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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27)화 (27/107)

제27화

그녀의 가느다란 쇄골이 눈에 들어온 순간, 고요하던 머릿속이 평정심을 잃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에드먼드가 빠르게 도리질하며 검은 마음을 눌렀다. 커다란 손이 옆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물기를 짜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시원한 감각이 둥근 이마 위로 닿았다. 클로엔의 미간이 작게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함을 되찾았다.

“미련하기는.”

에드먼드가 흘러내린 땀방울을 느릿하게 닦아 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한 모진 말들이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 같아 일말의 책임 의식을 느꼈다.

얼굴에 있던 식은땀을 모조리 닦아 내자, 체온이 조금은 내려간 모양이다. 거칠었던 클로엔의 숨결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후, 낮게 신음하던 그가 무의식중에 팔을 뻗었다. 땀으로 들러붙은 백금색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하던 그때였다.

유약한 손끝이 덥석! 에드먼드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놀란 그가 손을 빼려 몸을 바르작댔으나, 이어진 말에 하던 행동을 멈췄다.

“손이 차가워서 좋아요.”

몽롱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를 따라갔다. 반쯤 풀린 클로엔의 눈동자가 온전히 그를 담았다.

그러곤 천천히 잡은 손을 볼 위로 가져다 댔다. 커다란 손바닥 위로 화끈거리는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원하다.”

작은 탄성과 함께 표정이 풀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대는 아내를 보며 에드먼드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직도 많이 덥나?”

“음, 조금요. 그보단 찝찝한 게 커요. 일단 이 축축한 옷부터 벗어 버리고 싶어요.”

나직한 물음에 부러 툴툴대며 말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말하는 걸 보니, 이제 멀쩡한 모양이군?”

“아뇨. 아직도 머리가 윙윙거린다고요. 다 벗고 차가운 얼음물에 담그고 있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데 나 옷 벗는 것 좀 도와줄래요?”

“옷을 벗기는 일이라면 샤샤에게 부탁하도록 해. 곧 올 거니까.”

에드먼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닿은 손길을 거두려던 그때였다. 몽롱했던 동공이 또렷하게 떠졌다.

“어디 가려고요. 나 아직 많이 아픈데.”

괜히 코를 훌쩍이며 울상을 지었다. 꾀가 먹혔는지, 에드먼드가 잠시 고민했다.

“말했잖아, 이만 가 봐야 한다고. 당신이 쓰러진 덕분에 오늘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어.”

“어머, 그렇게나 내가 걱정됐어요? 하여간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나 엄청, 좋아한다니까.”

“또 쓸모없는 소리.”

“모르는 모양인데, 당신 나한테 이미 감겼어요. 부쩍 나한테 잘해 주는 거 당신만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마 여기 사람들 다 알 텐데.”

“뭐? 감겨?”

“나한테 스며들고 있다는 말이죠. 가랑비에 옷 젖듯 스리슬쩍. 그게 원래 제일 무서운 거예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내 말이 틀렸음을 상기하듯 에드먼드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만하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이야. 다른 의도는 없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주저 없는 발걸음이 문밖을 향하던 그때.

“아야…… 머리가 너무 아프네. 열도 아직 많이 나는 것 같고, 몸도 으슬으슬 추운 것 같고.”

커다란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 에드먼드를 힐끗거렸다. 보나 마나 꾀병일 게 분명했음에도, 신경이 쓰였다.

“휴, 몸에 힘이 하나도 없네…….”

쐐기를 박듯, 클로엔이 훌쩍이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 낮게 신음하던 그가 미간을 구긴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열이 내리는 중이라 그럴 거야. 푹 쉬면 괜찮아질 테니, 조금 더 자.”

“아니, 나는 당신 손길이 필요하다고요. 여보가 쓰담쓰담해 주면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은데.”

나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일순,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굴곡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런 건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아. 허튼소리 그만하고 쉬도록 해. 사람이 어떻게 중간이 없지?”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그가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눈을 감았다.

