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6화 방학 (10)
방학의 마지막 날이 왔다.
내일부터 개학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시하는 좋을 것이다.
물론 태권도장에서 매일 만나기는 했지만 학교에서 만나는 거랑 다르지 않나.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함께 있을 수 있다.
방학 기간에는 나와 함께 많이 있었으니 다시 학교생활로 돌아가면 친구들과 많이 있게 된다.
중학교, 고등학교 등등 더 많이 말이다.
같이 있는 시간에 따라 부모에게 멀어지는 것일까. 친구들이 더 소중해지는 시간이 올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한 분이기에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형아. 오늘 방학 마지막 날이야.”
시하가 잠옷 차림으로 아침에 나에게 와서 당당하게 하는 말이 이거였다.
마치 특별한 날인 것처럼 말이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응!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형아랑 같이 놀 거야.”
“그거 좋네.”
시하가 오늘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면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시하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것뿐이니까.
“근데 시하야. 방학 숙제는 다 했어?”
“아니! 다 못 했어.”
“그래도 많이 했잖아. 잘했어.”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의 방학 숙제는 스스로 정한 거였는데 상당히 많은 양을 자랑했다.
전부 하겠다고 적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다 하기에는 방학이 그리 길지 않았다.
뭐 숙제라고 해봤자 그냥 있었던 일의 기록 같은 거였으니.
애초에 학습지도 풀고 그래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른 어머니들을 보니 공부 시간을 마련하려고 머리를 짜내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반톡방에서 봤다.
좀 더 푸는 페이지 수를 늘려나가고 싶은데 아이가 흥미를 잃을까 봐 할 수 없다는 한탄.
영어책을 많이 읽어주어서 뿌듯하다는 자랑.
우리 애는 관심이 없고 놀기만 한다는 걱정.
그냥 알아서 하겠죠, 라고 하면서 지켜보는 마음.
겨우 방학인데도 이렇게 다양한 톡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교육이라는 것이 정말 가지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시하가 진짜 알아서 하는 애라서 놔둔 것이었다.
숙제가 아니라 하나의 놀이라고 인식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형아.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만큼 할 거야.”
“으음. 다음에는 방학 때 시하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자.”
“내가 하고 싶은 거?”
“응. 시하가 재밌게 할 수 있는 거. 즐길 수 있는 거. 그런 것들.”
“우음. 나는 형아랑 노는 게 제일 재밌는데?”
“푸흡. 그럼 형아가 시하가 재밌어할 만한 거 생각해봐야겠네.”
“형아랑 누워 있어도 재밌어!”
“정말?”
“응!”
나는 조금 감동이었다.
누워만 있어도 재밌다니.
내가 정말 잘 놀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좋아해 주니 정말 몸들 바를 모르겠다.
“오늘 그럼 누워만 있을까?”
“아니.”
누워만 있어도 재밌다며!
아무래도 정말 누워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
“어떤 거?”
“오늘 만 원의 행복 게임을 하는 거야.”
“만 원의 행복?”
“형아 어릴 때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어. 만 원 가지고 생활하기.”
“만 원! 그러면 집에만 있으면 만 원 안 쓰고 남겠다.”
“아니. 집에서 먹는 것도 음식값을 계산할 거야.”
“!!!”
“그런 게임이지.”
“만 원 너무 소중해.”
“응. 만 원은 소중하지. 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
“응.”
시하가 잠옷을 입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어딜 가나 따라가니 곧장 삼촌의 방에 들어갔다.
침대 위에 올라가서 삼촌을 두들겨 깨웠다.
“삼촌. 삼촌. 일어나.”
“하암. 뭔데?”
“삼촌. 삼촌. 오늘 만 원의 행복 게임 해.”
“엉? 그게 뭔데?”
“오늘 만 원만 가지고 생활하는 거야.”
“그걸 왜 해.”
삼촌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시하는 포기하지 않고 이불을 들췄다.
“삼촌. 빨리 일어나.”
“지금 7시거든?”
“일어날 때 됐잖아.”
“하암. 진짜 잠을 못 자게 하네.”
“빨리 삼촌도 하자.”
“대체 그걸 왜.”
“나 오늘 방학 마지막 날이니까.”
