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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19)화 (19/107)

제19화

맑게 갠 하늘은 청명했으며, 내리쬐는 여름 해는 화사했다. 살랑살랑 시원한 들 바람까지 불어오니, 가히 놀고먹기 좋은 날이었다.

“샤샤! 여기야, 여기!”

나는 양손을 휘적거리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낮게 한숨 쉬던 샤샤가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부인,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슬슬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사님들도 불편해하시는 눈치이고 또…….”

“우리 기사님들, 혹시 제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나요?”

툴툴대는 샤샤의 말을 가로채고는 기사단 단원들에게 물었다. 무리가 술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안정을 찾았다.

“부인께서 저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시니, 되레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편히 계십시오.”

단원 중 가장 연장자인 피터가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절대적 갑에게 불만을 토로할 만한 용자도 아니었을뿐더러, 줄곧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안주인을 내쫓을 연유 또한 없었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전에 없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달콤한 음료를 즐기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불편한 점은 없어요? 생활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라든지, 개선 사항이라든지. 이참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봐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공작 부인이 아니라고요.”

이어진 말소리에 단원 중 하나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숙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것도 어려움에 해당합니까?”

자신을 ‘유델리’라고 소개한 단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고된 훈련 때문인지 단원 대부분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유델리는 아니었다.

‘행색이 멀끔한 걸 보아 적잖이 깔끔을 부리는 모양인데.’

냄새라……. 잠시 생각하던 난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예를 들면, 어떤?”

“쿰쿰한 냄새가 납니다. 건물이 오래되어서인지 잘 빠지지도 않고요.”

알 것 같다. 여름이면 풍겨 오던 짙은 2호선의 냄새.

단원들이 우글대는 만큼 강력한 호르몬 향이 그득한 그곳을, 굳이 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런, 그럴 때면 코가 없었으면 좋겠죠. 그 마음 잘 알아요.”

나는 은은히 미소 지으며 유델리를 다독였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림을 정돈했다.

당장 건물을 때려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름의 대책을 내놓을 심산이었다.

“이제 가시려고요?”

샤샤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주방에 다녀오려고.”

“주방은 갑자기 또 왜요? 이제 돌아가셔야죠. 저도 할 일이 많다고요. 기사님들 빨래도 정돈해야 하고, 두 분께서 드실 저녁 준비도 도와야 하는데…….”

샤샤가 툴툴대며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그때였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열린 시야 너머로 티베로가 쭈뼛대며 서 있었다.

‘여기나 저기나, 돈이 최고구나.’

샐쭉 미소 짓자, 검게 탄 티베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 *

안내를 따라 무사히 주방에 입성했다. 저문 노을을 따라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니, 공작 부인께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티베로 님도 함께 오셨군요. 가져가신 것들이 부족하십니까? 먹을 걸 더 내올까요?”

들려온 인기척에 주방장 레틴이 허둥거리며 문턱을 넘었다.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으며 본론을 말했다.

“아뇨. 음식은 됐고, 화덕을 좀 보고 싶은데 실례일까요?”

“아휴, 그럴 리가요. 물론입니다! 몇 번이고 보셔도 되죠.”

혹, 갑자기 들이닥친 위생 시험인 걸까. 레틴이 자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시선을 유지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레틴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화덕 아래, 검은 숯들이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아…… 조금 지저분하죠. 바로바로 치운다는 게…… 곧장 정리하겠습니다.”

레틴의 말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덕으로 향했다.

‘이 정도라면, 쿰쿰한 2호선 냄새를 없애기에 충분하겠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숯의 상태를 보아 최상급 중의 최상급이었다. 한국이면 모를까, 이곳에 탈취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천연 탈취제인 숯을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근본을 제거하진 못해도 당장에 불편을 줄일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시나몬이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꿩 대신 닭이지 뭐.’

나는 밝게 웃으며 숯 더미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부인!!”

찌를 듯한 샤샤의 비명이 내부를 울렸다. 옆에 있던 레틴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탄식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레틴이 짧게 말하며 고개를 처박았다. 숯 치우기는 사용인들도 싫어하는 허드렛일 중 하나였다. 부인께서 친히 솔선수범하신 데에는 본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으른 저희를 나무라는 대신, 부인께서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게 분명했다. 부인의 공명정대함에 레틴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응? 얘들 왜 이래? 왜 죄다 무릎을 꿇고 있어?’

달라진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힐끔, 눈치를 살피며 숯 하나를 추가로 집자 샤샤는 시력을 포기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다 제 불찰입니다. 부인께서 직접 나서지 않게 제가 잘 살폈어야 했는데…….”

레틴이 입술을 바르르 떨며 울먹였다. 영문 모를 상황에 커다란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그냥…… 이게 조금 필요했을 뿐인데. 혹, 내가 숯을 가져가는 게 큰 문제가 되나요?”

“그걸 가져가신다고요? 타다 만 나무 찌꺼기를, 부인께서요?”

그사이 눈물을 짜기라도 한 건지, 레틴이 발간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단원들이 쓰는 숙소에서 냄새가 조금 난다길래……. 이걸 가져다 두면 한결 낫거든요.”

