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눈치를 살피던 멜빈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도무지 모르겠어. 도무지.”
“무슨……?”
“그 바람 같은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사이 좋게 식사도 하시고, 산책도 하셨던 거 아니셨습니까?”
“그랬지. 계속 연기를 하다 보니 이젠 정말 미친 모양이야.”
처연하게 내려앉은 적안은 목소리와 달리 덤덤했다.
“그 여자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기억을 잃었다는 헛소리를 믿어 주는 게 아니었다고! 하……. 괜한 호의를 베풀었어.”
쾅! 잠시 침묵하던 그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동시에 멜빈의 두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호의요? 설마 부인께서 공작님의 호의를 거절하신 겁니까?”
“들어 봐. 그 여자가 내게 산책을 하자며, 꽃밭을 데려가더군. 그것도 다 죽어 가는 꽃밭을.”
“…….”
“그러곤 이걸 줬어.”
공작의 손에 의해 꾸깃꾸깃하게 구겨진 꽃송이가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멜빈의 잇새에서 끙,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대체 부인께서 무슨 생각으로…….”
“지옥이나 가란 말이겠지.”
빌어먹을, 옅게 미소 짓던 그가 들고 있던 얼음 잔을 빠르게 털어 넣었다. 오독오독, 얼음 조각이 부서지며 경쾌한 파열음을 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멜빈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뭘?”
“부인을…… 저대로 두실 작정입니까?”
“한 번쯤, 그 여자의 뜻대로 놀아나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렇게 된 이상, 전 아무래도 부인의 주장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닥터 마르스 또한 마찬가지고요.”
낮게 침식한 붉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러갔다. 진득한 시선이 한동안 이어지고, 닫혀 있던 입술이 틈을 벌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 여자의 힘이 필요해.”
“하지만, 공작님! 이대로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부인께서 또다시 저택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멜빈의 외침에 서늘한 공작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널찍한 등 뒤로 넘실거리는 오러가 위협적이었다.
소리 없는 경고에 멜빈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전에 지시했던 일들은?”
“완벽히 정리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늘 변명뿐이지.”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먼드의 발걸음이 등 뒤로 향했다. 달그락, 검을 고르던 손끝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입으로는 ‘클로엔, 클로엔.’ 제 부인의 이름을 수없이 되새기며 말이다.
* * *
그 시각, 클로엔의 침실.
닫힌 문이 열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후, 샤샤! 나 물 한 잔만 줄래?”
“어라? 공작님과 산책을 하신다더니 벌써 오신 거예요?”
씩씩거리며 입을 꾹 다물자, 샤샤가 서둘러 물잔을 건넸다. 타는 속에 건네받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성난 숨을 토해 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잘생기면 다야? 잘생기면 다냐고!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공작님과 무슨 일 있으셨어요? 기분 좋게 나가시는 것 같더니…….”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밥도 먹어, 차도 먹어, 산책도 같이해, 꽃도 줘. 뭐가 그리 못마땅한 거냐고!”
대뜸 불만을 쏟아 내자, 샤샤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문제야? 말해 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어지는 일방통행 화법에도 샤샤는 평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후…….”
샤샤가 옅은 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말씀을 해 주셔야 알죠. 일단 진정을 하시고 천천히, 알아듣게 말씀해 보세요. 그래야 제가 돕죠.”
“들어 봐. 후원에 갔어. 근데 라벤더가 있는 거야. 라벤더.”
“라, 라벤더? 라벤더요?”
“그래, 라벤더! 그래서 내가 향도 좋고 색도 좋아서 그걸 하나 꺾어서 에드먼드한테 가져다줬어. 그랬더니 허촤, 막 성질을 내는 거야!”
“흠, 공작께서 쌀쌀맞으시고 정이 없으시기는 합니다만…… 꽃을 건넸는데 대뜸 막 화를 내셨다고요?”
“그렇다니까!”
짧게 답한 후, 잠시 회상했다. 에드먼드에게 라벤더를 쥐여 주던 그 순간을.
‘이런 식으로 날 모욕할 줄은 몰랐군. 굳이 여기까지 오는 수고까지 더해 가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