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7화 방학 (11)
서수현의 카드는 거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카드는 반칙이기도 하고 겨우 손 하트로 과한 것 같아서 말이다.
냉정한 이시하는 볼일이 끝났는지 이제 떠난다고 서수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혀니 누나. 이제 갈게.”
“벌써? 여기 음료도 아직 안 마셨는데? 디저트도 있고.”
“근데 나는 돈 얼마 없어서 이거 사 먹으면 금방 거지 돼.”
거지 된다는 표현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건 또 어디서 배운 말일까.
맞는 말이었다.
음료 하나 디저트 하나 시키면 기껏 1만 5천 원 된 금액이 반 토막 날지도 몰랐다.
아니, 만 원이 금방 사라지겠지.
세상의 물가가 너무 비싸진 것 같았다.
아니면 만 원이라는 한정된 돈을 사용하니 절절히 느껴지는 걸 수도 있었다.
서수현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그럼 내가 50프로 할인해 줄게.”
“괜찮아. 이거 끝나고 사 먹으러 올게.”
“오늘은 안 돼? 누나가 이렇게 부탁해도 안 돼?”
“안 돼. 누나가 물구나무서도 안 돼.”
“물구나무서기까지 안 할 건데?”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일까 싶다.
이제 마무리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아직 그림을 팔 곳이 한 군데 더 남았으니까.
“수현아. 나중에 또 올게.”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올 때는 디저트 많이 사 가기예요.”
나는 케이스에 있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디저트를 손으로 주욱 그었다.
“나중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사지 뭐.”
“와. 멋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영혼이 없잖아.”
그렇게 말했다고 진짜 침을 바르고 대답한다.
“와. 멋있다.”
나는 서수현의 어이없는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섹시 했어요?”
“누가?”
“저요.”
“섹시는 모르겠고 그냥 funny는 했어.”
“이 오빠가 진짜. 또 놀리려고.”
“아니. 진짜 웃겼는데?”
“빨리 가요.”
“알겠어. 연락할게.”
“네에.”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왔다.
차를 타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이번에 갈 집은.
“형아.”
“응?”
“이건 얼마 받을까?”
“글쎄.”
“미술쌤이 좋아할까?”
“좋아할걸? 엄청 좋아하실 거야.”
“그러면 좋겠다.”
이번에 갈 집은 바로 미술 선생님의 집이다.
정말 팔 사람을 선정 잘한 것 같았다.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공략하다니.
특히 배상현 씨는 시하의 그림을 당연히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하가 준비한 그림을 파일에 꽂은 채 품에 꼬옥 안았다.
“나 이제 부자야.”
“그러게.”
1만 5천 원에서 한 만 원 정도에 더 팔면 2만 5천 원이 되니까 부자가 맞는 것 같았다.
초기 자본금은 만 원이었으나 무려 2.5배나 불렸다.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되는 성과였다.
“다 왔다.”
“응!”
“미리 온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벨 누르면 나오실 거야.”
“응!”
우리는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금방 문이 열리고 배상현 씨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시하야. 안녕.”
“미술쌤. 안녕하세요!”
“그래. 오늘 선생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네. 이거요!”
시하가 투명한 파일에 끼워져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배상현은 놀란 눈으로 그림을 보았다.
“이거 나니?”
“네. 미술쌤이에요. 캐리커처요.”
“잘 그렸구나. 이거 주려고 여기 온 거야?”
배상현이 살며시 그림을 가지려고 손을 뻗었다.
파일에 닿으려고 한 순간 시하가 슬며시 뒷걸음질 치며 그림을 뺐다.
배상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응?”
“이거 그냥은 못 줘요.”
“왜?”
배상현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시하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이걸 팔러 온 거예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려 놓고 팔러 온 당당한 사람이 여기 있다.
근데 원래 그림은 이렇게 파는 거였던가?
예전에 화가를 불러서 자화상을 그리게 하고 값을 치르지 않았나?
어찌 된 게 화가가 먼저 그리고 너 그렸으니까 사라고 강매하고 있는 건데 이게 맞나?
현대에 와서 파는 방식이 바뀌었나?
아까 서수현에게 팔 때도 느꼈지만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배상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래도 되나 보다.
“그래. 얼마니?”
“미술쌤이 마음에 드는 가격으로 주세요.”
시하가 님이 선 제시를 시전했다.
효과는 뛰어난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오렴.”
그러게.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갑 좀 찾을게.”
아무래도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판매하게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배상현이 지갑을 가져오다가 고민에 빠졌다.
“음. 잠시 나갔다 올게요.”
나는 의아하게 물어봤다.
“어디 일 있으세요?”
“아무래도 돈이 모자라서 ATM기에 갔다 와야겠어요.”
“네?”
“지갑에 만 원밖에 없어서…….”
