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2화 카네이션
집으로 돌아와서 승준과 하나를 사진으로 찍은 것들을 승준 엄마에게 보냈다.
너무 귀엽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못 가게 돼서 아쉬움을 토로했었는데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승준이와 하나는 그래도 내가 와서 아쉬움이 덜했을까?
시하는 부모님이 오지 않았지만 괜찮았을까?
언제나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어딘가 육아에 익숙해진 것 같다.
물론 시하는 내 동생이지만 말이다.
“아. 맞다.”
“뭐가 맞아?”
삼촌이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소파에 누운 채 물어봤다.
“시하 사진을 시하 친아버지께 전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학교생활이 궁금해할 것 아니에요.”
“미술 시간에 시하한테 물어보겠지.”
“그거랑 제가 말하는 거랑 같나요. 그리고 사진인데요. 학교 풍경도 있고.”
“음. 확실히 시각적으로 다르긴 하지.”
“그리고 시하한테 그렇게 막 물어보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아. 그 사람 성격이 그렇지 참.”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뭐 정확히는 시하를 좀 어려워하는 거였지만.
이것저것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이랑 시하가 어떤지 말 좀 해 드리려고요. 글로 써서 보내면 되겠다.”
“뭘 또 쓰기까지 해?”
“시하는 짧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니까요.”
“???”
삼촌의 반응과 상관없이 노트북을 켰다.
한글을 켜서 글을 적었다.
[이번에 시하가 공개 수업을 했습니다.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있는데 그중 제일 친한 친구는 역시 어린이집에서 같이 다니던 아이들입니다. 승준과 하나라는 이름인데…….]
꼼꼼히 자세하게 적었다.
이런 걸 귀찮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하를 조금이라도 많이 알아야 더 다가가기 쉬울 테니.
5월은 가정의 달이니 조금이라도 시하랑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시하가 발표도 참 잘합니다. 역시 제가 보여준 게 많아서 그런 걸까요? 아이가 보고 자라는 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뭔가 적다 보니 내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네.
[어쩌면 시하는 천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뭐가 되었든 피피티 발표도 잘할 것 같고 연설 같은 것도 참 잘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런 거로 상도 타오고 그러지 않을까요?]
학급 게시판을 꾸몄던 사진도 첨부했다.
다른 반 것도 나란히 보여주었다.
지나가면서 다 찍었다.
[많은 반 중에 시하가 만든 게시판이 제일 뛰어나요. 아무래도 친아버지 씨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겠죠. 그런데 1학년 중에 우리 시하가 구상한 게시판만 퀄이 다르지 않습니까? 굉장히 창의적이에요.]
이게 적다 보니까 점점 할 말이 늘어 간다.
사진도 글에 맞게 열심히 첨부했는데 벌써 몇 쪽인지 모르겠다.
“와씨. 무슨 PPT 만들어?!”
어느새 뒤쪽으로 다가온 삼촌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뭐요. 사실 시하 이야기를 모두 쓰려면 책 한 권도 모자라다고요.
“아니. 이게 무슨. 오늘 공개 수업 하나만 들은 거 아니야? 뭐 이렇게 많아.”
“삼촌. 그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어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짠데요.”
“난 그 짧은 시간에 네가 이렇게 많은 걸 느꼈다는 게 경악스럽다. 이게 소설이야, 피피티야?”
“이거 한글 파일이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삼촌은 아직 멀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숭고한 작업인데.
시하를 알리는 건데 그냥 대충 쓸 수 없지 않은가.
“방해할 거면 저리 가세요.”
삼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주 행동하는 게 둘이 똑같네. 똑같아.”
뭐가 똑같다는 거지?
***
시하는 태권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문을 열며 허겁지겁 신발을 벗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와.”
“형아!”
시하는 시혁이 품에 포옥 안겼다.
이제는 익숙한 인사 같은 습관이었다.
“오늘 형아가 학교 와서 좋았어. 수업도 같이 듣고.”
“그래?”
“응! 나중에는 전부 같이 들어서 같이 태권도도 가고 집에 가자.”
시혁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돌렸다.
“자. 집에 왔으면 씻어야지. 오늘 태권도 갔다 와서 땀도 흘렸으니까 샤워하자. 샤워.”
“형아는?”
“형아는 나중에 하려고.”
“그럼 나도 나중에 할래.”
