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화 방학 (5)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들이 한 방에 모여 있단 점이다.
삼촌이 재밌는 놀이를 가르쳐준다고 해서 다들 이렇게 모였다.
아, 물론 승준 엄마와 교수님은 빼고 말이다.
두 분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현재 여기 있는 인원은 총 7명.
나, 삼촌, 서수현, 배상현, 승준, 하나, 시하.
배상현 씨는 오늘 신나게 아이들이랑 놀아주느라 기가 빨렸는지 저녁 먹고 나서도 피곤해 보였다.
분명 낮잠을 잤는데도 저런 모습이니 아마 같이 놀지 못할 것 같았다.
“좀 쉬세요.”
“하하. 그래도 될까요.”
“네.”
여행을 가도 사람 성향 차이가 많이 난다.
신나게 시간 스케줄을 잡고 빡빡하게 이것저것 다 돌아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저 여유롭게 걷다가 즐기며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배상현 씨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겠지.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느긋하게 보는 쪽.
그런데 이런 텐션 높은 아이들이랑 함께 있으니 얼마나 기가 빨렸겠나.
나야 익숙하니까 재밌게 노는 거고.
“그럼 저는 구경만 하고 있을게요.”
게임은 안 하더라도 쉬면서 구경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침대 위에 풀썩 앉는다.
나와 아이들은 원형으로 바닥에 앉았다.
삼촌이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주머니에 카드를 꺼냈다.
아이들의 얼굴을 빙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할 게임은 바로 도둑잡기야!”
나는 뭔가 대단한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
도둑잡기라니.
승준이 말했다.
“에이. 도둑잡기 말고 그냥 술래잡기하지.”
그렇게 뛰어놀고도 아직 체력이 넘치는 승준이었다.
아, 낮잠 자서 회복한 건가?
옆에 있는 하나가 승준의 얼굴을 꾸욱 밀었다.
“오빠. 도둑잡기 재밌어.”
“우욱. 이 손 뭐야.”
“오빠가 반대하니까 밀어버린 거지.”
승준이 하나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뜨려서 몸을 꾸욱 눌렀다.
“햄버거다. 시하야. 어서 올라타.”
“알았어.”
갑자기 시작된 햄버거 놀이.
시하가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그 위에 몸을 겹쳤다.
포옥.
“형아. 빨리 위에.”
“아니. 형은 무거워서 안 돼.”
곤란해하는 나를 대신에 삼촌이 나섰다.
“그럼 내가 해야지. 하하하. 간다!”
꾸욱.
무거운 무게에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으아아악!”
“깔려 죽겠어!”
삼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팔에 힘주고 있어서 그 정도는 아니거든? 이것들이 연기하네.”
시하가 삼촌에게 깔린 채 바둥거리며 말했다.
“삼촌 1톤이야.”
“야. 1톤이면 너희 셋은 숨도 못 쉬고 있어.”
우리 시하 1톤이라는 단어도 알아? 똑똑하네.
“삼촌. 근데 1톤이 얼마야?”
“너. 그것도 모르면서 썼어?”
“어디서 들었어. 엄청 무거운 거잖아. 100킬로보다 더.”
“그건 그렇지.”
그래도 100kg은 알아서 다행이다.
역시 수학을 배운 보람이 있다.
뭐가 더 크고 무거운지 잘 구분하는 것 같았다.
숫자의 개념이 확실하군.
이것도 시하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드는 생각이니 참으로 아이들은 신기한 것 같았다.
어릴 때 나도 이런 개념을 조금씩 배우고 알았구나 싶기도 했다.
“삼촌. 이제 비켜.”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햄버거가 끝나고 다시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다들 도둑잡기 알지? 같은 숫자 내면 되고 조커 있는 사람이 지는 거야. 막상 해 보면 또 이게 재밌을걸?”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6명이니 8장씩 돌아가고 나머지 조커는 한 사람에게 1장 돌아간다.
도둑잡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게임이지.
내 오른쪽에 있던 시하가 살며시 속삭였다.
“형아. 뭐 있어?”
“시하야. 그걸 알려주면 안 되지.”
“나한테만 비밀로 알려줘.”
삼촌이 손을 척 들더니 시하를 제지했다.
“어허. 어디서 처음부터 장난질이야.”
“삼촌. 나는 형아랑 늘 한 팀이니까 괜찮아.”
“안 돼. 이건 개인전이야.”
“칫.”
그때 내 왼쪽에 있던 서수현이 속삭였다.
“오빠.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제가 다 줄게요.”
“너는 또 왜 그래.”
“그냥 시하랑 그렇게 하는 거 보고 괜히 저도 하고 싶어서요.”
서수현이 살며시 웃었다.
그러니까 시하가 부러워서 너도 했다는 거지?
