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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3)화 (3/107)

제3화

“그, 그러니까…… 외상 후 스트레스!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같은 거예요. 하하.”

“외상 후…… 스트레스?”

“큰 사고를 겪고 나면 기억이 뚝 끊긴다거나, 반쯤 미친다거나 그런 일이 있거든요. 의외로 비일비재한 일이죠.”

별일 아니라는 듯 나는 살포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진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무것도?”

“네, 뭐 그런 셈이죠. 하하하. 얼굴이 100점이라 그런지, 이해력도 100점이네요. 공작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서둘러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물론 미소는 덤이었다. 원래,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지 않던가.

“뭐, 100점? 그리고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지금 내 말이 웃긴 건가?”

‘저런, 옛말이 틀린 모양이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댔다. 패인 홈이 깊어질수록,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아차차! 그냥 혼잣말이에요. 종종 이러죠. 하하.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전 얼굴만 봐도 배불러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곤 그저 샐쭉 웃었다. 물론, 입으론 웃고 있었지만 울고 싶은 심경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샤샤를 통해 정보를 얻는 건, 무리였다. 고로, 직접 부딪혀야만 한다는 말이지.

“아 참!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과 동시에 흥미로운 듯, 공작의 시선이 저를 향했다.

“뭐지?”

“그래서 우리 이혼이 어디까지 진행된 거죠?”

“오, 주여.”

물음과 동시에 옆에 있던 샤샤가 낮게 읊조렸다.

일순, 랜돌프 공작의 눈망울이 거세게 흔들렸다. 오만하던 조금 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 허탈함이 깃들었다.

“하, 이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공작의 말에 두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다행히 이혼이 인정되지는 않았고, 협의 단계에 있지.”

“그것참 행운이에요. 이런 존잘남을 눈앞에서 놓칠 뻔했다니.”

눈 깜짝할 새에 진심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시각각 구겨지는 공작의 얼굴을 감상하며 나는 생각했다.

눈앞의 미남자를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이상하네. 이 정도 미남이면 내가 까먹을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흐릿한 기억을 더듬거리던 그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에드먼드 랜돌프, 소드마스터, 전쟁광, 냉혈안, 살인귀.]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법한 수식어들이 머릿속을 윙윙거렸다.

“뭐? 잠깐만. 살, 살인귀……!?”

놀란 눈망울이 기억의 주인공을 향했다.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더니 에드먼드 역시 그 불변의 법칙을 빗겨 나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고요하던 라벤더색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며 에드먼드를 쫓았다. 에드먼드 역시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아무래도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군.”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비릿하게 말했다.

[당신만큼은 날 믿었어야지.]

불현듯, 조금 전 떠올린 웹툰의 다음 장면이 번뜩 스쳐 갔다. 이내, 잊고 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왔다.

<랜돌프 공작가의 비극>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간 떠오른 것들이 눈앞의 남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모두가 칼에 맞아 죽는 피폐 웹툰 속,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으으……!”

‘설마 나도 죽는 건가?’

일순,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떨리는 눈동자가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아나, 이 와중에도 잘생겼어.’

생존의 여부가 넘나드는 사이에도, 몸과 뇌는 본능에 충실했다. 에드먼드의 잘생긴 낯짝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누울 자리는 여기구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존잘남의 옆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편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눈의 행복은 보장될 테니 말이다.

<랜돌프 공작가의 비극>은 학창 시절에 보았던 웹툰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런데도 내용을 떠올릴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남주가 잘생겼었다.

그것도 무척.

“하……. 성공한 덕후였어.”

“대체 아까부터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에드먼드가 말을 붙였다.

‘그림이 말을 하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심각한 얼빠였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웅장한 도입부와 검과 마법이 빗발치는 세계관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시절 내 심장을 뛰게 한 건 단연, 랜돌프 공작의 우월한 미모였다.

반면에 에드먼드는 전쟁광, 냉혈안, 살인귀라는 엄청난 수식어를 가진 사내이기도 했다.

