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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12)화 (12/107)

제12화

“약초는?”

“챙겼어요.”

“상처를 덮을 헝겊은?”

“그것도 여기에 있어요.”

“후…… 나 문전 박대당하는 건 아니겠지, 샤샤?”

무작정 에드먼드의 침실 앞까지 찾아왔으나, 그간의 과오 때문일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 두드려 보기라도 해 보시죠. 대체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벌써 한 시간째라고요, 부인. 밀린 빨랫감도 정리해야 하고 손님방도 정돈해야 하는데…….”

샤샤가 입술을 쭉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잠시만!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해. 조금이면 돼. 괜찮아.”

긴장을 풀려 두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똑똑-.

보다 못한 샤샤가 예고 없이 문을 두드렸다. 평온하던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샤샤! 대체 므 흐는그야, 상의도 없이 그르믄 으뜨케.”

놀란 마음에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전 내일 아침까지도 퇴근을 못 할 거예요. 사과와 퇴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답니다, 부인.”

닫힌 문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공작님! 저 샤샤입니다. 부인께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시길래 모셔왔어요.”

벌컥, 문이 열리고 편안한 차림의 에드먼드가 모습을 비췄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이제 막 목욕을 마친 것인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과 무심하게 내려앉은 붉은 눈동자. 얇은 옷감 아래로 드러난 튼실한 몸뚱이까지.

느슨하게 풀린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몸을 훑어 내자, 에드먼드의 한쪽 눈썹이 빠르게 꺾였다.

쿵, 미남에 약한 심장이 다시 한번 고동을 키웠다. 곧바로 에드먼드의 못마땅한 시선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어서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듯한 저 눈빛, 민망한 마음에 나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흠흠, 다른 건 아니고 그냥 뭐 괜찮나 해서 와 봤어요.”

그 순간, 바스락.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눈을 뾰족하게 뜬 채 주변을 곁눈질했다.

“안에 누가 있어요?”

말과 동시에 끼익, 벌어진 문틈이 활짝 열리며 어색한 표정의 멜빈이 보였다.

“어머, 보좌관님! 여태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이런…… 차림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젖은 차림의 에드먼드를 훑었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구릿빛 피부가 초코 푸딩 같았다.

“아하하, 공작께서 지시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마치 나쁜 일을 하다 걸리기라도 한 듯, 멜빈이 두 손을 내저으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뭔가 수상한데.’

고민하는 사이, 나지막한 랜돌프 공작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복도를 울렸다.

“됐고, 용건이나 말하지.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아니…… 상처 좀 치료해 주려고요.”

뒷말을 흐리며 그의 목에 난 생채기를 가리켰다. 불긋한 핏자국이 있는걸 보아, 상처가 제법 깊어 보였다.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에드먼드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긴 팔을 뻗어 입구를 막아섰다. 엄밀한 거부였다.

“괜,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딱 보니까 흉 지겠구먼. 들어가요. 약이라도 발라 줄 테니까.”

일순 그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야심한 시각, 불쑥 찾아온 것도 모자라 자신의 침실까지 들어오겠다니.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지?’

에드먼드의 시선이 빠르게 샤샤를 향했다. 안심하라는 듯, 선한 미소와 함께 작게 손짓하는 시녀의 모습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방 안으로 들여보내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문을 잡고 있던 팔 아래로 자그마한 몸이 지나쳐 갔다.

“뭐 하자는 거야?”

“뭘 하기는 뭘 해요. 치료해 준다니까, 얼른 와서 앉아 봐요.”

느슨해진 경계를 틈타 침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곧장, 샤샤를 불렀다.

“샤샤, 여기에 들고 온 것들 좀 놓아줄래?”

뒤이어 샤샤 역시 그의 팔 아래를 지나쳐 갔다. 어이없는 상황에 에드먼드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고마워, 이만 나가 봐도 좋아. 여기는 내가 정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진 축객령에 샤샤가 싱긋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가벼운 발걸음이 다시 한번 그를 지나쳤다.

“내일 뵙겠습니다, 공작님.”

깍듯한 인사 역시 잊지 않은 채. 쾅! 문이 닫히고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계속됐다.

“뭐, 뭐하고 서 있어요. 어서 앉지 않고.”

서둘러 그를 재촉했으나 미동이 없었다. 그저 빤히.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묵언 수행이 취미야, 뭐야.’

다문 입술 사이로 “끙.” 불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잡아먹기라도 한다는 듯, 거리를 두는 남편의 모습에 억울함과 동시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물론 민망함은 덤이었다.

벌려 놓은 일들이 있으니 무작정 그를 탓하기도 모호했다. 모든 게 내 업보니라, 그리 생각하며 힘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서 앉으라니까요, 여보.”