“아니야. 지금 하는 게 좋아.”
“그럼 형아가 씻겨줘.”
“응. 알겠어.”
시하는 신나서 옷을 벗고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이 솨아아- 하고 나왔는데 엄청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아, 차거!”
“바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데 맞으니까 그렇지.”
“근데 차가운 거 괜찮아.”
“응?”
“나는 강하니까.”
“응. 시하는 강하네. 그럼 차가운 물로 씻을까?”
“아니!”
“푸흡!”
시하는 차가운 물로 씻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물로 씻으면 감기 걸릴 수 있으니까 따뜻한 물로 씻을래.”
“그래. 그래.”
머리도 열심히 감고 몸에 비누칠도 했다.
올백 머리를 만든 뒤 거울로 자기 얼굴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형아처럼 안 되네.”
전에 형아가 머리를 올린 적 있는데 그런 스타일이 되지 않았다.
“그건 물로 하면 안 되지.”
“왁스로 해야 해?”
“일단 드라이부터 해야 해. 펌을 살짝 넣어주기도 하고.”
“형아. 나 해줘.”
“그건 다음에 미용실 갈 때 해달라고 하자. 그리고 머리에 왁스 같은 거 바르면 또 머리 감아야 하는데?”
“또 감는 거 싫은데.”
“그치?”
시하는 어쩔 수 없이 머리 세팅은 다음 미용실을 기약하기로 했다.
형아랑 똑같은 머리로 해달라고 해야지.
“형아. 다 했어.”
“응. 닦고 말리자.”
“응! 빨리 해야 해. 나 바빠.”
“뭐 하는데 바빠?”
“나 그림 그릴 거 있어.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시간 날 때 계속해야 해.”
“무슨 그림 그리는데?”
“스승의 날 카네이션.”
“응? 스승의 날 지났잖아?”
“스승의 날 때 그렸는데 다 못 그렸어.”
시하의 몸이 다 닦였다.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팬티를 입고 옷을 입었다.
시혁은 아직 궁금증이 남아 있는지 시하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담임선생님에게 줄 거야?”
“아니. 미술쌤한테. 담임쌤은 이미 친구들이랑 종이로 카네이션 접어서 줬어.”
“아, 그래?”
“응!”
시하는 패드와 펜을 꺼내서 지난 작업창을 켰다.
거기에는 한 송이의 카네이션이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었다.
다만 줄기는 초록색이 아니라 검은색인 붓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붓털 대신 꽃이 피어나 있는 모습.
거기에 한 마리의 나비가 꽃 위에 앉아 있었다.
조금 더 퀄리티를 챙기기 위해서 색을 칠했다.
붉게. 더 붉게.
꽃잎이 하나둘 늘어나며 만개한다.
색 없던 나비의 날개에 구멍이 뚫리며 여러 가지 색깔이 짜놓은 물감처럼 위에 얹힌다.
나비의 날개는 하트 모양의 팔레트가 됐다.
오로지 미술 선생님만을 위한 카네이션 그림이었다.
“다했다! 형아. 한번 봐봐. 나 다 그렸어.”
“오. 드디어 다 완성된 거야?”
“응!”
시혁이 시하의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너무나 멋지고 잘 그렸으니까. 정말 선생님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는 특별한 카네이션이었다.
“진짜 잘 그렸다. 이거 보면 미술 선생님이 좋아서 기절할지도 모르겠네.”
“정말?”
“응. 정말이지.”
“그러면 이거 이름을 뭐로 할까? 형아가 지어줘.”
“아니. 이건 시하가 지어야지.”
“아니야. 형아가 지어줘.”
시혁이 시하의 기대 어린 눈을 곤란하게 보았다.
“그냥 그림 그대로 지으면 되지 않을까?”
“어떤 거?”
붓끝에서 피어난 카네이션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 달콤해서 나비의 날개조차 팔레트가 되어버렸다.
“붓끝이 물들인 팔레트.”
시하도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는지 펜을 잡고 패드에 제목을 썼다.
그것도 붓 손잡이에 갈색 글씨로.
마치 붓에 진짜 새기듯이 말이다.
***
띵-동-
미술 선생님의 집에 왔다.
오늘 수업이 있는 날인데 오늘은 좀 특별하다.
시하가 준비한 카네이션 선물을 주는 날이니까.