삼촌이 우리를 보았다.
“어허. 거기도 연애 방송 끄시고.”
시작부터 다사다난하다.
이 게임 시작이나 할 수 있으려나.
삼촌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럼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부터 할게.”
삼촌이 시하를 보았다.
시하가 눈을 부릅뜨며 카드를 자기 코 가까이에 했다.
혹시 조커라도 있는 건가?
“시하야. 얼굴에 그렇게 붙이면 못 뽑잖아.”
“삼촌. 그러면 패스해.”
“도둑잡기에 패스가 어딨어.”
“그럼 내가 좀 떨어지게 해 줄게. 이거 내가 양보한 거야.”
“이건 양보가 아니라 강매 같은 느낌 아니야?”
삼촌이 고민하다가 시하의 카드를 쥐었다.
그때 시하가 카드를 쏙 자기 품으로 가져갔다.
“잠깐만. 다시 섞고.”
“아니. 뭔. 그런 게 어딨어.”
“아직 안 뽑았잖아.”
시하가 카드를 허리 뒤로 돌려서 슥슥 섞었다.
“이제 됐다. 삼촌.”
“너 조커 들고 있었지?”
“아니야.”
“그럼 대체 왜 섞는데? 섞을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렇다.
조커가 있지 않다면 저런 행동을 안 했을 테니까.
근데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이렇게 티를 내다니. 아직 어리구나, 이시하.
시하가 말했다.
“뭔가 삼촌이 좋은 거 뽑을 것 같아서 그랬어.”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 딱 보니 조커 있네.”
삼촌이 신중하게 카드를 보았다.
혹시 모를 조커를 뽑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긴장감.
혹시 조커를 뽑아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도둑잡기의 포인트였다.
“이거다.”
삼촌이 숫자를 뽑았다.
그리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카드를 스윽 넣었다.
나는 그사이에 은근슬쩍 시하의 카드를 보았다.
‘음. 진짜 조커가 없네?’
둘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사투를 벌인 거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내 차례!”
“그래. 시하야. 뽑아.”
내 손에 있는 건 카드 4장.
비밀스러운 도움을 줘야겠다.
시하가 필요한 카드를 옮기기.
“으잉?”
시하가 어느 손을 가든 카드 한 장이 슬금슬금 따라가고 있었다.
“형아. 이게 뭐야.”
“하하하.”
“이거 뽑아?”
“응.”
시하가 카드를 뽑았다.
역시 이시하. 형아를 믿어주는구나.
같은 카드가 나와서 시하가 카드를 내었다.
삼촌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건 반칙이야.”
“무슨 소리예요. 증거가 있어요?”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게임이 다시 진행됐다.
이번에 내가 서수현의 카드를 뽑을 차례.
“오빠. 필요한 거 있어요?”
그 말에 삼촌이 타임을 외쳤다.
“타임! 이건 대놓고 짜고 치는 거잖아.”
나도 순순히 인정했다.
이건 너무 심했어.
“뽑을게.”
논란을 잠식시키기 위해서 카드를 뽑았다.
아쉽게도 같은 카드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은 서수현.
승준의 카드를 뽑았는데.
“아하하하! 하하하!”
승준이 너무 웃어서 조커가 누구의 손에 가버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도둑잡기에 도둑이 누군지 벌써 알게 되었는데?
하나도 눈치챘는지 이렇게 말했다.
“앗! 수현이 언니가 조커 들고 있어?”
이로써 전부 알게 되었다.
뭐 이런 것도 도둑잡기의 묘미 아니겠나.
아이들이랑 하면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
“자. 자. 이제 빨리 진행하자.”
아이들이 카드를 뽑았다.
한 바퀴를 돌고 조커가 내 손에 떨어졌다.
다시 두 바퀴를 도니 시하가 조커를 뽑았다.
그때 충격받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살짝 만졌다.
도둑이 아닌 사람들이 생겨나며 결국 시하랑 삼촌만 남았다.
두둥!
결국 최고의 대결이 시작됐다.
“흠.”
삼촌이 눈을 부릅뜨며 오른쪽 카드와 왼쪽 카드를 번갈아 가며 손을 왔다 갔다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도둑잡기의 최고 하이라이트의 순간.
보는 사람도 괜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거다! 아악!”
삼촌이 뽑은 것은 조커였다.
이제 시하가 뭘 뽑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된다.
삼촌이 카드를 등 뒤에 숨기더니 열심히 섞었다.
역시 카드를 섞을 때는 등 뒤에서 섞어 줘야지.
삼촌은 카드를 보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탁 하고 놓았다.
“나도 조커가 어딨는지 몰라. 하하하.”
손에 있든 바닥에 있든 어찌 되었든 확률의 게임.
50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이다.
