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에드먼드가 낮게 신음하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옆에 있던 샤샤가 눈치를 살피곤 재빨리 말을 더했다.
“부인께서 큰 사고를 겪으신 터라, 많이 불안정하신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오늘은 쉬시는 게 어떠실지…….”
“그러는 게 좋겠군.”
에드먼드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그러곤 무어라 중얼거리곤 망설임 없이 방을 떠났다.
“이부자리를 정리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부인께서는 어서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 말한 샤샤가 방 깊숙이 놓인 침대 주변을 정리했다. 그 밤, 보송한 이불을 느끼며 어느 때보다 편히 잠들었다.
그렇게 존잘남과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아침을 깨우는 노크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 * *
똑똑! 똑똑! 아침부터 요란한 노크 소리가 잠을 깨웠다.
“으음, 뭐야…….”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눈을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인, 손님이 오셨어요.”
낭랑한 샤샤의 목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들려왔다.
손님? 지금 아는 사람이라고는 저 말 많은 시녀랑 에드먼드가 전부인데 사람을 만나라고? 그것도 이 아침부터?
“지, 지금은 몸이 안 좋아! 나중에, 나중이 좋겠어, 샤샤.”
잠시 생각하곤 서둘러 대답했다.
“나야.”
‘에드먼드?!’
곧바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온몸이 경직되며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차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막 일어났잖아.’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서둘러 얼굴을 정리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어물쩍거린 후에야 “후…….” 안도 섞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돌려내자.
“반갑습니다, 랜돌프 공작 부인.”
“저…… 누구?”
“오늘 부인의 몸을 진찰할 닥터, 마르스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에드먼드가 아니었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는 마르스의 뒤로 쭈뼛거리는 샤샤의 모습이 보였다.
“오면 온다,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예고 없던 등장에 소리를 낮춘 채 샤샤에게 속삭이던 그때였다.
“기억을 잃었다기에 준비해 봤어.”
“예?”
“정상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침부터 열일하는 에드먼드의 미모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무슨……?”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잖아.”
피식, 미소 짓는 에드먼드의 모습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샤샤 역시 뺨을 붉히며 공작 부부를 힐끗거렸다.
마주 본 시선과 미소. 겉으로 보아선 퍽 다정하고, 달달한 신혼부부나 다름없는 행색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래요. 들어와요. 확인이 필요하면 해야죠. 그럼요.”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쉽사리 길을 터줬다. 저 얼굴을 두고 보호막을 치는 건 시간 낭비다. 그사이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가 에드먼드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뜨나, 달이 뜨나 열일하네. 저 집이 일당백이네.’
에드먼드의 얼굴에 심취해 있는 사이, 닥터 마르스는 진찰을 준비했다.
“흠흠, 부인 잠시 손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아, 손! 아, 여기.”
그사이, 마르스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고 청진기로 추정되는 물체를 몸에 가져다 대기도 했다.
“흐음, 맥박이 불안정하군요.”
‘당연하지, 눈앞에 먹잇감이 있는데 심장이 제 기능을 할 리가.’
이른 아침부터 들뜬 기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2D로만 보던 미남자를, 4D로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이 두근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빠짐없이 확인해.”
그리 말하는 에드먼드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가히, 있는 자의 여유였다. 닥터 마르스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추가 요청하신 검사까지 진행하려면 반나절은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만…….”
“약속된 금액의 곱절을 주지. 랜돌프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랜돌프라는 말과 동시에 마르스가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미천한 살인귀의 말은 믿지 못하는 건가? 검으로 맹세라도 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말,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랜돌프 공작님.”
“농담이야. 내가 굳이 검을 들 이유가 없잖나.”
“그, 그럼요. 지엄하신 공작께서 그럴 리가 없으시죠. 하하.”
마르스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더욱 꼼꼼히 나를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에드먼드의 검은 장갑을.
진찰을 받던 얼굴이 소리 없이 굳어 갔다. 저 가련한 맹수에게는 역시, 내 도움이 필요했다.
에드먼드는 황위를 차지하고 싶었다. 외면받은 영웅은 복수를 꿈꿨고, 또 칼을 갈았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성립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부인, 입을 벌려 보시겠어요? 아~ 하시면 됩니다.”
그건 바로 클로엔 엘리테른. 지금의 공작 부인이자 잘나가는 백작 가문의 외동딸.
엘리테른 가문은 당시 황제의 세력 중 하나였다. 때문에 클로엔은 에드먼드에게 아주 적합한 먹잇감이었다. 엘리테른 백작은 권력과 명예를 가졌고, 에드먼드는 무력과 더불어 막강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 다 됐습니다.”
