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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18)화 (18/107)

제18화

“뭐 해, 앞장서지 않고?”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샤샤를 재촉했다. 별다르게 할 일도 없을뿐더러, 차려 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시간이나 때우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고로 연무장을 찾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아니, 부인. 제안을 한 거지 당장 가시라는 말씀은 아녔다고요.”

“원래 뭐든 말 나온 김에 하는 거야. 다음에 하자는 그냥 안 하겠다는 말이라고.”

“그래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가는 건 조금……!”

“어허, 차일피일 미루면 답이 없다니까 그러네? 어서 앞장서거라.”

부러 근엄한 척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끙 소리와 함께 마지 못한 샤샤의 발걸음이 방문을 넘었다.

“흐음~ 벌써 느껴지는 이 자유의 스멜. 너무 좋다.”

나는 부러 숨을 크게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샤샤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하, 네. 그렇네요. 하늘도 맑고…… 볕도 좋고.”

이곳에 온 지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는 곳이 없었다. 가본 곳이라곤 식당과 에드먼드의 침소가 전부였다.

외향적인 내게는 정말이지 고역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그러게, 여러모로 낚시하기 참 좋은 날이야.”

예컨대, 남편의 마음이라든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래된 원목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들뜬 감정을 잠재우기에는 무리였다.

‘연무장에 가면 몸 좋은 기사님들이 한 트럭 있겠지?’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닭장을 나온 암탉이라도 된 듯, 가슴은 쿵쾅댔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에드먼드와 그 기사단으로 말하자면, 오랜 시간 모진 원정을 이겨낸 남자 중의 남자들이었다.

그런 짐승남들을 실물로 영접하다니, 이런 영광이.

“하…… 웹툰이 19세였어야 했는데. 아쉽다, 아쉬워.”

저도 모르게 안에 있던 속마음이 고스란히 나왔다. 그런 제 모습을 힐끔대며 샤샤는 익숙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아직 멀었니, 샤샤.”

“아뇨!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라는 걸 잊지 마, 샤샤.”

축축 처지는 몸을 끌어당기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성벽이 웅장한 만큼 연무장과의 거리가 상당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쏟은 땀방울이 얼마인지 슬슬 오기가 생겼다.

“이제 정말 다 왔어요, 부인!”

그렇게 한참을 더 걸은 뒤에야, 연무장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포착되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드넓은 평지 위로 열댓 명 정도의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여쁜 레이디가 갑자기 나타나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말없이 눈짓하자, 멀뚱히 서 있던 샤샤도 옆에 와 몸을 숨겼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물론이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인데. 우선 상대를 잘 살피는 게 싸움의 기본이야.”

“지, 지피지기? 그건 또 뭐예요? 요즘 부쩍 이상한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툴툴거리는 샤샤를 가뿐히 무시하며 꼼꼼히 무리를 살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연무장에 있다던 에드먼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 훈련하면서 펌핑된 근육을 봐야 하는데. 어딜 간 거야.’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훈련 중이던 단원들의 몸 또한 훌륭했지만, 이미 에드먼드에게 익숙해진 눈은 만족할 줄을 몰랐다.

“글렀네, 글렀어…….”

나는 짧게 조소하며 힘없이 말했다. 눈치 빠른 샤샤가 재빨리 말을 얹었다.

“하하하, 다음에는 공작께서 언제 계시는지 꼭 알아 올게요.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그래, 가자……. 옷도 다 젖어 가면서 왔는데. 없네, 없어.”

닭 쫓던 개 신세에 터덜터덜 연무장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단원 중 하나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배상금으로 얼마를 불렀다고!?”

“금화 다섯 개.”

“게리타 그놈이 미친 게 분명하군! 그 많은 돈을 일주일 만에 내놓으라는 게 말이 돼? 헤슈턴 기사단 놈들은 역시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코가 아니라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지 그랬어, 티베로.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모르겠어, 당장 배상금을 내놓으라며 길길이 날뛰는데 내가 그 많은 돈이 어디에 있겠어.”

“그 자식은 예전부터 그랬어. 보나 마나 뻔하지 뭐. 이번에도 우리 기사단보다 헤슈턴 후작 가문의 기사단이 더 우월하다면서 널 자극한 거겠지. 쯧, 비열한 새끼.”

단원들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말아 쥔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위기를 감지한 샤샤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으나 한발 늦었다.

“아, 그거 안될 놈이네! 치사하게 집안 욕을 하냐.”

기둥 뒤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앞에 있던 단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이시여…….”

옆에선 샤샤의 낮은 읊조림이 귓가를 울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 귀부인으로서 상상조차 못 할 언어 구사 능력에 주변은 싸늘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랜돌프 부인 아니십니까? 부인께서 여기에는 어떻게……?”

조금 전 분통을 터뜨리던 단원 중 하나가 나를 향해 물었다.

“아…… 산책도 할 겸, 공작님을 뵈러 왔어요. 홍홍홍. 그이는 없나 봐요?”

나는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상냥히 물었다. 말아쥔 두 주먹에 힘을 푸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네. 공작께서는 잠시 집무실에 가셨습니다.”

말을 끝으로 또다시 대화는 단절되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쏟아졌다. 찰나였지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이가 없어? 오히려 좋아.’

기사 출신이었던, 에드먼드는 기사단에 상상 이상의 애착을 두고 있다. 더군다나 수많은 전장을 함께한 단원들은 가족 이상의 끈끈한 전우애를 나눈 사이였다.

‘좋아, 이번에는 기사단 단원들 공략이다!’

이 좋은 상황을 그냥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듣자 하니…… 깽값을 물어야 하는 것 같던데?”

“예?!”

일순간, 단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에 나는 빠르게 손짓하며 정정했다.

“배, 배상금! 듣자 하니 배상금을 물어 줘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부인. 간밤에 작은 소동이 있는 바람에…….”

당사자인 티베로가 뒷말을 흐리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주죠. 그 배상금.”

말과 동시에 주변은 다시 한번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그 시각, 에드먼드의 집무실.

서류를 살피는 공작과 달리 멜빈의 얼굴엔 먹구름이 그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과 몇 시간 전 보았던 공작 부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디 계속 그렇게 철벽 칠 수 있나 봅시다. 나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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