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2화 교내 독서대회 (2)
각자 책을 고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부 어린이 도서라는 점이 보기는 좀 그래도 막상 읽어보면 정말 재밌다.
이게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이 책을 쓴 저자가 어른이기 때문에 어떤 교훈을 줄지 혹은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쉽게 고민했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게 재밌다고 할까.
이제는 어린이의 시선에서 볼 수 없지만 어른에 시선에서 저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자. 오늘 모두 티비를 끄고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겠습니다.”
내가 거실에서 선언하자 삼촌이 아연한 안색을 했다.
“아니. 이거 바로 시작하는 거였어?! 지금 중요한 거 하는데!”
“맨날 중요한 거 하는 거 아니까 나중에 재방송으로 봐요. 이런 건 같이하는 환경 조성이 정말 중요하단 말이에요.”
“나한테는 티비가 더 중요한데?”
“삼촌도 오랜만에 책 보세요. 이거 바보상자라서 오래 보면 바보가 돼요.”
“내가 무슨 옛날 애인 줄 알아!”
시하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형아. 바보상자가 뭐야?”
이런. 시하는 바보상자를 모르지.
옛날에는 티비를 바보상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세대 차이가 나다니.
“예전에 티비가 뚱뚱했을 때가 있거든. 그때 상자처럼 생겨서 바보상자라고 자주 그랬어.”
“지금은 안 뚱뚱해. 엄청 얇아. 바보상자인데 다이어트 성공했네?”
“응. 성공했네.”
화면이 넓어지고 얇아지긴 했지.
다이어트 성공한 티비라는 표현이 뭔가 시하 답답고 할까?
시하가 삼촌을 보았다.
“삼촌 바보상자 그만 보고 여기 스마트 책 보자.”
“바보야. 이 티비가 스마트 티비거든?”
“!!!”
“이제 티비도 똑똑해졌다는 말씀! 이제 티비 보면 똑똑해진다.”
“티비가 똑똑한 거지 삼촌이 똑똑한 건 아니잖아.”
시하의 말에 삼촌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도 맞긴 하지.
“형아 봐봐. 맨날 책 읽고 번역하니까 똑똑하잖아.”
“그건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삼촌도 번역 일하면 되잖아. 삼촌 미국인이니까.”
“나는 한국인이거든! 아니지. 나 미국인이었지.”
저기요. 삼촌? 국적 헷갈리는 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어느새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있었습니까?
삼촌이 헛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한국 드라마 사랑해요.”
“갑자기요?”
너무 사랑해서 문제가 아닐까?
“우리나라가 말이야! 어! 이제 K팝! K드라마! K영화! 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삼촌이 우리나라라고 하니까 묘하다.
삼촌에게 우리나라는 미국이잖아?
시하도 그렇게 느꼈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삼촌. 우리나라 사람이었어?”
“나는 한국이 제2의 고향이야. 반은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지.”
“그러면 K책도 좋아하겠네? 이제 이거 읽자.”
“미안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야.”
“아까는 한국 자랑 엄청 했으면서 왜 지금은 미국인이야!”
삼촌이 아주 진지한 얼굴을 했다.
“시하야. 지금까지 말 못 한 게 있어.”
“뭔데?”
“사실 삼촌은 한국말을 할 줄 알지만 한글은 읽지 못해!”
“!!!”
“시하도 이제 초등학교 가서 알지? 한국어로 말하는 것과 글자를 읽는다는 건 아주 다른 일이야.”
“!!!”
나는 삼촌의 그럴듯한 변명에 조금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책 읽는 걸 피해 가겠다고?
“거짓말!”
“진짜야. 삼촌이 미국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진짜? 삼촌 글 못 읽어?”
“응. 삼촌은 영어책이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시하는 그런 삼촌을 빤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삼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냉장고가 왜?”
“삼촌. 근데 내 학교 식단표는 어떻게 읽었어?”
“!!!”
오! 역시 이시하. 예리하다.
과연 삼촌은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시하야. 삼촌이 한국에 산 지 어언 30년이 되었지.”
“30년 아니잖아.”
“그냥 그렇다고 해.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떤 민족이야. 배달의 민족이잖아.”
“삼촌. 미국인이 배달의 민족이야?”