솔직히 나는 삼촌이 조커를 뽑았을 때부터 시하의 승리를 확신했다.
왜냐면.
“이거!”
시하는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아싸! 맞았다!”
시하가 같은 모양의 카드를 앞에 툭 하고 내었다.
다른 아이들이 그런 시하의 승리를 보면서 웃었다.
“시하 삼촌 도둑이다.”
“시하 삼촌 도둑이야.”
시하가 승리한 것보다 삼촌이 도둑 된 게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나 싶었다.
그래도 이렇게 즐겁게 게임을 해주니 고맙네.
승준이 말했다.
“한 판 더 하자. 한 판 더.”
술래잡기 같은 거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막상 도둑잡기 하니까 재밌나 보다.
큰일이다. 이제 게임의 재미를 느껴버렸으니 게임 무한의 굴레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슬쩍 일어섰다.
“나는 주스라도 사 올게. 수현아 같이 갈래?”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서수현이 허둥지둥하며 일어섰다.
그때 시하가 말했다.
“형아. 나도 갈래.”
“시하는 여기서 친구들이랑 게임하고 있어.”
“우웅.”
그때 승준이 말했다.
“그럼 나도 갈래!”
“하나도!”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삼촌을 향해 도움의 요청을 했다.
삼촌이 히죽 웃었다.
“그럼 다 같이 갈까?”
저 장난기 가득한 얼굴.
나중에 등짝 한 대 꼭 때리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 같이 음료를 사러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를 한 번 노려봐야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나는 슬쩍 서수현에게 속삭였다.
“나중에 둘이 빠져나가자.”
서수현이 대답 대신 손을 꼬옥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손을 잡는 힘에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
아이들을 삼촌과 배상현 씨에게 맡기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수현과 둘이서 호텔의 작은 산책로를 걸었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밖은 시원하지 않아도 밤이라서 그런지 꽤 괜찮았다.
손을 맞닿으면 땀이 나는데도 놓지 않고 있었다.
“조금 더운 것 같은데 바에 갈래.”
“좋아요.”
우리는 호텔에 있는 바에 들렸다.
천장이 높고 분위기 있는 주황색 조명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인테리어도 세련됐고 바텐더 뒤에 진열돼 있는 술과 유리잔이 멋들어지게 배치돼 있었다.
사실 바에 자주 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인테리어 정도는 훌륭하다는 건 안다.
“와. 예쁘다.”
옆에서 서수현이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에 정말 잘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예쁘네.”
조명에 눈동자가 빛나는 것 같았다.
그 눈이 너무 예뻤다.
내가 서수현의 눈을 빤히 보고 있자 서수현이 얼굴을 돌려서 붉혔다.
“설마 제가 예쁘다고 말하는 거 아니죠? 으아악. 내가 말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요.”
서수현이 자신의 얼굴을 부채질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며 테이블로 걸었다.
“맞는데?”
“으악. 오글거려.”
“눈이 반짝거려서 엄청 예뻤어.”
“으아악.”
“하하하.”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다.
손가락이 오므라들기 전에 일단 뭐라도 시켜야겠다.
괜찮은 칵테일을 추천받고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여기 분위기 너무 좋다.”
“네. 오랜만에 마실 맛이 나겠는데요? 오빠도 술 오랜만이죠?”
“그렇지.”
술 마실 일이 거의 없다.
집에서 뒹구는 삼촌도 몸 생각해서 잘 마시지도 않았고 시하도 돌보고 일하느라고 좀 바빴으니까.
서수현을 만날 때는 차를 끌고 가니 더더욱 마시기는 그랬고.
이렇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여건이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카테일이 왔다.
서수현과 나는 잔을 들어 건배했다.
쨍.
칵테일의 향을 코에서 훅 나오며 목과 위가 살짝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맛있네?”
“여기 분위기만큼 잘하는 것 같아요.”
“그렇네. 정말.”
우리는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항상 고마워. 여기 여행도 같이 가고.”
“에이. 뭘요. 제가 오빠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알면서 만나는 건데요.”
“다 알아도. 다 알아도 그렇잖아.”
“저는 좋은데요. 이렇게 술도 같이 마시고.”
“나도 좋아.”
나는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이거 선물.”
“이거 뭐예요?”
“열어봐.”
작은 상자를 서수현이 열었다.
거기에는 반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커플링.”
서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너무 바빠서 이런 거 못 했잖아. 진작 같이해야 했었는데.”
나는 반지를 뽑아서 서수현의 손에 끼워 주었다.
나 역시도 손에 반지를 끼웠다.
서수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이걸로 완전 티 내고 다녀야겠다.”
나는 그 말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그렇게 사귀고 있다는 티가 많이 나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티를 내는 건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와.”
그래도 저렇게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도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잠깐이지만 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