론 클로엔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집사는 제 눈을 피해 오래도록 모셔 온 아가씨의 편의를 봐주고는 했다.

예컨대 이혼 서류 접수라든가, 도주용 마차를 구한다든가.

“빌어먹을.”

그 빌어먹을 호의와 충성심이 제 주인의 안위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집사는 알고나 있을까?

혹여라도 클로엔이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연기를 하는 거라면? 지금껏 해 온 모든 것들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선이었다면?

아찔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어지럽혔다. 하지만 한 번 물꼬를 튼 만약에, 라는 가정은 멈출 줄 몰랐고.

“…….”

시시각각 변해가는 제 상관의 모습에 멜빈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문 입을 유지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공작의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제 주인은 불필요할 정도로 조심스러웠고 또 치밀한 성격의 사내였다.

고로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대며 공작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집사는 물론, 그 불똥이 제게로까지 튈지 몰랐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

‘제발 오늘만큼은, 별 탈 없이 지나가게 해 주소서……!’

멜빈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보이지 않는 신께 빌고 빌었다. 짧은 침묵 끝에 고저 없는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클로엔은, 어쩌고 있지?”

“아마 지금쯤이면, 두 분이 응접실에서 찻잔을 기울이고 계시지 않을까요?”

“음…… 그래?”

간절한 기도가 먹히기라도 한 걸까? 평소와 달리 호의적인 공작의 반응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멜빈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죠! 모처럼, 옛 친우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보면 잊었던 기억을 되찾으시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잊었던 기억이 나와 이혼하고 내 저택을 벗어나던 그날이라면?”

“…….”

“그래도 잘된 일인 건가?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지 그래.”

“그, 그건 그렇지만…… 요즘 두 분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시……!”

그 순간 찌릿, 에드먼드의 날카로운 눈매가 멜빈에게 고정됐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게 분명했으니.

“하하하…….”

달라진 공기에 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얼버무렸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눈동자. 멜빈이 비에 젖은 똥강아지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다시금 멜빈의 귓전을 때렸다.

“아, 그래서 내 아내께서 오랜 친우와 함께 고고하게 차나 마시고 담소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이 말인 건가? 그러니 방해하지 말라?”

물음과 동시에 멜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등 뒤로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우르르 쾅!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쏟아지는 빗방울은 멈출 줄 몰랐고, 하늘은 온통 검은 먹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곧 들이닥칠 그의 앞날처럼.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공작님께……!”

어서 빨리 이 가시밭길 같은 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물론 찌를 듯 날카로운 시선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멜빈이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지 오래였다.

아슬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 다시 한번 우르르 쾅!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빠르게 흩어졌다.

“보좌관은 내 아내를 믿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아내가 정말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묻는 거야.”

“공작께서도 그리 생각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아무래도 부인께서 그간 보이신 행동들이 정상이라고 보기엔 조금 많이…… 이상하죠?”

힐끔, 멜빈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그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멜리사인지 뭔지 하는 그 여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멜리사 영애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공작께 해가 될 만큼?”

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드먼드를 향해 되물었다. 한 줌에 꺾일 듯, 가녀리기만 한 귀족 영애가 문제가 된다면 얼마가 큰 문제가 될까? 라는 안일한 마음과 함께.

“후…….”

무거운 숨소리와 함께 잘 정돈된 에드먼드의 머리칼이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이내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틈새를 벌렸다.

“황제가 처단하고자 하는 단체 중 가장 1순위가 어딘지 알고 있나?”

“음…… 글쎄요. 나트론 해적단? 아니면 벨퀴안 도적단? 아니스 혁명단? 저희 동대륙이 적으로 둔 곳이 어디 한두 개인가요. 수를 세려면 끝이 없는걸요.”

말과 동시에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피식,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고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식 명칭으로는 아메트린 마법단. 황실 마법단에서 제명된 인원들이 만든 불법 단체 중 하나지.”

“세상에, 그런 곳이 있었단 말입니까? 제명된 인원이라니 필시, 흑마법과 같은 사악한 일을 저지를 게 분명합니다! 그런 곳은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요.”

“그래, 그리고 그 중앙에는 클로엔 랜돌프, 내 아내가 있지.”

“예. 예!? 부인께서 그 중앙에 계시다니요?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작님. 하하하!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장난? 내가 한가하게 장난이나 치는 사람이었던가? 아메트린 마법단의 수장. 황실에게 버림받은 대마법사가 바로 그 사람이야.”

“서, 설마……! 그렇다면 사고가 난 그날, 마차에서 발견된 마법 흔적도 부인께서 직접 남기신 겁니까?”

“아마도.”

“세상에, 말도 안 됩니다. 제게는 그저 평범한 마력 보유자라면서요! 지금껏 왜 그리 부인께 집착하시나 했는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실을 제게 말씀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적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요! 지금이라도 두 분의 만남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막아야지, 최선을 다해. 하지만 곧 반역이 시작될지도 모르겠군. 안일한 두 사람 덕분에.”

콰과광! 내리치는 불꽃과 함께 여름비가 거세졌다. 일순 에드먼드의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 * *

그 시각, 1층 응접실.

“아하하, 네가 멜리사구나, 안녕?”

멜리사를 발견한 난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마치 처음 보는 사이라도 되는 듯, 거리를 두는 내 모습에 멜리사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시선을 맞췄다. 이내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이제 날 모르는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뭐야, 절친이라며. 반응이 왜 이래, 뭔데 이렇게 사나워?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까칠함이 기본 소양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나는 미간을 구부리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건 아니고 내 기억회로에 조금 문제가 있거든.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 몰라.”

“뭐?”

이 무슨 황당무계한 말이란 말인지, 멜리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난 네가 누군지 모른다니까?”

“날, 날 몰라? 클로엔 랜돌프가 멜리사 카타린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자그마치 20년을 알고 지냈는데? 클로엔,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

“몰라, 모른다고.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야. 됐고, 이 비를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이제부터 다시 알아가지 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멜리사와 달리 내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만개했다.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며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찬 디저트들을 보고 있자니, 척추를 타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듯했다.

‘세상에, 저 딸기 싱싱한 것 좀 봐. 빨간 게 아주 맛나겠다. 맛나겠어.’

잠시 생각한 난 앞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보며 군침을 다셨다. 호호, 뜨거운 찻물을 식혀 가며 한 모금 삼키려던 그때였다.

“왜 이렇게까지 연기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다 이유가 있겠지.”

멜리사가 한쪽 손을 테이블 위로 뻗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멜리사가 찻잔을 홀짝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쟤 지금 뭘 보는 거야?’

께름칙한 태도에 시선이 닿은 곳을 쫓았다.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종잇조각.

가녀린 손끝이 더듬거리며 테이블 위로 향했다.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던 기다란 손가락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뭔데?”

낯선 물건의 등장에 나는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일전에 부탁했던, 마법 서식.”

“마법…… 서식?”

얘 진짜 마법을 하는 거였어? 아니, 왜? 돈도 많고, 남편도 있고 얼굴도 예쁜 애가 왜 위험하게 마법을 써? 왜?

나는 떨떠름히 웃으며 뻗은 손끝을 망설였다. 이성으로는 ‘당장에 이 쓸모도 없는 종잇조각을 찢어발겨 버려라.’ 생각했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꼭 구해 달라고 했었잖아. 네가 나한테.”

쐐기를 박듯, 멜리사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 마법 서식을 펼치던 그때였다.

쾅!

닫힌 문이 열리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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