다정한 부름에 에드먼드가 비적비적 걸음을 내디뎠다. 경계심 어린 적안이 저를 향하고, 커다란 몸이 마침내 제 앞에 섰다.

손을 들어 어서 앉으라는 듯 폭신한 이불을 툭툭, 두드렸다. 얼굴을 굳힌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으니까 나가. 치료는 받은 셈 치지.”

“뭐가 그렇게 항상 못마땅해요? 그냥 좀 못 이기는 척, 따라 주면 되지.”

“…….”

“어서 앉아요. 이거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단호한 목소리에 그가 마지 못해 자리에 앉았다. 자그마한 손이 통에 놓인 물수건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이미 굳어 버린 피딱지를 살살 문질러 내자, 커다란 몸이 움찔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 따가워요.”

부러 반 박자 느리게 말했다. 에드먼드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이 또한 내 나름의 작은 복수였으니 말이다.

“움직이지 말아요. 약 바를 거니까.”

미리 짓이겨 놓은 약초를 환부에 바르자 에드먼드의 눈살이 작게 일그러졌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호호, 입김을 불어 넣자 줄곧 곧은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하지.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딱딱한 말투와 달리, 에드먼드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 다 됐어요. 금방 끝나요. 갑자기 일어나면 발라 놓은 약초들이 다 떨어지잖아요.”

“흠흠, 내가 알아서 한데도.”

“에이, 내가 해 준대도 그러네요. 샤샤 말 들어 보니, 웬만한 상처는 치료도 안 한다면서요. 내가 안 왔으면 그것도 고대로 뒀을 것 아니에요. 부부 사이에 부끄러워하기는.”

새초롬히 미소 짓자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후…….”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빨리 끝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체념한 듯, 자리에 앉은 그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사이 치료는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알맞게 잘라 놓은 헝겊 조각을 덧대자, 푸릇한 약초 물이 배어 나왔다.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그의 눈동자. 괜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저…… 아까 일은 미안했어요. 멱살까지 잡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됐어요.”

이어지는 말소리에 감긴 두 눈이 허공을 갈랐다. 붉은 망막 위로 의기소침한 내 모습이 온전히 담겼다.

“순전히 화가 나서 그랬어요.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자꾸만 소리 지르고 화내고 사람을 몰아붙이니까…….”

“여전히 입은 살았군.”

“아까 말한 열 가지는 진심이에요. 그러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이 또한, 진심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는 건 무척이나 쑥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성을 잃고 지껄여 버린 진심들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던 찰나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난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자연스레 얼굴이 굳었다. 진정성 있게 말했거늘 또 이따위의 반응일 줄이야. 대체 언제까지 내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참담했다.

“그래,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오죽하겠어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마음대로.”

빠진 기운에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방법을 조금 바꿔 볼까 해.”

그가 말했다.

“뭘요?”

“우리 관계를 이어 가는 방법.”

그건 또 뭔 말이야?

뜻 모를 이야기에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에드먼드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난 진실로, 당신이 필요해.”

내 목적을 위해. 에드먼드가 검은 속내를 숨기곤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당신 진심을 듣고 생각했어. 그간 우리가 놓친 게 무엇인지.”

“뭘 놓쳤는데요?”

“신뢰. 이제부터라도 쌓아야겠지. 진짜 부부가 되려면.”

이어진 말소리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부부, 분명 진짜 부부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즉, 더는 이혼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단 말?!

‘할렐루야, 신이시여……!’

지금껏 해 온 걱정과 근심이 한 방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안락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완벽 그 자체의 남편까지 모두 내 것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팡파르라도 울리고 싶었다.

“그래요! 아주 잘 생각했어. 이게 내가 바라던 거라니까? 앞으로 우리 아주 잘 지내보자고요. 내가 자녀 계획까지 다 짜놨어.”

자녀라는 말에 철옹성 같던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당신이 내게 협조할 거라 믿어. 이 모든 게 클로엔 랜돌프, 당신을 위한 거기도 하니까.”

“좋아요. 단, 나도 조건이 있어요.”

이어진 말소리에 에드먼드의 입꼬리가 길게 늘여졌다. 애초에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번에 조건을 붙이다니, 과연 그녀다운 행보였다.

기억 상실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명을 주장하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게 분명했다.

어떤 조건들로 자신을 당황하게 할는지, 벌써 아득했다.

‘우리 쪽 세력을 키울 때까지, 당장의 이혼만 막으면 돼.’

에드먼드가 늘 착용하던 검은 장갑을 추켜올리며, 소리 없이 조소했다. 이내 말해 보라는 듯, 오만한 턱 끝을 까딱였다.

“딱히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내가 판단하지. 어서 말해 봐. 조건이라는 게 대체 뭔지.”

“제시할 조건은 세 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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