닥터 마르스가 입 안을 살피곤 떨떠름히 미소 지었다.
“얘도 분명 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예? 무얼 말씀입니까?”
진찰을 이어 가던 마르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하하. 혼잣말. 혼잣말이에요.”
하지만, 한평생 고귀한 귀족으로 살았던 엘리테른 백작이 출생도 모르는 기사 출신에게 딸을 내줄리 없었다.
에드먼드는 그 점을 정확히 알았고 이용했다. 엘리테른 백작이 반역을 도모하며 황권을 위협하려 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황제는 분노했다.
더불어 독자들의 비난 역시 빗발쳤다.
[로판짱조아 : 작가 인생에 문제 생긴 듯. 작품에 화풀이함. 남주 개짜증.]
[전문하차러 : 남주가 쓰레기네요. 하차합니다.]
[주노가미래다 : 선발대입니다. 여러분의 돈과 시간은 소중합니다.]
에드먼드는 황제에게 감시와 관리라는 명목하에 클로엔과의 결혼을 명해달라 청했다.
결국,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린 엘리테른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딸을 빼앗겼다.
더불어, 에드먼드가 청혼을 빙자한 억압을 가하던 당시 그녀에게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그 둘은 꽃 피는 봄이 오면 평생을 함께하고자 언약했고, 달콤한 약속은 그렇게 산산이 조각났다.
“부인, 이게 지금 몇 개로 보이십니까?”
“음…… 삼?”
“시력은 정상이시고…….”
가문, 약혼자, 미래.
한순간 모든 걸 잃은 원작 여주는 에드먼드를 저주하고 증오했다. 그가 죽기를 바랐고, 또 죽이려 했다.
오죽하면 회차가 지날수록 로맨스를 보는 건지, 스릴러를 보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난장판인 와중에도 남주는 여전히, 늘, 언제나, Always, 잘생겼었으니까.
“부인, 소리가 나는 쪽의 손을 들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작가의 날뜀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았고. 불신과 오해가 쌓인 두 사람의 관계는 파멸에 이르렀다. 여주는 도망갔고, 남주는 점점 악을 삼켜 가며 미쳐 갔다.
두 사람이 다시 재회했을 땐, 에드먼드의 심장에 칼을 겨눈 상태였다. 물론 상대는 원작 여주, 클로엔 랜돌프였다.
원작 내용을 회상하자니 괜스레 서글펐다. 저도 모르게 코끝을 찡긋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저 넓고 우람한 가슴에 칼침을 놓다니 말도 안 되잖아.’
입술에 침을 발라 놓는다면 몰라도.
시선을 느낀 에드먼드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닥터 마르스는 둥글둥글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꼼꼼히 살폈지만, 특별히 건강상에는 이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제 끝난 건가요?”
“그럴 리가요, 부인. 지금부터는 기억과 관련된 간단한 검사들을 시작할 겁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눈동자를 굴려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당신 남편의 이름조차 잊을 만큼.”
‘그랬지, 어제까지는 진짜 기억을 못 했으니까.’
나지막한 에드먼드의 목소리에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아꼈다.
상대는 세계관 최고에 버금가는 흑막. 황제는 물론, 황제의 자식들까지 제 편으로 포섭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주하던 이였다.
‘아마 황실 사람 중 하나가 에드먼드랑 손을 잡았다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개인의 욕심만을 위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또한, 에드먼드가 원작 여주 클로엔을 돕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외전으로 나왔던 뒷이야기가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에드먼드는 원작 여주를 도왔다.
‘그래도 상대는 미친놈이야. 완전히 구워삶기 전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저택을 벗어나 봤자 다시 잡혀 올 거다.
무엇보다 도망을 칠 마음조차도 없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곳이 <랜돌프 공작가의 비극>이 진실로 맞는다면, 그에게 사랑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람이 필요했다.
어렴풋하지만, 에드먼드에게는 적어도 일말의 인간성이라는 게 있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외면받아서지 태생부터 나쁜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확인해 봐야지. 당신 머리에 진짜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그래 지금처럼!
고로, 원작 여주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부디 이 가련한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해 미치광이라는 오명을 벗겨 주는 데 힘쓸 생각이었다. 또한 황위를 향한 그릇된 욕망 역시 없애 줄 것이다.
‘우리 애가 얼마나 진국인지 보여 줄 거라고 내가!’
에드먼드의 진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추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다.
“할 수 있어.”
원대한 계획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먼드의 미간이 자유자재로 구부려졌다. 이제는 이해하기를 포기한 듯 그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