“그거랑 게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마지막 날이니까 나랑 놀아줘야지.”
“…….”
삼촌이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시하의 말에 동참해 주었다.
“삼촌. 오늘 같이 놀아요. 세 명이니까 각각 만 원씩 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때우는 거예요.”
“이걸 대체 왜…….”
“금전 감각도 기르고 좋잖아요.”
“그건 시하에게 좋겠지!”
그건 그렇다. 하지만 상품을 건다면?
“만약 돈을 많이 남겨서 이기는 사람에게 상품이 있다면?”
“뭔데?”
여기서 삼촌이 관심을 가진 것 같았다.
“원하는 거 하나 사주기. 사주면서 불평불만 없기!”
“오호.”
삼촌은 나에 의해 저지당한 물품들이 꽤 많다.
그중 하나를 사게 되는 것이다.
“좋아. 별로 하기 싫었는데. 오케이. 콜.”
어차피 거절했어도 강제 참가라서 선택권은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만 원을 주었다.
“오늘 쓸 수 있는 돈입니다. 물은 공짜지만 집에 있는 음식들은 가격이 있습니다. 시장가로 계산할 거예요.”
삼촌이 투덜거렸다.
“아니. 지금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만 원이 뭐야. 2만 원은 줘야지.”
“그런 거 없어요.”
시하는 만 원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팔랑팔랑 흔들기까지 했다.
“만 원이나 있다!”
금전 감각이 없는 사람의 문제점이다.
만 원으로 식사를 때우기.
물론 라면으로 3끼를 해결할 수 있지만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없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비 습관이 드러날 것이다.
먼저 나는 3끼를 계산했다.
아침, 점심은 대충 2천 원 선에서 해결하고 적어도 8천 원으로 저녁은 푸짐하게 먹는다.
나는 맛있는 건 아껴먹는 타입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기고 싶어 너무 아끼고 싶지도 않고.
“그럼 다들 아침 먹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드세요.”
삼촌이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한다.
“만 원 가지고는 치킨도 못 사 먹어!”
“시장 치킨은 가능성 있어요.”
“그거 말고! 으음. 나는 아침은 거른다! 지금부터 자러 간다.”
삼촌.
아침은 먹지 않고 자면서 버티기를 선택했다.
그럼 이시하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나는 형아랑 같은 거 먹을래!”
카피하는 걸 선택했나?
역시 이시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 아침 먹어볼까?”
“응!”
일단 밥을 펐다.
삼촌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가격이 얼마나 할지 보는 거야.”
“오늘은 계란프라이에 밥이에요. 그리고 김치 몇 조각. 가격은 천 원.”
“그렇게 싸게 측정한다고?”
“햇반 하나에 600원 정도 하니까요. 이건 밥을 만든 거니 더더욱 싸요. 그러니 계란 하나에 김치 합치면 대충 천 원.”
“흐음. 일리가 있네? 나도 먹을까?”
삼촌이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아침은 스킵이다!”
삼촌이 그렇게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뭐 안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 누워서 이불을 부스럭대며 잠을 청하겠지.
“형아. 밥에 계란이야?”
“응. 그렇지.”
식사는 금방 차렸다.
자린고비도 아니고 아침이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시하는 밥 위에 계란을 부숴서 밥이랑 비벼 먹었다.
노른자가 터져서 맛있게 보이기는 했다.
밥과 김치, 계란.
나쁘지 않은 식사지만 배는 부르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다 먹었다.”
“그러게.”
어느새 한 그릇은 싹싹 비어 있었다.
“형아. 벌써 9천 원밖에 안 남았어.”
“응.”
“카페 가면 이거 4천 원 남겠다. 아니다. 3천 원 남겠다.”
“그러게.”
“카페 비싸.”
시하가 카페가 비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원래 음료나 디저트값이 더하지. 하하.
“돈 많이 벌면 그렇게 안 비싸.”
“맞아. 지금 만 원만 있어서 그래.”
“그렇지.”
버는 만큼 소비 패턴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기호에 따라 굳이 사 먹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형아.”
“응?”
“이걸로 돈 벌면 그걸로 쓰면 되잖아.”
“???”
천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투자자 삼촌 교육의 힘인가?
