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작 이깟 서류 조각 하나 던져 놓고 가면 일이 해결될 줄 알았어?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도통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근차근 말해 줘도 모자랄 판국에 앞뒤 다 자르고 말하면 누가 알아듣는단 말인가.
‘근데 잠깐, 손에 든 저건 뭐지?’
자연스레 시선이 공작의 손으로 향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고 있던 종이의 내용을 살폈다.
<이혼합의서>
신청자 : 클로엔 랜돌프
다른 것들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유독 저 두 문장은 막힘없이 읽혔다.
‘저것 때문이구나.’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미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하얀 낱장에 저 다섯 글자가 똑똑히 적혀 있었으니 멀쩡할 리가. 더군다나, 저 어마어마한 것을 달랑 남기고 도망이라니!
클로엔이라는 여자는 대체 무엇이 모자라 저런 존잘남과 이혼을 하려던 건지. 복에 겨워 헤엄을 쳐도 유분수였다. 쯧, 씁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라니, 상심이 크시겠어요. 두 분 부디 원만히 해결하시기를 바라요. 유부남이었다니, 조금 아쉽네요.”
“끝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건가?”
“아니, 이건 저랑 하실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아내분과 대화해 보시면 위기를…… 극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랜돌프 공작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곧바로 “하…….” 짜증스러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분쯤 흘렀을까, 랜돌프 공작이 커다란 손을 들어 마른세수했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당신이 모르는 척해도 난 인정 못 해. 지금껏 당신 의견을 존중해 왔지만,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어.”
마주한 동공이 나를 향해 이글댔다. 순간 그 속에 든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오밀조밀 예쁜 눈코입, 신비로운 라벤더 빛 눈동자, 길게 늘어뜨린 백금발 파마머리.
‘잠깐, 보라색 눈에 백금발?!’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그러곤 시선을 내려 지금의 내 모습을 바라봤다.
‘말도 안 돼.’
충격에서 채 헤어 나오기도 전에 랜돌프 공작의 손에 들려 있던 종잇조각이 반으로 찢겨 나갔다.
그러곤 그가 말했다.
“난 못 해, 이혼.”
무참히 찢어 발겨지는 종잇조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선한 자에게 복이 온다더니,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대운이 들어 온 것 같다고.
‘그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기엔 아까웠지…….’
더듬어 보자면, 어려서부터 운이 따르는 편이었다. 장난으로 보냈던 라디오 사연에 당첨되기도 했고, 100대 1이라는 경쟁을 뚫고 최애의 콘서트 표를 구해 오기도 했다.
그뿐이던가, 극악의 확률이라는 노란 집 캐시 뽑기에서 천원을 타기도 했다. 봉지 라면에 다시마가 2개씩 들어 있는 일 따위는 허다하기까지 했으니, 행운의 여신은 늘 내 곁에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마치 지금처럼.
촤악, 촤악! 얇은 종잇장이 랜돌프 공작의 손에 속절없이 찢겨 나갔다. 곧바로, 넝마가 된 종이 뭉치가 눈발이라도 된 듯 허공을 흩날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 문제의 클로엔이라고?’
헤죽헤죽 웃음이 났다. 어이가 없어 나오는 실소이기도 했고, 기쁨의 포효이기도 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그뿐인가? 보아하니 돈도 많은 것 같다.
‘하, 신이시여…….’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종이 뭉치들은 축포인 게 분명했다. 눈앞의 존잘남과 펼칠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축복.
남들보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운이 좋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퇴근 후, 노답 사장을 씹어 대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오늘의 인간상 1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나에게 저런 미남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 그것도 모자라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는 사이라니 이건 분명 특혜이고 축복이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들은 둘쯤 낳고, 딸도 하나 있으면 좋겠어.’
저기 언저리에 있을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도 모르게 두 뺨이 붉어지고 코 평수가 넓어지던 그 순간.
[당신은 날 믿었어야지.]
웹툰 속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예리한 장검을 든 채, 텅 빈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던 남자가 그리 말했다.
날 믿었어야 했다고.
갑자기 이게 왜 떠오른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동물적인 촉이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 않냐며 속삭이고 있었다.
아는 것 같은데 모르는 것 같은 걸쩍지근한 기분. 화장실을 갔는데 뒤를 안 닦고 온 듯한 찝찝하고 요상한 느낌.
삽시간, 심각해졌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의 표정에 랜돌프 공작의 눈썹이 미묘하게 씰룩였다.
“클로엔 랜돌프.”
