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3화 발각
배상현이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다른 곳에 가면서 받느라고.”
자연스럽게 스탠드 뒤편에 자리 잡았다.
주변에는 학교 건물이 보여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스피커 너머로 스태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비밀 이야기도 아닌데 무슨.」
“뭔 얘기하려고 전화했어? 중요한 일이야?”
「그런 건 아니고. 어제 네가 아들 운동회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했지.」
“이제 다 끝났어. 그냥 좋았지.”
「오. 그래?」
배상현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본 시하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았다.
“엄청 열심히 하더라. 잘하는 것 같고. 아! 달리기도 했는데 발도 꽤 빠른 것 같아. 다른 애들보다 작은데 그 작은 발로 어찌나 잽싸던지.”
「오! 1등?」
“당연하지. 계주라서 다른 애들도 잘했는데 아들은 더 잘하더라.”
「이야. 기분 좋았겠네. 원래 아들이 잘하면 기분 좋잖아.」
“응.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하고.”
스태판이 전화 너머로 키득키득 웃음을 보냈다.
「나보고 전화로 아들 자랑 그만하라더니 이제 네가 하네.」
“그러게.”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사람 다 똑같지. 내가 이거 놀리려고 전화했는데.」
“겨우 이거 놀리려고 전화한 거라고? 와. 진짜.”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어?」
“뭐 놀릴 거리나 되나.”
「쑥스러워하는 말투가 다 느껴지네. 이제 내 행동이 이해돼?」
“그래도 너 정도는 아니야. 내가 언제 2시간 내내 아들 자랑으로 떠든 적 있어?”
「크흠.」
배상현은 고개를 숙이며 땅을 한 번 툭 하고 찼다.
그리고 이리저리 걷다가 말했다.
“오늘 보니까 애가 참 밝더라.”
「좋은 거네.」
“그렇지. 아들이 좋은 사람들 곁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아. 나랑 다르더라.”
투둑.
배상현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시하가 거기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배상현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땅에 떨어진 물건이 보였다.
빵이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수고했다는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 붙여 있었다.
아무래도 빵 선물을 전해 주러 온 모양이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저어.”
「어? 무슨 일이야? 누가 왔어?」
스태판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시하가 한 걸음 뒷걸음쳤다.
“미술쌤.”
“으응?”
“아들이 여기 있어요?”
배상현은 시하의 물음에 입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통화 내용을 들었나? 어디까지 들은 거지?
아니야. 영어로 말해서 별로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기대는 깨졌다.
“나 미술쌤 아들이에요?”
들었구나.
그 말에 생각이 멈췄다.
겨우 가슴을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배상현은 대체 저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아까 한 발 뒤로 물러난 것이 시하의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시혁이 나타났다.
“시하야!”
“형아!”
“미술쌤 찾았어?”
“응.”
배상현은 시혁과 눈이 마주쳤다.
시혁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시하의 손을 잡았다.
“이제 다 같이 운동장에 모인대.”
“응.”
시혁이 그렇게 말하더니 빵 봉지를 잡아서 탈탈 털었다.
“이건 형아가 줄 테니까 빨리 운동장에 먼저 가 있어.”
“응.”
시하가 배상현을 힐끗 한 번 보더니 계단을 달려서 내려갔다.
배상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폰에서 스태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알아 버렸어요. 시하가 다 들어 버렸어요. 내가 그렇다고 했어요.”
배상현은 눈을 떴다.
목소리가 너무 떨렸다.
“어떡하죠?”
“자세히 좀 말해 주세요.”
배상현은 무서웠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렇게 거절을 무서워하다니.
자신의 꼴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런데 무서워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이미 같이 추억을 그렸던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물들어 버렸는데.
자신도 붓끝에 색으로 물들어 버렸는데.
“너무 무섭습니다.”
아이가 혼란스러워하고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서.
무서웠다.
이 좋은 날의 그림에 흑색으로 엑스 자를 그어놓은 것은 아닌지.
“제가 다 망친 것 같아서.”
배상현은 한 발 앞으로 움직인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나 무섭습니다.”
시혁은 그 자리에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아버지는.”
배상현은 시혁의 얼굴을 보았다.
또렷한 눈으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걸 다 감내하고.”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절대 무너지지 않는 등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모습이 시혁의 아버지인 장혁이 보여줬던 모습이었을까?
그런 아버지를 본 아들이 지금 자신에게 말하는 걸까.
마치 이장혁이 이시혁이라는 몸에 들어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앞에 얼마나 흉한 상처가 있든 간에. 얼마나 슬픈 얼굴을 하든 간에. 나중에 커서 아버지의 앞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등을 보여주는 거예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서 아플 정도였다.
마치 말을 어깨에 새겨넣는 것 같았다.
“영웅.”
영웅이라.
“이 나이 때 아이에게 아버지라는 건 세상에서 최고의 영웅이니까요.”
배상현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렇… 습니까?”
“네. 그래요. 너무나 커 보이죠. 아버지의 등이.”
그런 아버지가 되라는 말에 배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시혁이 어깨에 손을 놓으며 싱긋 웃었다.
“그러면 돼요.”
배상현은 생각했다.
앞의 청년은 자신보다 어린데도 벌써 아버지가 되었노라고.
원래라면 그 역할은 이장혁과 자신이 해야 했다.
부끄러웠다.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했던 자신이.
“정말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다짐하듯이 말했다.
