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그날 이후부터였다. 무언가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알 수 없는 시선이 며칠째 이어졌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찝찝한 기분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좋았던 입맛마저 뚝 떨어뜨렸다.
‘분명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오늘도 여전히 대상 모를 시선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나는 하던 식사를 그만두고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왜 그것밖에 먹지를 않지? 좋아하던 음식이잖아.”
에드먼드가 곁눈질로 살피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입맛이 없네요.”
“요즘 잠을 편히 못 잔다던데.”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각방을 쓰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여보랑 같이 자면 완전 꿀잠 잘 텐데. 매번 아쉽네요, 정말.”
나는 두 눈을 접어 가며 야살스럽게 말했다. 마치 너 때문이라는 듯한 그 말에 에드먼드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가끔 잠을 설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자연스러운 일이야.”
“나쁘지 않기는 개뿔, 어차피 부부 사인데 철벽은, 쯧!”
같지도 않은 변명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제쯤 합방을 할 수 있을지, 이제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오늘 기사단 훈련이 있던가요?”
불현듯 스친 생각에 재빨리 말을 얹었다. 말이 나온 김에 허락을 구할 셈이었다.
“기사단 훈련이야 매일 있지. 하루라도 게을리한다면 몸이 굳기 마련이니까.”
“마침 잘됐네요. 몸 상태도 나아졌겠다, 나도 오늘은 연무장에 다녀와야겠어요.”
“연무장에는 왜? 아직 완전히 나아졌다고 속단하긴 일러.”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요. 신경 쓰이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당신이 부쩍 내 생각 하는 거 모르는 줄 알아요?”
유독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노림수가 먹힌 건지 에드먼드의 두 뺨이 붉은 기색을 띠었다.
“흠흠, 단원들이 불편해할 거야.”
“모르는 모양인데, 단원들이 나 엄청나게 좋아해요. 일전에 가져다준 숯! 완전 인기라면서요? 레틴이 남아나는 게 없다고 무척 좋아하던데.”
내 말에 틀린 바가 없는지,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긁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뿐인가? 딱딱한 당신보다야 살갑고, 예쁘고, 귀엽고, 애교 많은 내가 훨씬 다가오기가 쉽죠. 불편한 걸 얘기하기도 편하고.”
말과 동시에 평온하던 그의 미간이 시시각각 구겨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 오름을 느꼈다. 에드먼드는 정체 모를 감정을 꾹꾹 누르며 평온히 말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단원들에게 애교를 부리겠다는 건가? 굳이 오겠다는 이유가 뭔지 들어나 보지.”
“힘을 키워야겠어요.”
“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요즘, 자꾸 누가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서점에서부터 느꼈는데, 근래 들어 가까워진 것 같달까…… 아무래도 찝찝해요. 전에도 무예를 배워 볼 겸 간 거였거든요.”
“불필요한 일이군. 당신의 훌륭한 시녀인 샤샤가 늘 곁에 있는데 뭐가 문제지? 경비병도 충분할 테고.”
“아니,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러네. 며칠 전에 후원에 다녀왔잖아요? 그날 이후로 좀 이상해요. 잠을 설치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요. 뭔가, 뭔가가 있어. 분명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잠에서 깰 때면, 커튼 뒤에 뭔가가 있어요. 살기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요. 그럴 때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 침소에 들일 수는 없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나를 뭐로 보고 정말! 샤샤랑 같이 몇 번이고 원인을 찾았는데, 이유가 없다니까요.”
“따로 짐작이 가는 건?”
에드먼드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없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무예를 배워야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크게 아픈 후로 예민해진 거야. 필요하다면 경비병을 더 붙여 두지. 당신이 힘을 키우는 것보단, 그편이 빠를 테니까.”
“또 내 말을 안 믿는 거죠? 봐봐, 지금 눈빛이 딱 그래! 내가 없는 걸 지어낸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랬다면 경비병을 붙이겠다는 말 따위도 하지 않았겠지.”
“근데 왜 막아. 내 몸 내가 지키겠다는데요.”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답지 않게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누굴 해칠까 봐 그래. 클로엔 랜돌프, 당신이란 여자는 지금,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거든.”
“여보……!”
터무니없는 이유에 나는 두 눈을 흘기며 언성을 높였다. 그사이 에드먼드는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졌다.
* * *
우르르, 쾅!
내리는 빗물 사이로 요란한 번개가 내리쳤다. 한동안 더위가 이어지나 싶더니, 얼마 가지 못하고 비를 뿌렸다.