“크흠. 아무튼, 음식 같은 경우는 글자를 안다고. 시하도 영어 단어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음식은 잘 알고 있지?”
“응.”
“뭐 그런 거지.”
얼마나 책 읽기 싫었으면 이런 변명까지 하는 걸까?
아니면 티비를 보고 싶은 마음이 큰 걸까?
이 정도면 티비 중독 아니냐고.
시하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 고마워.”
“그럼 내가 읽어줄까?”
“아니!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리지. 삼촌은 됐으니까 시하 네가 많이 읽어.”
“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시하가 자기 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급하게 빠져나왔다.
“짜잔. 영어로 된 책!”
시하가 영어로 된 책을 내밀었다.
[knock. knock.]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영어로 된 책을 사준 적이 있었네.
물론 삼촌은 안 읽었지만.
“이거 읽고 주인공에게 편지 쓰면 되겠다!”
시하의 외통수 공격.
이거는 빠져나가기 힘들지.
이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
삼촌이 그 책을 한참 보다가.
“이거 뭐라고 쓰여 있지?”
“응? [knock. knock.]이잖아. 똑똑.”
“아! 똑똑! 근데 시하야. 사실 삼촌이 부끄러워서 말 못 한 게 있는데 사실 삼촌은 영어도 못 읽어.”
“그건 진짜 거짓말이잖아!”
그건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수지.
무슨 영어를 못 읽을 수 있겠나.
심지어 회화를 제외하고서도 시하에게 영어를 가끔 가르친 것이 삼촌이었다.
“아. 이건 아니었나.”
나는 삼촌의 어깨를 잡았다.
툭.
“삼촌. 책 읽어요. 저거 분량 얼마나 된다고. 이럴 시간에 읽었으면 벌써 주인공에게 편지까지 썼어요.”
“그건 그렇지.”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각자 책을 폈다.
생각해 보면 교내 대회에서 할 것을 왜 우리는 이렇게 열을 올리며 예습하고 있는 것일까?
아. 시하랑 함께하기로 정했으니까.
정신없어서 잊어버렸다.
***
사각사각.
편지지에 글을 쓰는 게 얼마 만일까.
예전에는 어버이날에 아버지께 편지를 쓰거나 생일날에 엽서로 작은 글귀를 적은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선물보다도 그런 편지나 엽서 받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 마음과 감정이 글에 드러나서 그럴까?
아무튼, 초등학생 이후로 연필을 오랜만에 쥐어서 뭔가 옛 추억에 잠기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편지 쓰기.
이런 주제만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형아. 다 썼어?”
“응. 다 썼지.”
“삼촌은?”
“나도 다 썼다.”
우리는 편지 쓴 걸 서로 보여주기로 했다.
먼저 내 편지부터 보았다.
“나는 주인공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 편지야.”
[철수에게.
나도 너만 한 동생이 있어. 그래서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너도 잘하는 게 있는데 엄마에게 친구랑 비교당해서 속상했겠다.
네가 얼마나 발명의 아이디어가 뛰어난지 나는 알고 있었어.
넌 발명의 천재야.
물론 내 동생도 감성의 천재니 너랑 만나면 굉장히 재밌는 게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굉장히 세련된 전기차가 나올지도 몰라.
(중략)
그런 이유로 내 동생 시하를 너에게 소개하고 싶네.
서로 어울리면 정말 재밌을 거야.]
삼촌이 보다가 편지에 손을 덮었다.
“잠깐! 이거 진짜 철수 칭찬하는 편지 맞아? 내가 봤을 때 시하 칭찬이 더 많은데?”
“무슨 소리예요.”
“철수 칭찬하면서 시하 칭찬하는 거잖아!”
“에이. 아니에요. 삼촌은 한글도 잘 못 읽는데 어떻게 알았대?”
“크흠. 그냥 대충 아는 단어 보니까 시하가 너무 많아서 알았지.”
삼촌이 잘도 빠져나간다.
아무튼, 내 편지는 철수에게 시하 소개하고 싶다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삼촌은 얼마나 잘 썼길래 그래요?”
“하하. 나는 영어로 썼어. 내가 한국어로 말해줄 테니 잘 들어.”
삼촌이 일어서서 헛기침했다.
시하가 괜히 수상하게 여겨서 삼촌의 뒤를 돌아갔다.
