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미안해요, 여보. 내가 조금 늦었죠?”
동시에 하…….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마른 숨이 흘러나왔다. 가늘게 접힌 적색 눈동자가 마주한 인영을 느릿하게 훑었다.
평소 입지 않던 검은 드레스는 양어깨가 뚫려 희고 여린 살결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높게 올린 백금색 머리칼 아래로 가느다란 목덜미가 처연하게 자리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분명한 의상.
필시 어젯밤에 대한 항의이자 대항인 게 분명했다. 노골적인 메시지에 에드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 거적때기는 뭐지?”
“나름 첫 수업이니까 갖춰 입어 봤어요. 예쁘지 않아요?”
클로엔이 애교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립스틱은 왜 치덕치덕 바른 것인지, 에드먼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 시녀에게 물어봐. 지금 모습이 어떤지.”
말과 동시에 클로엔의 두 눈이 번쩍이며 샤샤를 향했다. 시선을 느낀 샤샤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아꼈다.
“그래, 역시 내 편은 없지. 물어서 뭘 하겠어.”
못마땅한 듯, 툭 튀어나온 입술이 연신 툴툴거렸다.
동시에 풉,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자그마한 입술을 씰룩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잠깐,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방심하지 마.’
그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밀어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장 가서 갈아입고 와.”
“아, 왜요? 아침부터 열심히 골랐구먼. 이런 취향이 아니에요? 어쩌죠? 나는 완전 마음에 드는데.”
“편히 아침을 먹는 자리야. 귀족 파티가 아니라.”
“당신도 넥타이까지 멋들어지게 매고 왔구먼요, 뭘. 괜히 나한테만 뭐라고 해.”
클로엔이 입을 삐죽 내민 채, 투덜댔다.
“아, 아무튼!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와. 거추장스러우니까.”
“거추장스러워요? 이렇게 뻥 뚫렸는데? 대체 어디가 거추장스럽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클로엔이 드러난 어깨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어딘지 놀리는 듯한 말투에 에드먼드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뱀파이어 신부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야. 검은 옷, 새빨간 입술,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아주 삼박자가 고루 맞는군.”
“어머, 그래요? 그렇게 또 퇴폐미가 있었구나? 어떻게 심장이 좀 뛰어요? 막 두근두근하고 그르나?”
말과 동시에 옆에 있던 샤샤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검은 드레스를 찾아올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라니, 다음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샤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샤샤.”
아니나 다를까, 서늘한 공작의 목소리가 샤샤를 찾았다.
“어서 부인을 모셔 가도록 해.”
“하하…… 네. 공작님.”
어색한 미소와 함께 부인의 곁으로 가던 그 순간이었다.
“이왕이면 빛 좋은 개살구라고 어차피 입고 온 거, 그냥 기분 좀 냅시다.”
클로엔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으르렁거렸다. 곧바로 높낮이 없는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되받아쳤다.
“내가, 불편해.”
“거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음이 막 콩닥콩닥 한 거라니까?”
“하…… 도통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 그만하지. 앉아. 그대로 하자고.”
“그럴까요, 그럼?”
클로엔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두 손을 입꼬리에 가져대며 말을 덧붙였다.
“아침부터 열 올리면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웃어요. 웃어.”
얼마 지나지 않아,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식탁 위로 자리를 잡았다.
꿀을 적신 과일 샐러드와 노릇해 보이는 베이컨, 잘 익힌 달걀부침과 계절 치즈, 막 구운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빵, 두툼한 송아지 구이까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만큼 완벽한 식탁이었다.
‘츄릅, 맛있겠다.’
굶주린 위장이 빨리 음식을 넣어달라 요동쳤다. 꼬르륵 소리가 난 건 아닐까, 주변을 힐끔 살폈으나 다행히 평온했다.
“오늘 음식은.”
주방장 레틴이 차례대로 준비한 음식들을 소개했다. 공작 부부의 시중을 위해 사용인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서로 다른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쏟아진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괜히 입술을 달싹이며 불편한 티를 냈으나 에드먼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시작해 볼까?”
에드먼드가 운을 띄우며 식기를 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쿡쿡, 단단한 옆구리를 은밀히 가격했다.
“……!”
예상치 못한 일격에 에드먼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흠흠, 무슨 일이지? 이번에도 얼토당토않은 말을 할 생각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보내 줘요.”
일순 에드먼드의 적안이 빠르게 흔들렸다.
순순히 협조를 논하는가 싶더니, 결국.
“보내 달라고 한 건가, 지금?”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피식,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차디찬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지? 나를 놀리는 건가?”
“아니, ……을 내보내 달라고요.”
“뭐?”
에드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곧장, 의자를 당겨 속삭였다.
“저 사람들 좀 내보내 달라고요.”