자신의 앞모습을 볼 수 있는 이시혁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
운동회가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시하는 평소와는 다르게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삼촌은 그런 시하가 신경 쓰이는지 차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폰도 보지 않은 채 나에게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모스부호 알아? 눈 깜빡일까?”
“삼촌. 제가 알겠어요?”
시하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스부호 배울래.”
“오! 그래?”
“응.”
“그럼 집에 들어가면 바로 가르쳐줄게.”
“알았어. 근데 삼촌.”
“응?”
시하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았다.
“아빠가 있었는데 돌아가셨는데. 아빠가 또 나타나면 뭐야?”
“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지금 저걸 물어볼지 몰랐다.
삼촌도 눈을 굴리다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할 말을 못 찾았다.
그야 어떤 일을 있었는지도 몰라도 저런 질문은 시하에게 대입해 봤을 때 감이 팍 올 테니까.
“삼촌이 보는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 사실 나 네 엄마야 하고.”
“어…. 그렇지.”
나는 괜히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어쩌면 시하가 이게 무슨 일인지 대충은 이해했을 거라는 느낌.
삼촌이 보는 드라마로 조기 교육이 되었나.
뭔가 웃프면서도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시하야.”
“응?”
“형아가 집에서 거기에 대해서 말해 줄게.”
“응.”
그렇게 집에 가는 시간이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길다고 느껴졌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꿀꺽.
내가 말을 해주기는 해줘야 하는데 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사실대로 말하면 될까?
시하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다.
벌써 이렇게 시하가 컸던가?
예전에는 손쉽게 알 수 있었던 그 감정들이 지금은 얽혀 버린 실타래처럼 그 안 속이 보이지 않았다.
“시하야. 어디까지 알고 있어?”
“미술쌤이 내 진짜 아빠라는 거?”
뒤에서 삼촌이 숨을 삼켰다.
이제야 확실히 뭔지 알아차린 것이지.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하자.
지금은 시하가 중요했다.
“그래서 어땠어?”
“잘 모르겠어. 왜 아빠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겠지.”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기 전에 미술쌤과 같이 살았어. 그리고 시하가 뱃속에 생겼어.”
“응.”
“그런데 미술쌤이 엄마한테 너무 큰 잘못을 해서 헤어지게 된 거야. 그리고 아빠를 만났지.”
“응.”
“그리고 시하가 태어났고 형아의 동생이 된 거야.”
시하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에 미술쌤을 외국에서 만났을 때 운 거 기억하지?”
“기억나.”
“그때 펑펑 우셨잖아.”
“울지 말라고 했어.”
“응. 시하가 그랬지. 사실 시하에게도 엄마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운 거였어. 엄마랑 헤어지고 매일매일이 미안하셨대.”
시하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술쌤 어때?”
“좋은 사람이야.”
“그래?”
“응. 근데 형아.”
“응?”
시하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럼 나 형아 동생 아니야?”
나는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그쪽으로 계속 시하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왜 이건 내가 생각 못 했을까.
나는 정말 멍청이였다.
언제나 시하는 나를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입이 떨렸다.
“형은 언제나 시하 형아야.”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은 시하가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형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괜히 눈가가 뜨거워진다.
그런 생각을 했다니.
절대 아닌데.
“지금도 형이고. 앞으로 네 형일 거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
“응. 앞으로도 계속 형으로서 네 옆에 있고 네 곁에서 같이 살 거야.”
시하가 나에게 다가와 팔을 들어 목을 감쌌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끌어안았다.
“형아가 미안해. 그 마음 몰라줘서.”
몰랐다.
친아버지가 나타난 것보다 형이 아니게 될 순간을 이렇게 걱정했다니.
시하가 거기에 관해서 마음 아파했다니.
시하가 내 목을 감은 팔이 힘이 꽉 들어갔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시하가 목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 말에 눈물이 흘렀다.
한쪽 눈에서 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진짜 다행이다.”
나는 시하를 꼭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은 시하의 형아가 되어서 너무나도 기뻐. 안 기뻤던 적이 없었어.”
“나는 형아 동생이라 좋아.”
“응. 형아도.”
나는 시하를 품에서 때서 시하의 얼굴을 보았다.
시하도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젠장.
왜 이런 마음을 처음부터 몰라 줬을까.
웃게만 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울려 버리네.
손으로 시하의 눈가를 닦아주며 볼을 매만졌다.
“시하 네 앞에서는 형이 정말 특별한 사람이 돼. 넌 모르지?”
“형아?”
시하가 옷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네가 형을 형아로 만들어줘.”
“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내 동생 해 줘서.”
“나도 시하 형아 해 줘서 고마워.”
우리는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설마 이렇게 될 줄 생각을 못 하기도 했고 시하가 이상하게 아기 때보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잘은 설명을 못 하겠다.
그때 삼촌이 말했다.
“나도 너희들 삼촌이잖아. 외국인인데. 자 고마워해!”
삼촌의 말에 시하랑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삼촌이 눈을 찌푸렸다.
“아니. 이것들이? 고마워하라니까 왜 말 안 하고 웃기만 해?”
그야 고마워하라고 한 게 너무 웃기니까.
삼촌의 입가가 풀어졌다.
“야.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대.”
괜한 삼촌의 농담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원래 저런 농담에 웃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웃음의 역치가 낮아진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안심이 되어서 무슨 말을 들어도 웃게 된 걸지도.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실없이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