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3화 방학 (7)
방학은 뭔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느낌과는 다르게 시하에게는 굉장히 짧은가 보다.
시하가 달력을 들고 나에게 보여주었다.
X 표시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는데 개학 날에는 예쁜 꽃이 그려져 있었다.
“형아! 이제 방학이 얼마 안 남았어!”
“그러게. 언제 이렇게 지나갔대?”
“큰일 났어!”
“왜? 좀 더 방학 즐기고 싶어?”
“응!”
시하도 이제 학생이 다 됐나 보다.
방학을 신나게 즐기고 싶은 것을 보니.
“그래도 학교 가면 친구들 만나고 좋잖아.”
“그건 그래!”
쉬고는 싶은데 친구들이랑 만나서 좋다.
참으로 모순적인 마음이다.
공부하기는 싫고 친구들과는 만나고 싶은 게 보통 아이들의 마음이겠지.
물론 시하는 공부를 싫어하냐고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런 것치고는 시하가 방학 숙제를 많이 하니까.’
스스로 정한 거였으니 자업자득인 면이 있긴 했다.
그래도 즐겁게 했으니 다행이 아닐까.
시하만큼 방학 숙제를 한 아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아이의 숙제를 본 건 아니긴 했지만.
시하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형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더 열심히 놀아야 해.”
“그렇구나.”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놀았는데 여기서 더 열심히 놀아야 한다고?
그렇게 놀면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고 놀까?”
“나는 오늘 카페 갈 거야.”
“응?”
“원래 카페에서 공부하는 거래.”
“누가 그래?”
“다른 사람 다 봤어.”
아무래도 카페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봤나 보다.
하긴 가끔 저렇게 카페에서 공부하기도 하지.
스터디 카페가 따로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시하가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뭐 하나 싶어서 봤는데 수학 학습지와 필통을 가방에 챙겼다.
“나 카페 갈래. 혀니 누나한테 가자. 형아도 공부할 거 챙겨.”
“오늘 열심히 놀기로 한 거 아니야?”
“오늘 할 일은 하고 놀 거야.”
“그래. 그럼 카페로 가자.”
“응!”
시하가 가방을 메고 삼촌에게 달려갔다.
“삼촌. 삼촌도 가자.”
카페에 이렇게 가족이 우르르 가야 하는 건가?
삼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나는 왜? 나는 갈 필요 없잖아?”
“아니야. 삼촌도 가야지.”
“난 공부 안 해도 돼. 저기 시혁이처럼 일도 없어.”
“아. 삼촌. 백수지.”
“그래! 난 백수라서 안 가도 돼.”
“내가 커피 사줄게. 빨리 와.”
“돈 없어서 안 가는 게 아니야!”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늘 카페 갈 수 있는 거야?
시하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삼촌. 이럴 때는 같이 가는 거야. 못 이기는 척 가야 한다고 했어.”
“대체 누가? 누가 그래?”
“삼촌. 내가 잡아줄 때 빨리 일어서.”
삼촌이 황당하다는 듯 시하를 보았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드라마에서 다 배웠어.”
“너 지금 내 잘못이라고 하는 거지?”
“아~ 삼촌. 빨리!”
시하가 삼촌의 몸을 흔들었다.
삼촌이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디저트도 사주냐.”
“응! 내가 사줄게. 삼촌 돈도 못 벌고 있는데 돈 버는 내가 사줘야지.”
“너 이제 돈 얼마 안 들어오잖아.”
“내가 다시 임티 만들어서 올릴 거야.”
“방학 숙제하느라 바쁜데 무슨.”
“페페 시리즈 다시 낼 거야.”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드디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면 돼?”
그만 출발 좀 하자.
이러다가 시간 다 보내겠다.
***
카페에 도착했다.
서수현이 열심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익숙하지 않았다.
이렇게 반지를 오래 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서수현도 반가워서 손을 흔든다.
자신과 같이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커플링을 자주 보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아, 뭐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서수현의 들뜬 목소리.
거기에 담긴 감정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시하가 카페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네.”