고장 난 뻐꾸기라도 된 듯, 잠시간 굳어 있던 에드먼드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러고는 일렬로 늘여진 사용인들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사람들 말하는 건가?”
“그래요, 저 사람들. 부담스러워 죽겠어요. 어제도 먹다 체할 뻔했다고요. 필요하면 부르면 되지, 굳이 저기 서 있어야 해요? 서로 불편하게.”
“그게 이유인가? 불편한 것도 적응해야 할 것 중 하나인데.”
“무엇보다…… 쪽팔려요. 내가 식기 잡는 법도 모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수치심에 숨고 싶었다. 민망함에 입술을 씰룩이자, 에드먼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타이를 느슨히 하며 말했다.
“보좌관.”
“네, 공작님.”
곁에 있던 멜빈이 서둘러 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데리고 나가.”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불편한 게 있으시면 즉각 해결을 해드려야 하는걸요.”
“아무도 없는 전쟁터에서도 잘 지내왔어. 나가 봐.”
랜돌프 공작의 명령에 안에 있던 사용인들이 쭈뼛대며 식당을 나섰다. 널따란 내부에는 오롯이 두 사람만이 자리했다.
“휴…… 이제야 편하네. 어제부터 계속 불편했거든요. 누가 옆에 붙어 있는 거. 밥 먹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먹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여보.”
진심을 담아 다정히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어색한 침묵만이 자리했다.
“다른 사람 같군.”
무거운 정적 뒤로 에드먼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불편해요?”
“글쎄. 이전에도 난 당신이라는 사람을 잘 몰랐었으니까.”
“잘됐다, 나도 잘 모르는데. 이제부터 차차 알아가면 되겠네요. 시간도 많은데 뭐.”
“생각보다 내가 바빠서 말이야.”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아주 비싸게 구시죠, 우리 공작님께서는.”
“그래서 그런 이상한 차림을 하고 온 건가?”
“알면 좀 반응을 하죠? 정말 재미없어. 흥! 됐으니까, 이거나 좀 알려 줘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못 먹는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요?”
“정 안 되면 어제처럼 나를 따라 하면 되지. 뭐가 문제지?”
에드먼드가 잘라 낸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는 말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래요, 뭐 잘됐어. 예절이고 나발이고 안 배우면 되지 뭐. 나만 쪽팔려요? 당신도 쪽팔리지.”
얄궂은 태도에 괜히 심통이 났다. 입술을 삐쭉이자,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커다란 손이 바깥쪽에 있던 작은 포크와 나이프를 가리켰다. 곧이어 듣기 좋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포크와 나이프는 바깥쪽부터 샐러드, 생선, 정식 순으로 놓여. 음식에 맞게 사용하면 되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숟가락은 수프용, 그 옆에 있는 이 작은 꼬치는 칵테일용이야.”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왼편에 놓인 건 빵과 버터 접시, 가운데에 있는 건 디저트용 숟가락과 포크. 컵은 큰 것부터 물컵, 포도주, 샴페인 순으로 쓰면 돼. 알아들었나?”
“말 시키지 말아 줄래요. 암기 중이거든요. 샐러드, 생선, 정식 그리고 가운데는 디저트…….”
그가 한 말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의 수모를 떨쳐 버리고자,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입력했다.
“일단 잡는 법부터 알려 주지. 정식용부터 들어 봐.”
엄한 목소리에 나는 곧장, 안쪽에 놓인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이 제법 결연했다.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잡고, 손잡이의 끝부분이 손바닥에 닿도록 잡는 거야. 포크도 마찬가지야. 이제 잡은 손에 힘을 주고 한 입 거리로 잘라 줘. 식기가 부딪치지 않게 조심……!”
끼기긱! 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이프가 미끄러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에드먼드가 구겨진 미간을 애써 피며 말했다.
“다시, 소리가 나지 않도…….”
끼기기긱!
“아, 이거 영 칼이 안 좋네!”
민망함에 되레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 일평생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살아온 나에게 나이프와 포크는 어려운 관문 중 하나였다.
과거 돈가스집에서도 그랬다. 타고난 기술 부족으로 고기를 갈기갈기 찢어대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고. 할 수 있어. 이깟 것쯤. 우스운 꼴 보이지 말자. 할 수 있어!’
비장한 눈빛과 함께 들고 있던 나이프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소음을 울렸고.
끼기긱! 끼긱!
그와 동시에, 에드먼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이 안 좋다고 했던가?”
“네? 아…… 네.”
이어진 대답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곁으로 온 에드먼드의 몸이 등 뒤로 닿았다.
자그마한 손 위로 큼직한 사내의 손이 올라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한 고깃덩어리가 부드럽게 잘렸다.
드러난 어깨 위로 에드먼드의 숨결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렸다.
‘이, 이건…… 두 번째 키스각?’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