“덕에 당신한테 보살핌도 받고 좋은데요, 뭘. 아니, 거기 말구, 여기! 당신 손이 차가워서 너무 좋네요.”

기분 좋은 감각에 늘어진 머리칼을 깊숙이 디밀었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말이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에드먼드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유지한 채, 백금색 머리칼을 비비적거리던 그때였다. 흠흠, 멋쩍은 기침 소리와 함께 시녀인 샤샤가 어기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두, 두 분 오붓한 시간 중에 죄송합니다만 부인의 몸을 닦아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지금 급히 하셔야 할 일이 있다면, 제가 다음에 찾아오겠습니다. 하하하.”

샤샤가 유독 크게 웃으며 인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한 시선이 ‘나 많이 불편하다.’ 온몸으로 시사했다.

“역시, 우리 샤샤. 눈치가 빨라. 이참에 뭐, 부부끼리 좋은 시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안 그래요, 여보?”

나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보이며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일종의 신호였으나, 에드먼드의 낯빛은 파리하게 질렸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려던 일을 온전히 하는 게 좋겠군, 샤샤.”

행여 불똥이라 튈까, 에드먼드는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포기할 내가 아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공작님, 죄송하지만 잠깐 나가주시겠어요? 부인께서 찝찝하실 것 같아, 몸을 닦아드리는 참인데.”

이어진 대답에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길쭉한 두 다리가 문 쪽을 향하던 그때였다.

“귀찮게 뭘 닦고 그래. 그냥 시원하게 목욕 한번 하면 되지. 그게 더 개운하겠다. 안 그래, 샤샤?”

나는 찌뿌드드한 몸을 기지개를 켜며 심드렁히 말했다.

“네? 물론 그렇긴 하죠…….”

되묻는 목소리에 샤샤가 힐끔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예측 불허인 내가 또 무슨 사고를 치진 않을까, 걱정인 모양이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보도 목욕하는 게 낫지 않아요? 나 들고 엎느라 당신 땀 많~이 흘렸을 거 아니에요.”

부러 코끝을 찡긋거리며 에드먼드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허어억……!” 샤샤의 잇새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민망할 법도 했으나, 이런 반응에 익숙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길길이 날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에드먼드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흠, 글쎄.”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짧게 조소했다. 부러 거리를 좁히며 제 앞에 서는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무슨 꿍꿍이지?

“나는 괜찮은데 당신이 걱정이군.”

물음에 답하듯 에드먼드가 짧게 답하며 젖은 수건을 들었다.

“잠, 잠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놀란 나와 달리 에드먼드는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느새 느려진 에드먼드의 손길에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 쐐기를 박듯, 흩어진 머리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아니,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미친 거야?’

에드먼드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사스러운 듯, 갈 곳 잃은 샤샤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에드먼드……!”

놀란 내가 남편의 이름을 곱씹던 그때였다.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좁힌 그가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멀리서 느껴지던 체취가 코끝에 훅 끼쳤다.

그와 동시에 화르르! 가뜩이나 뜨거운 양 볼이 터질 듯, 불타올랐다. 두 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틈을 남겼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뭐, 뭐가요?”

되묻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긴장을 감추려 깨문 입술에 더욱 힘을 줬다.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면 지는 거야.’

늘 유혹하는 쪽이었지, 유혹당하는 쪽은 처음이었다. 막상 겪고 나니 이게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지 새삼 알게 됐다.

“난 여전히 할 일이 많고, 무엇보다 이런 식의 유혹은 아직 섣부른 것 같거든.”

에드먼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훑었다. 나직한 울림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니 나중을 기약하자고.”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어쩐지 감긴 건 내 쪽인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괜찮았다.

어느새 멀어진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느릿한 움직임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지금 나 홀린 거야?”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공작님, 정말 의외네요. 저런 모습이 있으실 줄이야.”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평정을 되찾았다. 마치 천년 묵은 구미호가 홀랑 간을 빼먹어간 기분이었다. 에드먼드의 한 방은 짧지만 강력했고 가벼웠으나 묵직했다.

예상했듯, 만만찮은 적수를 만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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