“정말요? 와. 시하야. 벌써 카페에서 공부하는 거야?”
“응! 혀니 누나 있는 곳에서 공부할 거야.”
“장하네. 정말.”
“형아랑 같이할 거야. 형아. 빨리 저기로 가자.”
“먼저 커피를 주문해야지.”
“그거 내가 주문해 줄게. 삼촌이랑 형아는 빨리 앉아.”
“정말?”
“응!”
아무래도 커피를 주문하고 싶은가 보다.
일단 삼촌과 나는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형아는 자몽에이드.”
“형아는 자몽에이드. 삼촌은?”
“나는 치즈케이크에 아몬드 쿠키 하나. 그리고 뜨거운 아메리카노.”
“알았어. 내가 빨리 주문하고 올게.”
시하가 서수현에게 다가갔다.
서수현이 웃으며 시하를 보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주문하려고 오는 모습이 괜히 너무 귀여웠다.
“주문하시겠어요?”
“응!”
“네. 주문받겠습니다.”
“일단 형아는 자몽에이드. 그리고 나는 초코. 어. 삼촌은.”
시하가 삼촌의 주문을 떠올렸다.
뭐라고 했지?
“치즈 케이크.”
“네. 치즈 케이크.”
“음!”
그때 매장에서 암온더 넥스트! 하면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 아몬드 넥스트!”
서수현은 저게 대체 무슨 말인지 하다가 대충 알아들었다.
“아몬드 쿠키 말이구나.”
“응!”
“또 없나요?”
시하는 뭘 안 했지 하다가 밖을 쳐다보았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카페는 시원하고 밖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시하는 문득 떠올랐다.
“그거!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에.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음? 뭐라고?”
세상에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어딨단 말인가.
서수현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아요?”
“응!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어.”
서수현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삼촌을 떠올려보았다. 시하에게 언제나 장난을 치는 삼촌.
이 주문 역시 장난의 일환인 것 같았다. 아니. 또 분명 삼촌이 시하를 놀리려고 한 말일 게 분명했다.
괜히 시하에게 없는 메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한가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주는 수밖에.
시하가 말을 더 이어 붙였다.
“혀니 누나. 삼촌이 그걸로 환자해.”
“환자 하면 큰일이지. 환장이겠지.”
“아. 환장의 조합할 때 환장.”
“그건 환상의 조합이야. 시하야.”
근데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니까 환장의 조합이 맞긴 하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계산은.”
“이걸로!”
시하가 자기 지갑을 내밀었다.
서수현이 웃으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갔다.
뭔가 시하와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현금 영수증 해드릴까요?”
“아니!”
“네. 여기 거스름돈이요. 시하가 주문 다 했네.”
“응!”
“여기 진동벨 받고 가 있으세요.”
“응!”
시하가 진동벨을 받고 자리로 돌아갔다.
형아와 삼촌에게 주문 잘했다고 자랑을 했다.
“형아. 형아. 주문 다 했어.”
“정말 잘했어.”
“삼촌. 삼촌 먹고 싶은 거 다 시켰어.”
“그래. 근데 이게 끝이 아니야. 다 먹고 나중에 더 시킬 거야.”
“삼촌 돼지야.”
“돼지라니! 내가 얼마나 몸을 많이 움직이는데!”
시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삼촌. 집에서 완전 나무거든. 움직이지를 않아.”
“네가 못 본 것뿐이지 삼촌 진짜 많이 움직인다.”
“거짓말.”
“이래 봬도 삼촌이 집에서 제일 바빠.”
“거짓말.”
“진짠데? 내가 어! 빨래도 하고 옷도 말리고 다 하지.”
“그거 기계가 다 하던데.”
“크흠. 그래도 넣는 건 사람이 한다.”
시하가 삼촌을 지긋이 보다가 가방에서 숙제를 꺼냈다.
“나 숙제할 거니까 방해하지 마.”
“방해는 무슨. 나도 숙제할 거다.”
“삼촌은 무슨 숙제 있어?”
“밀린 너튜브 봐야 해. 구독해 놓고 깜빡했어.”
