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며칠 전 소란 이후, 나는 어느 때보다 안락한 삶을 누렸다.
식사를 위해 매번 식당에 가는 일도, 지정된 시간을 외에 머리칼조차 보이지 않던 에드먼드를 찾아 헤매는 일도 더는 하지 않아도 됐다.
마치 지금처럼.
“골고루 좀 먹지. 그래서 그 연약한 몸이 무더위를 견디기나 하겠어?”
“알았어요, 알았어. 먹는다고요. 전에는 안 그러더니 유독 잔소리가 많아졌어요? 굳이 내 침소에까지 와서 말이죠.”
나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완벽한 바디와 잘생긴 얼굴을 이른 아침부터 영접한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지만, 잔소리 폭격기는 그 정도가 달랐다.
태생이 유약한 몸뚱이는 열사병을 얻은, 그날 저녁부터 진상의 절정을 찍고 말았다. 몸은 불덩이나 다름없었고 몇 날 며칠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지금처럼 온실 속 화초나 다름없는 상황들에 직면해야만 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에드먼드의 과보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당신이 고기만 골라 먹으니까 그렇지. 골고루 먹으면 잔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어. 그러기에 누가 픽픽 쓰러지래?”
에드먼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 알겠습니다. 다 내 죄입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살필 서류가 없나 봐요? 늘 얼굴만 비추고 가 버리더니.”
밤새 수척해진 에드먼드의 모습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어젯밤에 다 처리했어.”
“왜요? 내가 그렇게나 걱정됐어요? 아프다고 하니까 또 막 마음이 찌르르하고 그랬구나?”
“남편의 의무에는 아내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포함돼. 난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야. 요즘 편식을 한다던데? 기억을 잃더니, 아주 아이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가?”
‘샤샤, 이놈의 주둥이를 그냥!’
나는 입술을 씰룩이며 조용히 으르렁댔다. 이내 무언가 생각나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다 먹을 테니까,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당신 건강을 위해 먹는 건데, 왜 내가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해야 하지? 불합리하군. 들어줄 수 없어.”
“늘 사람이 그렇게 깐깐하고 계산적이에요? 정말, 감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그래서……!”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당신도 알죠? 당신 완벽한 거.”
나는 에드먼드의 말을 자르곤 재빨리 답했다.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태연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여보 어쩜 이리 귀여울까?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면 이건 반칙이지, 반칙!”
부러 두 눈을 깜박이며 샐쭉, 미소 지었다. 동시에 평온하던 그의 심장이 조금씩 쿵쿵거리기 시작한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소원? 말 한번 거창하군. 원하는 게 뭔데?”
늘 그렇듯, 에드먼드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껏 쏟아진 관심이 꺼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말을 얹었다.
“후원에 가서 산책하고 싶어요.”
“뭐라고?”
잘못 듣기라도 한 걸까, 평소와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발언에 당황한 쪽으로 되레 에드먼드 쪽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황당무계한 말들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지 긴장했거늘, 고작 산책이라니. 어쩐지 맥이 풀렸다.
‘대체 뭘 기대한 거지?’
머릿속을 스치는 작은 의문과 함께 에드먼드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샤샤가 그러던데요? 후원에 아주 커다란 나무가 있다고.”
말과 동시에 에드먼드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그러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독 아꼈지. 당신이 심어 둔 거니까.”
“아, 내가 또 그런 취미가 있었나 봐요? 특이하네, 나무를 다 심고. 원래도 꽃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일순 피부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 달리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나무 하나로 뭘 그리 무섭게 구는 것인지,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뭘요, 나무? 기억이 날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랑 있었던 일들도 모르는데. 뭐, 관심도 없고.”
“…….”
“그냥, 당신이랑 오순도순 걷고 싶어서 그래요. 계속 방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도 하고 상쾌한 공기도 마시고 싶고, 이참에 데이트도 하고 좋잖아요. 안 그래요?”
달라진 온도에 나는 두 눈을 접어가며 다정히 말했다. 하지만 도통, 에드먼드의 표정을 밝아지질 않았다.
* * *
마지못한 발걸음이 후원을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제안이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기대된다. 연무장 말고 다른 곳은 처음 가 봐요.”
나는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며 남편을 뒤따랐다. 발랄한 제 말과 달리 에드먼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넓은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갔다. 에드먼드는 말없이 식당 뒤 쪽문을 열었다.