삼촌도 바보가 아닌지 스윽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삼촌. 한글로 썼지!”
“아닌데? 아닌데! 영어로 썼는데!”
“거짓말!”
“진짠데? 진짜면 어떡할래?”
“진짜면 진짜지. 근데 왜 숨겨.”
“비밀이니까.”
삼촌이 뒤로 돌아서니까 내 눈에는 편지지가 아주 잘 보였다.
영어로 쓰여 있었다.
“시하야. 삼촌 편지 영어로 적혀 있어.”
“정말?”
“응.”
삼촌이 쳇 하면서 나를 보았다.
“이 형제 사기단한테 또 당했네.”
“당하긴 뭘 당해요. 또 시하 놀리려고 괜히 안 보여준 거면서.”
“아니야. 내가 당한 거야.”
“그건 이제 됐으니까 편지 읽어주세요.”
“오케이. 크흠.”
삼촌이 주인공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 편지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똑똑 문을 두드리며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받은 당신 역시 편지의 행운을 베풀어야겠죠. 4일 안에 이 편지를 포함해 7명에게 보내세요.]
주인공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더니 왜 행운의 편지를 쓰십니까!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삼촌을 바라보았다.
시하는 행운의 편지를 모르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집 앞에 knock. knock. 하는 조커가 문 앞에 서 있을 겁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실지 잘 알겠죠?]
아니. 무섭잖아!
주인공에게 편지 쓰라고 했더니 무슨 살인 예고장을 날리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하가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당연히 총을 들고 빵 하고 쏘지!”
“왜?!”
“편지를 안 보냈으니까.”
“주인공 불쌍해. 괴롭히지 마.”
“시하야. 이건 엄청난 친절이야. 인생에 언제 위기가 올지 모르는데 이 편지는 친절하게 이때 위기가 온다고 알려주잖아.”
“???”
정말 저게 친절이 맞을까?
시하가 삼촌의 편지를 보더니 휙 잡아채서 뒤로 숨겼다.
삼촌이 으악! 하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그걸 왜 가져가!”
“주인공을 위해서 이 편지는 사라져야 해. 삼촌 장난에 주인공이 얼마나 떨겠어!”
시하는 자기 방에 휙 들어가더니 손을 탁탁 털고 왔다.
아무래도 편지를 숨겼나 보다.
주인공을 구한 시하였다.
삼촌 역시 아쉬워하는 말을 뱉었지만 별 미련은 없어 보였다.
이미 충분히 장난을 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 썼는데?”
삼촌의 말에 시하가 자신 있게 편지를 들었다.
“나도 읽어줄게. 잘 들어봐.”
“그래. 얼마나 잘 적었는지 보자.”
[안녕. 나는 미래에서 이 편지를 적고 있는 너 자신이야.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부터 믿게 될 거야. 잘 들어. 이제 너의 기업은 이제 세무 조사를 받을 거야.]
설마 미래에서 과거로 보내는 컨셉의 편지를 쓸 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시하의 책 제목이 ‘정직한 기업가’였지.
[너는 정직하게 일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요즘 나오는 1학년 책 중에 글감이 많은 책이었는데 잘도 골라서 읽었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 바로 조작하는 거지. 그 직원의 이름은 진범인이야.]
아무리 책이라지만 범인 이름이 진범인이면 어떡하나 싶다.
[사실 그런 큰일을 겪지만 나는 지혜롭게 행동해서 벗어났어. 너도 분명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이걸 미리 말해주는 이유는 다른 좋은 직원들이 조금만 힘들어했으면 해서 보내는 거야.]
아무래도 직원들이 자꾸 조사받으니까 힘들어한 모습이 나왔나 보다.
우리 시하는 마음씨도 착하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여기 미래에서 형아.]
시하는 형아 부분을 두 줄로 그었다.
[이시혁이라는 멋진 친구가 있거든. 나중에 너도 만났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갑자기 내가 나온다고?!
아니. 배경이 한국이기는 한데…….
마무리가 이상하지 않아?
“형아. 어때!”
그렇게 뿌듯한 표정으로 보면 형아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머리부터 쓰다듬자.
“시하야. 잘했어. 이거라면 분명 상도 받을 거야.”
“정말?!”
“응. 정말.”
분명 상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