덕분에 후원은커녕 대문 밖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태생이 연약한 몸뚱이가 자칫, 빗물이라도 맞아 감기에 들린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쌓여 가는 무료함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에드먼드 역시 최근 업무가 많아진 것인지, 정해진 시간 외에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라도 해야지, 이러다간 심심해서 죽겠어.”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던 샤샤가 제 주인을 힐끗거렸다. 그러곤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즐겨 보시던 서책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전에는 책 읽으시는 걸 무척 좋아하시더니 요즘에는 통 읽지를 않으시네요. 설마…… 글도 잊으신 건 아니시죠?”
“그, 글? 아하하. 그럴 리가. 당연히 읽을 줄 알지. 아마도 그럴걸?”
자신 없는 듯한 모습에 샤샤의 눈살이 가늘게 접혔다. 그러곤 결심한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한 번도 책을 보신 적이 없는 거죠? 이참에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아냐! 저번에 사 온 [식물대도감] 정말 재밌게 읽고 있어.”
“그런 분이 얼마 전에도 모리모리꽃이라며 엉뚱한 걸 가져오셨죠.”
“그건~ 흰부리꽃이랑 워낙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지.”
“전혀 아니었습니다만, 부인.”
“아무튼! 너도 있고 에드먼드도 있는데 내가 글 좀 모른다고 뭐 얼마나 큰 문제가 되겠어. 알아, 알아. 아니까 걱정하지 마, 샤샤.”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와 달리 샤샤의 얼굴에는 굳건한 의지가 돋보였다.
“사실…… 며칠 전까지도 몸이 안 좋으셔서 말씀을 못 드렸지만, 멜리사 영애께서 서신을 무척이나 많이 보냈거든요.”
‘멜리사? 그건 또 누구야.’
나는 굳은 표정을 지우며 대답을 아꼈다.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샤샤가 낮게 한숨 쉬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휴, 이번에도 당연히 기억을 못 하시겠죠? 멜리사 카타린. 카타린 백작님의 둘째 따님이시죠. 물론 부인의 오랜 친우이시기도 하고요. 마차 사고가 난 이후 보내온 서신이 자그마치 육십 통은 될 거예요.”
“육, 육십 통? 집착 광공이야 뭐야, 소름 돋아. 그래서 서신 내용은 뭔데?”
“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글을 아나요. 가져다드릴 테니 한번 봐보시겠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부인께서 글을 기억하고 계실지. 이참에 즐겨 읽으시던 책들도 몇 가지 가져다드릴게요! 매일 할 일 없이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보다야, 이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 말에 틀린 바가 없었다. 이대로 잉여 인간으로 사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낫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잠시만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말과 동시에 샤샤가 재빨리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서책 두어 개와 편지 더미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원이 있고, 그 안에 이게 뭐야? 별인 건가? 뭐야 이게 대체.’
그나마 해석할 수 있는 건, 책에 그려진 영문 모를 도형들과 에드먼드에게 배운 몇 가지 단어와 문장들이었다.
“뭐 좀…… 알아보시겠어요?”
샤샤가 조심스레 물었다. 책 속에는 마법진으로 추정되는 수백 개의 그림이 질서정연하게 그려져 있었다. 잠시 내용을 훑어보던 난 조용히 책을 덮었다.
‘모르겠어. 정말 놀랍게도 몇 가지 말고는 모르겠다고……!’
그러곤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마를 쾅쾅 받았다. 꽤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배움이 부족한 모양이다.
“괜찮아요, 부인. 글을 모른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지는 않잖아요. 저도 잘살고 있는걸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죠?”
샤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곧바로, 집사인 데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나한테 그런 게 있다고?’
잠시 생각한 난,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커다란 두 눈이 샤샤를 향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모종의 의미였다.
“손님이라뇨, 따로 약속된 분이 없으실 텐데요?”
샤샤가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레 찾아오셨거든요. 하지만, 부인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어서 준비하시죠,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순 샤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감돌았다. 필시 내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손님이라는 게 누군데요?”
나는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인 데릭이 서둘러 내 앞에 섰다. 이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부인의 오랜 친우이신 멜리사 영애이십니다!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억 소리가 나올 뻔했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멜리사? 내가 남의 친구를 만나서 무얼 하냐고!’
그렇다고 이대로 모르는 척 무시하자니 그것 나름대로 찜찜한 상황. 나는 다문 입술을 잘근대며 머리를 굴렸다.
“……전해 드릴 것도 있다고 하셨고요.”
고민하는 사이, 데릭이 소리를 낮춘 채 나지막이 말했다. 샤샤는 물론 나조차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전해 줄 게 있다고?’
잠시 침묵하던 난 결심을 내렸다. 긴장감에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이윽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