물론 스승의 날이 지나긴 했지만 그게 꼭 상관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꼭 특별히 정해진 날에만 마음을 전하라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도 어버이날 카네이션은 받지 못해도 스승의 날 카네이션은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카네이션을 받는 입장이었다면 그 간격이 굉장히 묘할 것 같다.
언제까지 선생님으로 있을 수 있을까?
언제 시하에게 친아버지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아이가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대체 언제일까?
혹은 빨리 말해야 하는데 그냥 미루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이 들기도 한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과 때가 다를 것인데 그걸 맞추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네. 나가요!”
문이 열리며 배상현의 얼굴이 보였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요즘 꽤 인상이 펴져 있는 것 같았다. 우울한 느낌도 많이 옅어진 것 같았다.
“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들어와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하야. 안녕. 밥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선생님은 왜 맨날 밥 먹었냐고 물어봐요?”
“음. 그게 제일 궁금해서.”
사실은 그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나 싶다.
나는 서류 봉투를 들고 옆구리에 푹 찔러주었다.
배상현은 갑작스러운 서류 봉투에 몸을 움찔거렸다.
“이게 뭐예요?”
“비밀서류예요. 혼자만 보세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고.”
내가 심각한 얼굴로 건네자 배상현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엄청 중요한 거군요. 제 금고에 보관해 두겠습니다.”
“네. 꼭 그래 주세요.”
“알겠습니다.”
누가 보면 무슨 대외비 서류나 증거물 건네는 줄 알겠다.
사실은 그냥 내가 쓴 시하의 공개 수업 이야기일 뿐인데 말이다. 물론 사진도 첨부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걸 프린트하느라 혼났다.
물론 저 안에는 시하의 사진도 인화해 두었다.
그런 우리 둘 앞에서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아. 뭐야?”
“응? 그냥 서류야. 서류.”
“서류? 무슨 서류?”
“이건 너무 어려워서 시하가 크면 알게 될 서류야.”
물론 시하가 커서도 저 서류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우웅?”
“자. 자. 들어가자. 들어가. 아! 맞다. 시하야. 시하 너도 줄 거 있잖아.”
“아, 맞다!”
시하가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그리고 배상현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스승의 날 선물이에요.”
“응? 스승의 날 선물? 스승의 날은 지났잖니?”
“그래도 스승의 날부터 그리기 시작했어요. 너무 바빠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응. 그랬구나. 고맙다. 이거 잘 쓸게.”
“??? 잘 쓰는 게 아니라 보는 건데요?”
“응?”
아무래도 USB 선물인 줄 아셨나 보다.
사실 그림 선물인데 말이다.
USB에 담았을 뿐.
시하야. 설명이 너무 부족하잖아.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그 안에 그림 선물이 있다고 말했다.
“앗! 형아. 그거 비밀인데!”
“어? 그랬어?!”
그게 비밀이었구나. 시하는 다 계획이 있었다. 서프라이즈 계획이 말이다.
그런데 시하야. USB 안 쓰고 있었으면 못 봤을 수도 있으니 말은 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어쩔 수 없네. 형아. 시하가 한 번 봐줄게.”
“응. 그래. 고마워.”
한 번 봐주는 거로 넘어가기로 했나 보다.
삼촌이 그랬으면 봐줬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배상현이 묘한 눈길로 USB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권유했다.
“한번 열어보세요.”
“그럴까요?”
“네.”
배상현이 집에 있는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그리고 그림을 보았다.
붓끝에서 피어난 카네이션과 하트 모양 팔레트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카네이션…….”
배상현이 손에 눈가를 훔쳤다.
엄지손가락에는 눈물이 살며시 묻어나왔다.
촉촉이 젖은 엄지는 몇 번이나 눈을 닦았다.
시하의 선물이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이렇게 멋진 카네이션은 세상에서 처음 받아봅니다. 시하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림으로 감사의 선물을 한 건 시하인데 오히려 배상현이 더 감사하다고 말한다.
대체 어떤 감정일까?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쌤. 울지 마요.”
아무것도 모르는 시하는 그저 미술 선생님을 토닥일 뿐이었다.
“안 울어. 너무 기뻐서 잠깐 눈물이 난 거야.”
배상현이 그저 시하에게 살며시 미소를 보냈다.
아주 따뜻한 미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