“만 원이면 충분한데요?!”
얼마나 뽑으려고 그러시는 건데요?!
배상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건 최소 200은 호가하는 그림입니다. 제가 화가라서 객관적으로 가치를 압니다.”
“객관적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데요?!”
어느 누가 캐리커처에 200만 원을 태우는가.
아무리 내가 시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저 그림에 200은 심했다.
배상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러 은행에 카드를 만드는 건데. 현금으로 뽑을 수 있는 한도가 있으니. 아! 계좌이체 됩니까? 그거라면…. 아니지. 할부로…….”
“대체 얼마를 주려고요?!”
“한 오백은 줘야.”
“과하거든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무섭다.
아니. 서수현은 만 원에 사 갔는데 500만 원은 너무 무겁지 않나.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
그때 시하가 말했다.
“미술쌤. 혀니 누나도 그려줬는데 만 원에 팔았는데요.”
시하의 양심선언.
그래. 잘한다. 이미 가격은 어느 정도 책정되어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리 큰돈은 안 되지.
배상현이 말했다.
“혀니 누나라면 서수현 씨 말하는 겁니까?”
“네. 그때 보신 제 여자친구요.”
“그것까지 사려면 천만 원…….”
“뭔데 그거까지 사려고 하는 건데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다 사려는 부호인가.
뭐 그런 느낌이다.
이러다가 시하가 만든 그림은 나중에 다 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시하가 말했다.
“미술쌤. 만 원밖에 없으면 이거 만 원에 팔게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그림에는 제값을 받아야지.”
“몰라요. 제가 만 원에 팔 거예요. 그리고 미술쌤 저한테 피씨방도 해줬잖아요.”
오. 좋은 논리다. 이시하.
배상현씨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렇게 고민할 거리였나?
“그럼 어쩔 수 없지. 고맙다. 시하야.”
“헤헤. 네.”
왜 사는 사람이 고맙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뭐 시하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준 게 고맙다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겉으로만 보면 이상한 거 맞잖아?
왜 파는 사람이 가격을 깎으려고 하고 사는 사람이 더 비싸게 올려치기를 하는 것이지?
그림 팔기가 원래 이런 식으로 힘든 거였나?
애초에 파는 형태부터 이상했으니 사는 형태도 당연히 이상한 거였나 보다.
배상현은 파일에 끼워진 그림을 소중히 받더니 살며시 매만졌다.
“코팅해서 액자로 보관해야겠네요.”
그렇게까지요?!
“오늘 기분 엄청 좋아 보이시네요.”
“하하하. 당연하죠.”
배상현 씨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처음 보는 그런 환한 미소였다.
늘 살며시 미소 지은 것만 봤는데 마치 선물을 처음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미소였다.
그렇게 좋으실까.
괜히 가슴이 지잉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배상현 씨가 이어 말했다.
“최고입니다.”
시하가 받은 만 원을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형아. 나 부자다!”
그래. 부자네. 우리 시하.
만 원의 행복이네.
***
어느새 시간은 점심시간이 넘었다. 1시.
충분히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계란밥이 다였으니까.
“시하야. 이제 밥 먹을까?”
“응! 나 돈 많아.”
“그러게.”
나는 9천 원뿐이었다.
“집에서 먹을까? 아니면 사 먹을까?”
“형아. 사 먹자.”
“그래. 그러자. 그렇다면 싸고 맛 좋은 곳이 존재하지.”
“어디?!”
“바로 시장!”
시장이 싸다고 하는 말은 옛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싸고 맛난 것도 많았다.
물론 만 원을 쪼개서 쓰기에는 굉장히 빡빡할지도 모르겠지만.
끼익.
미리 방향을 시장으로 해뒀기 때문에 벌써 도착했다.
배가 고프니 음식이 싼 곳을 잘 찾아봐야겠다.
“들어가자.”
“응!”
시하의 손을 잡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밑반찬들이 눈에 보였다. 밥도둑들이지만 오늘은 패스하도록 하겠다.
“형아. 닭강정이야.”
“그러네.”
한 컵에 담긴 게 4천 원.
음. 비싸다. 현재 내 소지금이 9천 원이 있는데 사버리면 반 토막 나는 가격이었다.
“딴 거 볼까?”
적어도 같은 4천 원이라도 배는 부른 걸 먹고 싶었다.
역시 최고의 가격은 분식이 아니겠는가.
시장 떡볶이를 노린다.
그렇게 지나가고 있는데 가성비 갑 토스트가 눈에 보였다.
천 원.
“천 원이라고?”
종이컵에 담겨 있는 토스트 하나.
오늘 구매할 목록이 눈에 보였다.
“시하야. 토스트 먹을까?”
“응!”
“아줌마. 토스트 2개 주세요.”
“네. 알겠어요.”
