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연무장에서의 소란 이후, 필시 사고를 치리라 생각했던 공작 부인께선 별다른 굴곡 없이 일과를 보냈다.
이따금 이어진 공작님과의 만남에서도 부인은 간간이 툴툴거릴 뿐, 선을 넘지 않았다. 괜한 기우였다고 생각하며 샤샤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부인,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도착한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밀려온 불안감에 샤샤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내부를 살폈다.
“부인? 안 계세요?”
“응, 있어.”
들려온 목소리에 샤샤는 안도하며 숨을 뱉었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천천히 문 쪽을 향했다. 작은 인영이 다가옴에 따라 샤샤의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날씨가 너무 덥길래.”
이어진 시선에 변명하듯, 클로엔은 서둘러 말을 더했다. 얇은 끈 하나에 의지한 볼륨 드레스는 부인의 흰 피부를 훤히 드러냈다.
이게 란제리인지 생활복인지 분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부인…….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이렇게 훤히 속살을 드러내시면, 사용인들은 눈 둘 곳이 없어요!”
현실을 부정하듯 샤샤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래야 랜돌프 부인다웠다. 언제부턴가 부인의 행보에는 중간이 없었고, 늘 모 아니면 도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푹푹 찌는 삼복더위임은 인정했으나, 그래도 이럴 수는 없다. 그런 제 의중을 읽은 듯 요주의 인물께선 덤덤히 말했다.
“그렇다고 더워 죽겠는데 저 푹푹 찌는 겨울옷을 입으라고? 집에서라도 편히 있자, 좀. 내가 누구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봐야 밥 먹으러 가는 거잖아.”
이어진 말소리에 샤샤가 새된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고민하던 샤샤가 결심한 듯, 옷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이거라도 걸치고 가세요. 제발, 저를 봐서라도요”
겉옷을 집어 온 샤샤는 당장에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제발요. 제발.”
샤샤는 연신 중얼거리며 얇은 카디건 하나를 내 어깨에 걸쳤다.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야무진 시녀의 손이 단추 하나도 빠짐없이 꼭꼭 여몄다.
“진짜 더운데…….”
이어진 강행군에 고왔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 * *
넓은 식탁에는 제 몫의 식기만이 전부였다. 최근 바빠진 일정 탓에 식사는커녕,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운 에드먼드였다.
“혼자 무슨 맛으로 먹냐. 기다리는 임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애꿎은 샐러드 접시를 쿡쿡 찔렀다. 더워진 날씨 때문인지 통 입맛이 없었다.
그사이 곁으로 온 주방장 레틴이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요즘 통 드시지를 못해 걱정입니다.”
“날씨가 좀 더워서 그러는가 봐요. 혼자 먹으려니 기분도 안 나고. 공작께서는 오늘도 바쁜 모양이네요?”
나는 부러 거리를 두며 말했다. 에디, 에드먼드, 그이라는 호칭을 두고 굳이 공작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에드먼드, 네가 날 홀대한단 말이지? 그럼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는 말이야. 흥.’
달라진 분위기에 레틴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망설였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가셨나…… 얼굴을 봐야 뭘 하든지 하는데.’
침묵이 길었다. 촉촉이 젖은 레틴의 시선에 무언가 보답을 해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충분한 답이 되었어요.”
나는 소박맞은 아낙네라도 된 양, 쓰게 웃으며 샐러드용 포크를 집었다. 괜한 패배감에 파릇한 풀떼기를 욱여넣고 한참을 우적거리던 그때였다.
“다들 나가 봐.”
귓가를 울리는 나지막한 저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 53시간. 이틀하고도 다섯 시간 만에 마주한 남편의 얼굴이었다.
‘젠장, 오늘도 잘생겼어.’
마음 같아서야 대체 지금껏 무얼 하다 온 거냐며, 토끼 같은 부인을 두고 어떻게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느냐 따져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오셨어요?”
“그래.”
달라진 온도 차에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커다란 거구가 맞은편에 앉자, 나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흠흠.” 이어지는 정적에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긁으며 기척을 냈다.
“살이 다 비추는군.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좀 더 신경 쓸게요.”
달라진 반응에 에드먼드는 가슴 한편이 갑갑했다. 분명 원하는 답을 들었으나, 짜증스러웠다.
‘단순히 날이 더워서 그런 거야.’
짧게 생각한 그가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훌륭한 식사였으나, 입에 든 고깃덩어리가 질긴 고무처럼 느껴졌다.
