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9화 방학 (3)
서수현은 오랜만에 침대 위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시혁과 데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 맞추기가 늘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 잠깐 만나서 이야기하며 헤어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들떴다.
이상하게 만남이 적을수록 아쉬움도 많이 남아서 애틋하달까?
그래도 어디 날 잡아서 여행 한번 같이 다녀보고 싶었다.
‘하루 묵고…….’
서수현은 그 뒤까지 생각했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침대의 베개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성인이니까 이런 생각 할 수도 있잖아!’
퍽퍽.
누구한테 하는 변명인지도 모른 채 애꿎은 베개만 혼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폰에 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시혁이었다.
‘밀당이 중요하댔어.’
서수현은 자신만 늘 당기고 밀어내지 못해 친구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가끔 밀당이 중요하다고 조언을 들었다.
이번에는 통화음을 길게 가져보자.
1초. 2초. 3초.
아, 근데 오빠가 왜 빨리 안 받느냐고 실망했으면 어쩌지? 물론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이 식었다고 할 수 있잖아?
4초. 5초.
아, 안 되겠어!
서수현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오빠?”
「응. 통화돼?」
“완전요.”
「하하하.」
밀당은 어디 가고 즉답하는 자신이 있다.
‘나 아무래도 오빠 많이 좋아하나 봐.’
안 그러면 이런 대답이 튀어나올 리가 없으니까.
전화 기다렸다는 듯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지 않은가.
‘내가 밀당은 무슨.’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기회가 있을 때 받아야지.
서수현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때 시혁이 말했다.
「혹시 같이 워터파크 갈래? 온천도 있고 호텔도 같이 있대.」
우당당탕.
서수현은 너무 놀라서 손에서 폰을 놓쳤다.
하필 책상 밑에 떨어져서 줍다가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아야.”
「저기 수현아. 괜찮아?」
서수현은 너무 놀라서 가슴을 진정시키며 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괜찮아요. 폰을 떨어뜨려서.”
「조심하지.」
“그, 그런데 설마 자고 오는 거예요?”
「응. 자고 와야지. 온천까지 즐기면 노곤할 테니까.」
“헙.”
서수현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시현아…. 수혁아…. 아. 이건 너무 갔네.’
잠깐 미래의 아이들을 만나고 온 서수현이 정신을 차렸다.
같이 여행가고 싶다는 망상이 현실로 실현되어 버리니 정신이 굉장히 혼미했다.
그래. 현실. 현실이니까 당연히 시하도 같이 가겠지. 오빠가 시하 놔두고 갈 일은 없잖아.
“시하랑 여름방학인 워터파크 가자는 말이죠?”
「응. 이번에 놀러 갈 거거든. 삼촌이랑 시하. 그리고 아마 승준이랑 하나? 가족도 같이 갈 것 같아.」
역시 그렇겠죠.
잠깐 좋은 꿈을 꿨습니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시혁이 이렇게 권해준 건 조금이라도 자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좋아요. 저도 같이 갈래요.”
「그래?」
“네. 저도 시하랑 함께 놀고 싶어요.”
「나는?」
“네?”
갑작스러운 시혁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랑은?」
“당, 당연히 오빠랑 함께 있고 싶죠.”
「나도 그래.」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해요!
서수현은 의자에 앉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채 눈을 돌렸다.
「그런데 방은 어떻게 잡을까?」
“3인 1실 하면 되지 않을까요?”
「보니까 4인도 있는데 싱글 2개에 킹사이즈 1개. 혹시 괜찮으면 같이 쓸래? 불편하면 따로 쓰고. 하긴 너 불편하겠다. 삼촌도 있으니까.」
“으음. 따로 쓸게요.”
「알았어. 그럼 따로.」
솔직히 킹사이즈에서 시혁과 함께 눕는 걸 꿈꿨지만 보나마나 시하가 시혁이랑 함께 잘 거기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조금 기대가 됐다.
「나중에 시간 내서 둘이서 한잔하자. 호텔 아래에 바도 있대.」
“네. 좋아요.”
은근 많이 기대가 됐다.
전화 한 통으로 서수현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 버렸다.
「그럼 나중에 봐.」
“네. 그래요.”
통화가 끝났다.
서수현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베개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뒹굴거리다가 천장을 보며 오늘 했던 통화를 생각해 봤다.