“오? 여기 아는 길인데.”
말 그대로 익숙한 길이었다. 연무장에 가기 위해선 이곳을 꼭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 커다란 돔형 창고가 보였다. 사방이 유리로 된 그곳은 투명했지만,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야. 요정 나무가 있는 곳.”
에드먼드가 짧게 말하며 입구로 향했다. 중앙에 난 유리문을 열자 말로만 듣던 거목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와, 정말 크다. 이걸 진짜 내가 심었다고요?”
적어도 3m는 되는 듯한, 거대한 몸집에 입술이 떡하고 벌어졌다. 단단한 기둥과 달리 앙상하게 말라붙은 나뭇잎. 그리고 주변을 맴돌며 반짝이는 무언가.
‘뭐야, 여기 판타지 세계관도 섞여 있었어?’
한눈에 봐도 보통 나무는 아니었다. 소설 자체에서는 마법이나 마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알 수가 없는 설정 중 하나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동대륙에는 마법이 존재하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말이다.
‘근데,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더위 하나도 해결 못 해 주는데.’
잠시 생각하던 난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마법이고 나발이고 지금 나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일 중 하나였다.
꿈이 있다면, 남은 인생, 에드먼드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자식 농사나 짓고 사는 게 다였다.
굳이 복잡하고 해결해야 하고, 누군가 대적해야 하는 원작의 설정 따위 알고 싶지도, 따라가고 싶지도 관심이 가지도 않았다.
“어휴, 이거 다 시들었네. 조만간 잘라 버리자고요. 씨가 마르게.”
부러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순 에드먼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진심이야?”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미관상 좋지도 않고 너무 크기도 하고. 얘 혼자 후원을 다 차지하는구먼. 그냥 잘라 내고, 겨울에 땔감으로나 쓰자고요.”
그 순간, 바스락! 떨어진 나뭇잎 사이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들었죠?”
이어진 질문에 에드먼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바람이 분 모양이군. 이만 돌아가지. 볕이 뜨거워. 이러다 또 픽 하고 쓰러지면 곤란하다고.”
에드먼드가 한층 뜨거워진 태양을 가리키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호한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바스락!
“이, 이거 봐요! 뭐가 있다니까? 소리 계속 나는데.”
혹, 나무를 잘라 버린다는 말을 듣고 나무의 요정이라도 나타난 건 아닐까?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소리의 원인을 찾으려 나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쥐라도 있는 모양이지. 사람을 시켜 처리하면 되니까 어서 들어가자고.”
설교에 못 이겨 후원을 벗어나려던 그 순간, 말라붙은 잎사귀 사이로 뾰족뾰족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나뭇가지?
낙엽 더미를 걷어 내자, 얇은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뾰족하고 길쭉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는데…….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묘한 기시감에 인상을 구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내 두리번거리며 밑을 더 꼼꼼히 살폈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은 마른 잎과 잘린 가지들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확인 다 했으면 어서 들어가지.”
에드먼드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분명 뭔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찝찝하다고요. 좀 더 살펴봐야겠어요.”
“저 작은 나뭇가지가 당신에게 해를 가하는 일 따위는 없을 텐데, 뭐가 찝찝하다는 거지?”
“아니에요. 분명 뭔가 있는 걸 봤다고요! 나뭇가지 따위가 아니었다니까? 아무래도 이상해요!”
클로엔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었다. 결의에 찬 채로 이글거리는 클로엔의 모습. 저 핵폭탄 같은 여자가 또 무슨 짓을 벌일는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랜돌프 공작 가문의 경계가 그리 허술하지 않다는 사실이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뭐 그런 거 몰라요?”
“대체 꺼진 불을 왜 다시 보지?”
어이가 없다는 듯, 에드먼드가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휴, 옛날 사람들이란……. 세대 차이 나서 뭔 말을 못 해. 그냥 말이 그렇다는 뜻이죠. 아무튼 이 나무 찜찜해. 당장 잘라 버리자고요. 흥!”
말과 동시에 클로엔의 몸이 휙! 돌아섰다. 이내 빠른 움직임으로 후원을 나섰다. 자그마한 인영이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가 싶더니 얼마 뒤 온전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에드먼드의 시선이 천천히 위쪽을 향했다. 시든 이파리를 한참 응시하던 그가 소리 없이 클로엔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