그러고 보니 옛날에 프로그램도 이런 방법을 써먹기도 했다.
아니면 스스로 식재료를 캐오거나 말이다.
나는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으며 시하에게 물었다.
“뭐로 벌 건데?”
“종이랑 색연필 사서 그림 그려주는 거야. 연필같이 생긴 색연필.”
“아. 캐리커처?”
“응!”
근데 지금 아직 여름이 지나갔다고 말하기에는 더운 날씨였다.
누가 밖에서 캐리커처 해달라고 하겠나.
나는 그 대답에 조금 부정적이기는 했다.
“형아. 빨리 사러 나가자.”
“어? 어. 그래.”
일단 나는 시하를 데리고 색연필과 종이를 샀다.
4천 원이 빠져나갔다.
시하에게 남은 돈은 5천 원.
근데 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장사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림 그리고 사달라고 할 건데.”
“응? 캐리커처 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캐리커처 할 거야.”
“???”
나는 내가 생각하는 캐리커처랑 다른 건가 싶었다.
시하는 내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색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순식간에 선이 완성돼 간다.
이건 태블릿에 그리는 것처럼 지울 수가 없었다.
얼굴형. 긴 머리카락을 보니 여성이다.
예쁜 눈과 입이 그려졌다.
나는 그걸 보며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서수현이었다. 시하는 서수현을 그리고 있었다.
‘미리 그려두고 사달라고 하려는 거구나.’
이건 강매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시하를 좋아하는 서수현이라면 살 수밖에 없었다.
크흑. 지인 찬스라니.
판매 타겟팅을 잘 잡았다.
시하가 몸도 그리고 옷도 그렸다.
서수현의 트레이드 마크인 개구리가 머리에 핀으로 그려져 있었다.
카페에서 입는 옷이 순식간에 색감이 더해진다.
입술은 빨갛고 볼은 분홍빛이다.
색이 더해지면서 귀엽게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다 했다!”
“와. 대박.”
“또 하나 더 그려야지.”
“누구?”
“비밀이야!”
시하가 검지를 들어서 쉿 하는 포즈를 보였다.
이렇게 대놓고 그리는 걸 보여주는데 비밀이 의미가 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시하와 내가 카페에 등장했다.
서수현은 그런 우리를 보며 싱긋 웃음을 보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뭐 마실래?”
“혀니 누나. 나는 돈 없어서 못 마셔.”
“응? 시하 돈 없어? 누나가 사줄까?”
“아니. 그러면 오늘 게임에서 반칙이야. 시하 돈 빠져나가.”
“게임?”
서수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오늘 만 원의 행복 게임을 하고 있거든. 만원으로 생활해야 해.”
“아. 그거요. 되게 오랜만에 듣는다. 그러면 오늘 사 먹지도 못하는데 왜 카페 왔어요.”
“시하가 너한테 팔 게 있다고 해서.”
“오!”
서수현이 시하를 보았다.
시하가 품에서 그림을 짜잔 하고 꺼냈다.
“우와. 이거 나네?”
“응. 이거 내가 그린 건데 누나한테 팔게.”
“오. 대박. 얼마야?”
“누나가 마음에 드는 가격으로 줘.”
“어엇.”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는지 서수현이 고민을 했다.
시하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꽤 고단수다.
얼마를 줘야 할지 아주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적게 주면 뭔가 평가 절하 하는 것 같고 너무 많이 주면 그것 역시 과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심지어 시하가 그린 그림의 퀄리티도 좋았다.
“좋아. 만 원의 행복이니까 만 원 줄게.”
“우와!”
시하는 다 가진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서수현이 웃으며 그림을 받고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시하에게 넘겨주었다.
이시하. 현재 소지금 1만 5천 원.
현재 1위였다.
“오빠는 뭐 팔 것 없어요?”
서수현이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내가 현재 소지금 9천 원으로 뭔가를 준비했어야 했나?
서수현이 지갑을 내밀었다.
“제가 사드릴게요!”
“으음.”
나는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말한들 준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살며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손가락 하트를 꺼냈다.
“이걸로 안 될까?”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귓가가 뜨거워졌다.
“오빠…….”
역시 이건 좀 아니었나?
“카드로 줘도 돼요?”
서수현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걸로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