“근데 오빠… 가 밀당 잘하는 것 같아…….”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뭐 의도하지 않은 거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시혁의 말에 감정이 잘 흔들리는 문제도 있었다.
“아, 몰라.”
서수현은 그저 베개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
시간이 흘러 방학이 됐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주의를 주며 방학을 잘 보내라고 했다.
물론 방학 때 학교 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여름방학은 시작됐고 시하랑 함께 여행 갈 날이 찾아왔다.
바로 워터파크 가는 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여름이라는 걸 알리듯 더위가 찾아와 땀을 나게 했다.
솔직히 여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퍼지게 해서 일에 집중하기 힘드니까.
카페나 이런 곳에서 시원하게 일을 한다고 해도 괜히 힘이 빠지게 되는 게 여름이었다.
한국은 습하고 더우니까 더더욱 찝찝한 느낌이다.
“시하야. 썬크림 발라야지.”
“응.”
이런 여름에는 특히 썬크림을 잘 발라야 한다.
“오늘 워터파크 가는 거 안 잊었지?”
“응! 나 벌써 짐도 다 쌌어.”
“짐은 그렇게 많이 필요 없을 텐데?”
기껏해야 수영복과 잠옷과 속옷을 챙기는 정도일 텐데.
“나는 패드도 챙겨야지.”
“거기서 그림 그리게?”
“응. 방학 숙제해야지. 그림 좋은 거 그릴 거야.”
“우와. 대단하네. 우리 시하.”
놀러 가는데도 방학 숙제를 하다니.
근데 실컷 놀고 나면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 삼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야. 무슨 거기까지 가서 방학 숙제를 하냐. 그냥 놔두고 와. 밤새워 놀건대 무슨 숙제.”
“삼촌. 조금이라도 그리면 한 거거든.”
“그럴 거면 놔두고 와. 괜히 가방만 무거워진다니까.”
“아니야. 이거 가벼워.”
“그거 가방에 넣어 다니면 무거워진다.”
“아니야. 괜찮아.”
시하는 괜찮다면서 등에 멘 가방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지금이야 괜찮지. 어휴.”
“삼촌 어차피 차 타고 가잖아. 호텔에 가방 둘 거고.”
“그건 그렇지. 마음대로 해라.”
뭐 짐을 적게 들고 가는 게 편하긴 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정리하기도 편하고 말이다.
그래도 시하는 늘 여행을 갈 때면 패드를 빼놓지 않고 들고 갔기에 별말을 안 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에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출발해요. 가면서 수현이도 픽업해야 하니까.”
“혀니 누나도 같이 타?”
“응. 같이 타. 아. 맞다. 그리고 미술 선생님도 오늘 오기로 했어.”
“우와. 재밌겠다.”
시하가 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4인 룸에서 잠도 같이 잘 생각이다.
먼저 서수현에게 권하긴 했지만 삼촌 때문에 불편해서 거절당했다. 이게 맞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배상현 씨도 같은 방 쓰는 건 거절했는데 내가 밀어붙였다.
안 그래도 친해지려면 노력이 필요한데 거리라도 가까우면 더 친해질 수 있을 테니까.
시하가 즐겁게 놀기를 바라는 한편 배상현 씨와 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친해진다는 게 사람 마음대로 하루 만에 되는 게 아니겠지만 이렇게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많이 가까워질 것이다.
“그럼 출발.”
우리는 차를 타고 출발했다.
중간에 서수현도 차에 태워서 워터파크로 향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서 그럴까?
가는 길이 괜히 들떴다.
“혀니 누나. 노래 틀까?”
“응? 노래?”
서수현과 시하는 뒷좌석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시하는 요새 무슨 노래 좋아해?”
“나는 형아 듣는 거 다 좋아하는데. 요새 형아가 혀니 누나 부른 노래 다 들어.”
“어? 어? 그래?”
서수현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솔직히 속으로 좀 놀랐다.
시하가 설마 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낼 줄 몰랐으니까.
괜히 뒷좌석을 힐끗 보게 된다.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심장에서부터 핸들을 잡은 손끝까지 뻗어왔다.
서수현이 말한다.
“얼마나 자주 들어?”
“맨날. 차에서 잘 들어. 아침에 등교할 때도 듣고 나중에 차 타고 어디 갈 때도 듣고.”
시하야. 그만해. 형아 운전 좀 하자.
괜히 손가락이 말리는 기분이었다.