“클로엔.”

“아! 네. 죄송해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생각? 잊었다던 기억이 번쩍 나기라도 한 건가?”

“그, 그럴 리가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갑자기 떠올라서 하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길게 늘여진 치맛자락 아래로 두 다리가 달달 떨렸다.

지독히도 잘생긴 얼굴 위로 ‘살인귀, 살인귀.’ 살벌한 세글자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애석하게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몰래 심호흡하며 요동치는 심박 수를 잠재우는 것뿐이었다.

‘대운인 줄 알았거늘, 사실 개패였던 거야? 아니, 아니지. 이 망둥이 같은 여자가, 그것도 행복한 결혼기념일 날, 그런 엄청난 짓을 했어도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잖아?’

그는 제국을 제패한 소드마스터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에드먼드가 사람 하나쯤을 더 죽여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물며 탈주극을 벌이다가 잡혀 온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내 목숨을 살려 두었다.

즉, 일말의 희망은 있다.

‘투자 가치는 충분해. 인간미가 있잖아. 아무렴.’

“그러면, 그날은 어떻게 된 거죠?”

“그날? 내가 연무장에 간 틈을 타 도주하던 그날을 말하는 건가?”

살벌한 공작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최대한 모르겠다는 듯 연기를 이어 갔다.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를 않아서.”

“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에드먼드가 내가 한 말을 되풀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벌어져 있던 거리를 좁혔다.

그가 낀 검은 장갑이 턱 끝을 지분거렸다. 괜한 긴장감에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더럽게 잘생겼어. 치명적이야. 갖고 싶다, 이 남자.’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진실로 갖고 싶다고.

전쟁광? 냉혈안? 공작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일을 하다 보면 인생이 조금 험해지고 거칠어질 수 있다.

암, 그렇고말고.

더군다나 이곳의 배경은 피의 시대인 중세이다. 더불어, 그녀의 잘생긴 남편은 위기에 빠진 라비스텔 제국을 구해 낸 영웅이 아니던가.

거기다 돈도 많다. 펑펑 쓰고도 넘쳐 죽을 만큼. 전쟁 영웅이었던 에드먼드는 귀환과 동시에 막대한 전리품과 영지를 하사받았다. 집 안이 번쩍번쩍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돈도 많아. 몸도 좋아, 능력도 있어, 얼굴도 좋아. 이건 허망하게 세상을 달리한 제게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 분명하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구나.”

“뭐?”

에드먼드의 물음에 벌어진 잇새를 의식적으로 닫았다. 그러곤 후, 벅찬 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니. 아무것도.”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흩어진 기억 조각을 하나둘 맞춰 나갔다.

그래. 이대로만 갔더라면, 그의 인생은 꽃길이었을 거다. 그것도 아주 창창한. 돈, 명예, 힘 모든 걸 가졌으니 부러울 게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인생은 늘 순탄치 않고 영웅의 주변엔 적들이 즐비하기 마련이다.

에드먼드의 뒤에는 ‘돌아온 영웅’이라는 수식어 대신 ‘피에 미친 살인귀’, ‘전쟁광’이라는 극악무도한 단어들이 붙었다.

물론, 그가 해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먼 훗날, 소문에 지친 그가 반역을 도모해 황권을 차지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작 속의 세상은 너무도 부패했다. 에드먼드는 그런 황제를 증오했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자신마저 썩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당신 오명, 내가 벗겨 줄게요.”

‘그리고……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도와줄게요.’

측은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에드먼드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빈틈없던 모습과 달리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갑자기 오명이라니……?”

닿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에드먼드가 미간을 구겼다. 명백한 거부 의사였으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련하고 애석한 한 마리의 늑대를 앞에 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웠을까.’

본래의 몸 주인이었던 클로엔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들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의 주인이 내가 된 이상 이야기는 달라져야만 했다.

“우리 애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안 그래요?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잖아요?”

물음과 동시에 에드먼드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대답을 구하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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