금방 갓 구운 토스트를 종이컵에 넣어서 주셨다.
나는 2천 원을 내밀었다.
우리는 종이컵을 들고 토스트를 앙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식감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몰라도 굉장히 맛있었다.
“형아. 맛있어.”
“응. 형아도 맛있네. 이게 천 원이라니 진짜 싸다.”
“응. 진짜 싸다.”
이런 게 시장 오는 맛이 아니겠나.
가성비 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믿고 있었다!
케찹의 달콤새콤한 맛, 야채가 씹히는 고소한 맛, 빵의 바삭한 식감까지.
하나를 먹었는데 어느 정도 배가 차는 느낌이었다.
걸어서 길거리를 음식을 먹는 맛은 추억과 함께 특별했다.
하지만 2개는 못 먹을 것 같다.
“형아. 떡볶이!”
시하도 떡볶이를 먹고 싶은지 나를 재촉했다.
“응. 가자. 가.”
어느새 시장 떡볶이 파는 집에 왔다.
의자에 앉아서 어묵 국물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장 떡볶이를 먹으면 역시 어묵이지.
날이 쌀쌀했을 때 먹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아직 8월 말이라서 그런지 날이 더운 느낌이긴 했다.
다행히 분식집 안에 자리가 있어서 더위가 가시기는 했지만.
나는 밖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먹는 게 좋았다.
뭔가 옛날 느낌도 나고 좋지 않은가.
“형아. 엄청 싸.”
시하가 메뉴판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그래. 여기 분식도 가성비는 진짜 끝판왕인 집이다.
떡볶이 1인분 천 원. 순대도 1인분 천 원.
부추전, 김밥 역시 천 원.
가격이 싸서 그런지 학생들 몇 명도 앉아 있었다.
1시가 넘었는데 아직 점심을 해결을 못 한 학생들인 건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장님.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순대 1인분 주세요. 시하야. 라면도 먹을래?”
“아니. 나는 김밥도!”
“김밥도 하나 주세요.”
아줌마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준비해 주셨다.
음식은 금방 나왔는데 정말 맛있게 보였다.
시하가 떡볶이를 포크로 푹 찍더니 나를 건네 주었다.
“형아. 아.”
“아~!”
역시 이시하. 잘 배웠구나. 어른부터 이렇게 챙겨주다니.
누구 동생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예절 바른 우리 동생 누가 데려가려나.
물론 펙폭을 가끔 하긴 하는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나는 시하가 전해준 떡볶이를 얼른 받아먹었다.
“음. 맛있네.”
“엄청 맛있어?”
“응. 엄청 맛있어. 시하도 얼른 먹어봐.”
“응.”
그렇게 떡볶이와 순대를 정겹게 먹고 있는데 아줌마가 김밥을 썰어서 오셨다.
시하를 한 번 보더니 물어보았다.
“저기 시하라고 했니?”
“네!”
“혹시 티비에 나왔던 애 아니니?”
나는 순대를 입에 넣으려다가 잠깐 몸을 굳혔다.
설마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티비 나온 거라고 하면 설마 [토크 온 퀴즈] 프로그램을 말하는 건가?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티비 나온 적 있는데요. 거기 토크 온 퀴즈에서요.”
“어머. 역시. 어디서 봤다고 했는데. 마침 보고 있었거든.”
그걸 지금 보고 있었다고?
나는 고개를 들었는데 티비에서 토크 온 퀴즈가 방영하고 있었다.
재방송.
저기 프로가 재방송 많이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하필 오늘 우리가 떡 하니 있네?
내 얼굴이 있네?
“아줌마가 저 김유한 MC 팬이거든. 그래서 자주 틀어봐. 우와. 진짜 신기하다.”
“저도 신기해요.”
시하는 뭐가 신기하니?
알아봐 준 사람 있어서 신기한 건가?
근데 그때 학생들도 이쪽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티비에 나온 얼굴과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나는 그냥 괜히 어색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이렇게 알아보는 건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왜 하필 오늘 저게 재방송을 하냐고.
아줌마가 말했다.
“많이 먹어. 이건 서비스야.”
계란만두 1인분을 가져다주셨다.
이건 이득인데?
시하가 말했다.
“공짜는 안 되는데.”
“왜?”
“오늘 만 원으로 살아가는 게임 하는 중이라서요.”
“응? 하하하. 옛날 프로그램 생각난다.”
“으음. 그럼 저는 서비스로 그림 그려줄게요. 교환해요.”
그 말에 나는 슬쩍 계란만두의 가격을 보았다.
1,500원.
크흠. 그림 하나에 1,500원?
아. 마음의 교환이라고 생각해야지 나도 모르게 가격을 생각해 버렸다.
시하야. 형아가 미안해.
형아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인가 봐.
나는 시하에게 속으로 사과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