조수석에 있던 삼촌이 휘파람을 불었다.
“시혁아. 여름이라서 너무 덥다.”
“그러게요. 에어컨 좀 세게 틀까요?”
“이거, 이거. 에어컨으로 해결 안 되겠는데?”
삼촌이 히죽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뭐 옛날이라면 이렇게 당해 주겠는데 지금은 너무 커서 그냥은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차 세울 데가.”
“차는 왜?”
“삼촌 걸어서 워터파크 갈 수 있죠?”
“야. 잘못했다. 좀 봐주라.”
“택시 불러서 오세요.”
“내가 잘못했다니까.”
“한 번만 봐줍니다.”
“노래나 듣자. 노래. 내가 요즘 기가 막힌 노래가 있거든.”
삼촌이 폰을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수현이 그 음악에 반응했다.
“어? 그거 드라마 OST 아니에요?”
“하하하. 듣다 보니까 좋더라고.”
“정말요. 저도 좋아해요. 드라마 OST로 정말 좋은 곡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몰입도 잘되고.”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시하였다.
“삼촌. 또 드라마야?”
“왜. 곡은 좋잖아.”
“곡은 좋은데 삼촌이 하도 드라마 봐서 좀 지겨워.”
“너는 맨날 같은 곡 실컷 불렀으면서 이 정도 듣고 뭘 지겨워.”
“삼촌. 이 정도면 드라마 그만 보고 차라리 찍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고감독님한테 말해 주까?”
“아니. 그 사람은 영화감독이잖아.”
“삼촌. 원래 감독님이 다른 감독님하고 친하잖아.”
“똑똑한데?”
서수현이 그런 시끌벅적한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뭐 그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워터파크에 도착해 있었다.
“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미리 잡아놓은 호텔 숙소에 짐을 내렸다.
폰으로 배상현 씨가 언제 도착하는지 톡을 보내 두었는데 금방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승준과 하나도 지금 도착했다고 하니까 워터파크에서 보면 되겠지.
그냥 잠깐 둘러봤는데 젊은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 워터파크이니까 사실 젊은 사람들이 놀기에는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어른들을 위한 시설이 없는 게 아니니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오셨어요?”
“네. 제가 많이 늦었나요?”
“아니요. 저희도 체크인하고 이제 왔어요.”
배상현 씨가 도착했다.
“시하야. 안녕.”
“미술쌤. 안녕하세요.”
“하하. 그래.”
“오늘 재밌게 놀아요. 저 그리고 패드도 들고 왔어요. 그림도 그릴 거예요.”
“그래? 그림도 그린다는 말이지?”
“네!”
어찌 된 게 워터파크에서 논다는 것보다 그림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지 모르겠다.
저기 시하 친아버지분? 지금은 워터파크에 집중해서 놀아줄 때거든요?!
나는 슬며시 걱정이 됐다.
살금살금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오늘 잘 놀아주실 수 있죠?”
“그럼요. 제가 다 조사를 해봤습니다.”
“조사요?”
무슨 놀아주는데 조사까지나 하나.
뭔가 좀 불안한데?
배상현 씨가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여기에 미리 한번 와서 관찰했습니다.”
“네?”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른 부모님들이 어떻게 놀아주는지. 종일 그런 걸 봤습니다.”
“그렇게까지요?”
“아무래도 미술을 하는 사람이면 관찰을 잘할 수밖에 없으니 오래 있어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오래 있던 걸 말한 게 아니라 설마 미리 사전답사까지 할 줄 몰랐어요.”
“저도 노력해야죠.”
이렇게까지 노력할 줄 몰랐는데.
뭔가 어설프긴 해도 시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응원하게 된다.
“오늘 기대되네요.”
“네. 제가 애들을 물에서 던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네? 물에 왜 던져요?”
“그. 다른 아버지들이 그러던데요?”
“그러면 위험하죠.”
“아. 어쩐지. 아내분에게 어깨를 찰싹 맞긴 하던데. 그것 때문이었나?”
“그냥 평범하게 물장구로 놀아주면 돼요.”
물어보길 잘했다.
등짝 맞을 일은 미리 차단해야지.
뭐 종일 보셨다고 했으니 그런 아버지도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애들은 좋아하던데…….”
“위험하니까 안 돼요.”
당연히 스릴을 즐기는 애들은 좋아하지…….
어쨌든 위험한 건 차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