달갑지 않은 기분을 이어 가며 그가 마주한 작은 인영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평소라면 왜 이리 소원했냐며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했을 여자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하루 한 시간씩, 이야기하자던 조건마저 지키지 않았거늘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야.’
잔잔하던 붉은 동공이 낮게 이글댔다. 그러곤 천천히 클로엔의 움직임을 따랐다.
식기를 잡은 손이 유독 작았다. 여전히 서툴렀으나 예절에 벗어나진 않았다. 음식에 알맞은 식기를 다뤘고, 때때로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아 내기도 했다.
정말이지……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에드먼드가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어지는 정적이 퍽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늘 차림을 단정히 하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커다란 손이 타이를 느슨히 풀며 시선을 돌렸다.
먼저 말을 걸어 볼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앙다문 작은 입술이 조금씩 틈을 벌렸다.
“요즘 많이 바쁜 모양이에요?”
“어. 조금.”
모처럼 시작된 대화에 습관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바보 같은 제 행동에 에드먼드가 눈살을 구기며 말을 더했다.
“왜? 신경 쓰였나? 앞으로는 되도록 함께 식……!”
“그럼 일전에 말했던 가정 교사는 내가 따로 구해야겠네요.”
되도록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은 듣지도 않은 채, 클로엔은 덤덤히 말했다. 괜스레 기분이 상했다. 마치 사고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 같아 더 그랬다.
“그게 무슨 소리지? 글이라면 내가 가르쳐 주기로 했을 텐데.”
에드먼드가 상한 기분을 감추며 떨떠름히 말했다.
“바빠 보여서요. 당신한테 더는 폐 끼치기도 싫고…… 글을 잘 모르니 생활이 불편해요. 마땅한 사람으로 구해 볼게요. 열심히 배울 테니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지 말아요.”
이어진 말소리에 에드먼드는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런 제게 쐐기를 박듯, 클로엔이 몸을 옹송그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대답을 고르는 사이, 기운 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전을 때렸다. 에드먼드의 붉은 동공이 말없이 소리를 따랐다.
“그…… 애들 배우는 글자 책 있잖아요. 자음, 모음 따라 쓰고 알맞은 것 찾고, 뭐 그러는 거.”
깊은 한숨과 함께 클로엔은 뒷말을 망설였다. 작아진 목소리에 에드먼드는 몸을 당겨 소리에 집중했다.
“그거 하나만 사다 주세요. 사용인들 몰래 사다 주면, 당신 귀찮게 안 하고 열심히 공부해 볼게요. 그간 나 때문에 곤란했던 거 잘 알아요. 더는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이제부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해 볼 테니까.”
“……그래. 그러도록 하지.”
샐쭉 미소 짓는 클로엔을 보며 에드먼드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나도 스스로 자립하는 법을 키워야죠.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과 동시에 왈칵, 에드먼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옆에 놓인 겉옷을 집어 들었다.
‘뭐야? 이렇게 간다고?’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에, 에드먼드……?”
나는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멀어진 뒷모습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일어나.”
“네? 아직 식사 중인데…….”
괜한 긴장감에 뒷말을 흐렸다. 슬쩍 살핀 에드먼드의 등 뒤로 검은 오러가 이글거렸다. 그리고 꽉 쥔 두 주먹도.
‘저걸로 맞으면 기절하겠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으나, 순간 저 산만 한 사내가 나를 해치려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갈 곳이 있어.”
커다란 손아귀가 얇은 손목을 잡아챘다. 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속절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딜요! 말로 해요!”
되묻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원작 속 에드먼드를 알고 있는 나로선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서점.”
넋이 나간 나와 달리 에드먼드가 한음 한음 힘주어 말했다.
“책 필요하다며. 그거 사러 가자고.”
“갑자기? 아니 그냥 몰래 사다 달라니까요. 뭘 굳이 같이 가재요.”
“말 나온 김에 해치워야지.”
손사래 치는 나와 달리 에드먼드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사이 사용인들의 발걸음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서로 다른 시선들이 쏟아졌다.
“멜빈, 마차 대기 시켜.”
“오늘 일정은 모두 끝나셨습니다. 필요한 서류들은 챙겨 왔으니 굳이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느새 곁으로 온 멜빈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의식적으로 웃었다. 물론 이어진 공작의 말에 딱딱히 굳어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