“그게 무슨 숙제야.”
“나한테 이게 숙제야.”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삼촌이 정말 저래도 되나 싶었다.
아이들 교육에 정말 좋은 존재인가.
아무리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어도 그렇지.
사실상 누가 보면 꿈에 그리던 모습이 아니던가.
시하가 필통을 꺼내서 연필을 들었다.
학습지를 펴서 숙제를 했다.
아무래도 삼촌이 저러는 걸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음. 다들 마이페이스인 사람들만 모여 있구만.
“시하야. 모르는 거 있으면 형아에게 물어봐.”
“응!”
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노트북을 꺼내서 작업을 시작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갈래.”
시하가 진동벨을 잡았다.
나는 곤란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하 혼자 못 들고 와.”
“아니야. 나 할 수 있는데. 나 8살인데.”
8살이면 카페 음료 가져올 수 있는 나이였던가.
“그럼 같이 가자.”
“응!”
같이 가면 오케이인가 보다.
어차피 쟁반은 한 개라 나만 들고 오면 되는 거니까.
“여기 다 나왔습니다.”
“고마워.”
“헤헤. 오빠. 이건 여친 서비스.”
서수현이 초코 쿠키를 가리켰다.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나중에 남친 서비스 줘야겠는데? 데리러 올게.”
“와. 그럼 나 기다린다?”
“기다리기 전에 도착해 있지.”
나는 살며시 웃으며 쟁반을 들었다.
그때 시하가 말했다.
“나도 같이 기다릴래.”
서수현이 그런 시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이야. 두 사람이 기다려주면 기분 엄청 좋겠는걸?”
“응!”
나는 서수현이 이렇게 잘 받아주니 고마웠다.
그건 그렇고 뭔가 이상한 게 있어서 손가락으로 음료 하나를 가리켰다.
“근데 이건 뭐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에 얼음 3개가 동동 띄워져 있었다.
서수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
“시하가 그렇게 주문하던데?”
“???”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는 순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쟁반을 들고 책상 위에 놓았다.
“삼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어요.”
“???”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시켰는데?”
“그냥 드세요.”
삼촌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가 수현이한테 잘못한 게 있어?”
나는 그 말에 풉 하고 터졌다.
설마 그런 걸 신경 쓸 줄 몰랐다.
하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 위에 얼음이 떠 있으니 그럴 만하지.
그때 시하가 말했다.
“삼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잖아.”
시하의 말에 삼촌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너 때문이었냐!”
“왜?”
“아니.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시켰거든?”
“아니야. 삼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잖아. 삼촌 저거 환장의 조합이잖아.”
“그래. 진짜 환장의 조합이다. 환장.”
“아. 이거 환상의 조합이래.”
“대체 우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저 대화가 혼란스럽다.
뭐 어찌 되었든 이 더운 여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 게 잘못 아니겠나.
“대충 마셔요.”
자몽에이드를 마셨다.
상큼함과 시원함이 목 안으로 넘어갔다.
살며시 초코 쿠키를 떼어서 입안에 넣었다.
달콤함이 가득 퍼졌다.
삼촌이 불만 어린 얼굴을 했다.
“그래. 너만 아니면 된다는 거지?”
“너무 뜨겁지 않겠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 거지?
***
방학이 끝나 갈수록 초조해지는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배상현도 뭔가 좀 초조해졌다.
저번에 시하랑 놀러 간 건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어느 정도 친해진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가 없었다.
이런 일로 괜히 초조해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시하가 학교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나면 자신과의 시간은 그저 미술 수업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시하가 방학이라는 여유로운 시간일 때 좀 더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대체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자신이 가진 거라고는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함께 놀 수 있지 않을까?
‘게임 같은 것도 같이하면 좋아한다고 했지?’
배상현은 친구의 조언을 떠올렸다.
요즘 아이들이 하는 게임.
문제는 그런 게임을 잘 모른다는 것에 있었다.
“요즘 게임이라.”
배상현은 검색창에 ‘초딩 게임’이라고 쳤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정보량에 펜과 노트를 들고 기록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하와 게임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를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