랜돌프 공작이 한음, 한음 곱씹으며 이름을 읊었다.
흩어지는 시선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떨리는 공작의 적안이 오롯이 한곳을 향했다.
“똑똑히 들어. 한 번 더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때는 나도 뒷일을 장담할 수 없을 거야.”
나직한 경고에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랜돌프 공작이 낮게 으르렁거리곤 재빨리 방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거참 되게 사납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만.”
긴장이 풀리니 절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참, 닫힌 문을 응시했다. 잠잠한 걸 보아 모두 간 모양이다.
“휴…….”
마른 숨을 내쉬곤 방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 앞으로 갔다.
풍성한 백금발 파마머리와 커다란 눈, 그 안에서 신비롭게 반짝이는 라벤더색 눈동자, 작지만 오뚝한 콧대와 불그스름한 입술.
존잘남의 부인답게 정말 말도 안 되게 예쁜 얼굴이었다. 사고로 생긴 상처들 덕에 여기저기 반창고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우월한 미모를 가릴 방법은 없었다.
떨어지는 현실감에 뺨을 후려쳐 보기도 하고 볼을 꼬집어 보자 놀랍게도 아팠다.
고로, 꿈이 아니란 말.
“아니, 근데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나도 뭘 알아야 대응이라는 걸 하지.”
심란한 마음에 늘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헝클였다.
‘막상 존잘남의 부인이 되기는 했다만…….’
랜돌프라는 성만 알 뿐. 그의 이름조차도 몰랐다. 하물며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근데 말이야, 아무리 봐도 이상해. 낯설지가 않단 말이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출입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괜, 괜찮으세요, 부인? 공작님께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다드리라 해서요.”
어느새 곁으로 온 시녀가 쭈뼛거리며 말을 붙였다. 얼굴을 보니 조금 전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그 아이였다.
‘그래, 어쩌면…….’
눈이 마주치자, 시녀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 그쪽은 여기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죠? 이름이 뭐죠?”
“네?! 샤샤, 샤샤잖아요! 부인께서 랜돌프 가문의 사람이 되실 때 저도 함께 왔잖아요……!”
일순 클로엔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지피지기 백전불패.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위기도 기회가 된다. 현 상황에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나름의 길이 있을 거다. 예컨대 눈앞의 시녀, 샤샤라던지?
“왜, 왜 그런 얼굴로 저를…….”
샐쭉 미소 짓는 나를 보며 시녀가 뒷걸음질 쳤다. 의심을 피하고자, 나는 재빨리 아련한 표정과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설마 공작님께서 부인께 손찌검이라도 하신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볼이 발갛더라니! 공작님께서 충분히 화가 나실 일이기는 했지만, 부인께 어떻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러기에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이신 거예요. 다른 날도 아닌 결혼기념일에 이혼 서류라니. 공작님께서 부인을 아끼시기는 하지만,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아시면…….”
“아니.”
“앗! 죄송해요, 제가 또 주제도 모르고 시끄럽게 굴었죠. 주의한다고 주의했는데……. 그래도 공작님께서 무서우신 분인 건 사실인걸요. 이번에만 해도 그래요. 도망친 건 부인이신데, 애꿎은 저희는 왜 잡으시냐 이 말이죠. 전에 모시던 주인께서도 그러셨어요. 한번 눈 밖에 난 사용인들에게는 사사건건 트집에 트집을…… 귀족들은 왜들 그러나 몰라 정말.”
“…….”
“앗! 제가 또 말이 길었죠, 하하. 잠시 계시면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부인.”
말을 마친 샤샤가 재빨리 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으라고!”
냉정히 닫힌 문짝을 바라보며 나는 포효했다.
* * *
약을 가지러 간다던 샤샤는 약 대신 다른 것을 달고 들어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물론, 불안정한 샤샤의 모습은 관심 밖이었다. 오롯이 시선은 눈앞의 남자에게 꽂혔으니.
‘두 번 봐도 잘생겼어.’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랜돌프 공작을 힐끔거렸다.
“그러니까 아무런 기억도 나지를 않는다?”
랜돌프 공작이 반쯤 기대앉은 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몇 번을 되묻는 것인지 따분할 지경이었다.
“애석하게도, 정말 아무것도.”
랜돌프 공작이 작게 코웃음 치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음…….”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뒷말을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누구 몸에 들어온 건 확실한데.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뭐라 둘러대기도 애매했다. 이럴 때면, 엄마의 옛 말씀이 떠오른다.
모를 땐, 철면피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