분명 잘못한 게 없지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아! 그런 이유 때문이셨군요. 그런 거라면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서 그 지저분한 것 내려놓으세요.”

“아뇨, 이 정도는 제가 할 수 있는……!”

“그럴 수는 없죠. 거뭇한 숯은 아름다운 부인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을 생각하는 부인의 따뜻함에 주방장 레틴, 오늘도 감격했습니다.”

레틴이 눈물을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곤 커다란 수레를 가져와 모아 둔 숯을 차곡히 담았다.

“이건 내가 가져갈 거에요.”

행여 품에 있는 것마저 빼앗길까 부러 선수 쳤다. 그사이 득달같이 곁으로 온 샤샤가 옷에 묻은 잿더미를 빠르게 털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샤샤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사단 단원들한테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대로 빼앗길 순 없다.

애초에 숯을 생각한 것도, 여기까지 찾은 것도 다 나의 공이다.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고!

“아니. 내가 들고 가. 절대. 절대 안 줘.”

나는 신줏단지라도 되듯, 품에 든 숯을 소중히 감쌌다. 그에 따라 옷감은 엉망으로 변했다. 시시각각 굳어 가는 샤샤의 표정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며 앞장섰다.

“부인!!”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샤샤가 원성을 높였다.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샤샤는 짧은 다리를 가열히 움직였다.

“만년설 같은 분이라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네.”

퍽 흥미로운 상황에, 한걸음 뒤에 있던 티베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따랐다.

* * *

“이게 무슨…….”

나를 본 단원들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고고하다 못해, 고결하디 고결한 공작 부인께서 숯 검댕을 뒤집어쓰고 친히 옷을 더럽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별일 아니라는 듯, 선선히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말간 눈동자에 유델리의 모습이 서렸다.

“유델리라고 했죠? 숙소에 이걸 가져다 놓으면 훨씬 나아질 거예요. 당장 공사를 하기는 어려우니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공작께는 내가 잘 말해 볼게요.”

곧장 가져온 숯을 건네며 다정히 말했다. 공작 부인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다음 대안을 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저희를 위해 부인께서 직접 가져오신 겁니까?”

감동이라도 한 듯, 나를 보는 단원들의 시선이 유순하게 변했다. 하지만 달라진 분위기가 무색하게 일각에선 유델리를 나무라기도 했다.

“괜한 말을 해서 부인께 짐을 드리고 있어! 기사단 일은 우리끼리 해결해야지.”

“이래서 젊은 놈들이란. 나 때는 말이야! 땀에 전 무복을 몇 날 며칠이고 입었어! 그깟 냄새 좀 난다고 유난은, 쯧.”

‘라떼’ 이야기는 여기도 빠지지 않는구나. 거품 왕창 때려 넣은 카페라떼 먹고 싶다…….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다잡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이 다 있어요. 그이와 오래도록 함께한 분들인데. 단원 여러분을 챙기는 것도, 다 제 몫이랍니다. 그간 제가 너무 무정했습니다.”

사람 좋은 목소리에 경계하던 몇몇 단원들도 차츰 누그러졌다.

“거기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죠. 아직 먹을 게 많이 남았습니다.”

피터의 말에 나는 샐쭉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 옆으로 줄곧 동행하던 티베로가 앉았다.

“아 참! 준다고 해 놓고 안 줬네. 원래 말로만 준다고 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어디 보자…… 금화 다섯 개면?”

나는 곧장 차고 있던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소리 소문 없이 내쫓길 걸 대비해 항상 몸에 차고 다니던 금붙이들이 이렇게 제 몫을 할 줄이야.

“지금은 가진 게 이것뿐이니 부족한 것들은, 내일 샤샤를 통해 전해 줄게요.”

두툼한 금반지를 두어 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래에 있던 티베로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이내, 굳게 닫혀 있던 사내의 입술이 천천히 틈을 벌렸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면 그냥 받으면 되는데?”

이건 또 무슨 똥고집인지, 새된 신음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얘가, 뭐가 많아요. 이런 거 한두 개 준다고 티도 안 나. 그러니까 넣어 둬요.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거든.”

“제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거참, 보기 드물게 소신 확고한 젊은이네. 듣자 하니, 단원 월급으로는 구하기도 힘든 액수라던데?”

“…….”

“까놓고 말해서 기사단을 가지고 각 단원들끼리 시비가 붙었다면서요. 우리 기사단을 모욕했으면, 응당 코 정도는 부러뜨려 줘야죠. 물론 그에 따른 대가도 주인이 지급하는 게 맞고. 안 그래요?”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티베로가 마지못해 금붙이를 주워 담았다. 그러곤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아 참! 우리 그이한테는 꼭 비밀로 하고요. 알았죠?”

아니, 꼭 티를 내줬으면 좋겠어. 시커먼 속내와 달리 나는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삽시간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묘하게 달라진 기류가 달라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익숙하지만 싸늘한 공기.

“누구한테 비밀을 하라는 거지?”

할렐루야……!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나는 소리 없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선한 자에게 복이 온다는 옛말은 역시나,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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