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아, 나 귀엽지 외전-29화 (454/500)

외전 29화 등잔 밑이 어둡다 (5)

그림이 완성됐다.

시하는 무심하게 일어나서 재료를 정리하며 가방에 넣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심히 제 갈 길을 걸어갔다.

그저 우연히 피아노를 만나서 그림을 그렸으니 끝마친 지금 그저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짝짝짝 손뼉을 치며 길을 비켜서 준다.

“형아.”

다시 돌아서 내게 오는 시하를 반겼다.

수고했다고 앉아주었다.

그런데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저벅저벅.

서수현이 피아노에 앉았다.

“혀니 누나다.”

“그러네.”

달칵.

피아노 뚜껑을 연다.

시하가 우연히 피아노를 보았듯이 서수현도 우연히 길거리에서 피아노를 보았다는 컨셉이다.

물론 서수현이 본 피아노는 시하가 그린 그림이 그려진 피아노란 게 다르지만 말이다.

딴! 단!

왼손을 먼저 사용하며 피아노를 친다.

자작곡은 아니고 피아노에 맞게 클래식을 친다.

쇼팽의 즉흥환상곡.

오른손과 왼손이 어우러지며 빠르게 쳐낸다.

그리고 느려지는 왼손 구간.

자연스럽게 다른 곡으로 대체가 된다.

옆에 있는 하나가 말한다.

“나, 이거 알아. 캐논변주곡!”

하나의 말에 부응하듯이 피아노 건반 전체를 한 번 쓸어내리며 빠르게 치려는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우와!”

빠른 템포가 우리를 신나게 만든다.

아무래도 서수현이 많이 준비했나 보다.

시하가 눈을 반짝인다.

“혀니 누나 진짜 잘 친다. 신나.”

“응. 그렇게.”

“대단해.”

내가 보기에는 시하가 더 대단하다.

무려 저런 그림을 스케치도 없이 그대로 그려냈으니까.

이미 머릿속에 구상이 되어있는 걸 그린 걸까?

“그런데 시하야.”

“왜?”

“저거 다 미리 생각하고 그린 거지?”

“아니. 그냥 와서 생각했는데.”

“???”

미리 구상한 그림이 아니었나?

“그럼 저기 등잔이 왜 이렇게 많아?”

“응? 그건 말이야.”

시하가 말하려고 할 때 피아노가 끝났는지 박수가 귓가를 때렸다.

시하도 말하다 말고 손뼉을 열심히 쳤다.

물론 박수가 중요하지만 지금은 궁금증이 더 큰데 말이다.

나중에 꼭 물어봐야겠다.

“하나도 저렇게 멋지게 치고 싶어.”

그러고 보니 하나가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고 했지.

“하나도 칠 수 있는 거 치면 되지.”

“근데 수현이 언니 뒤에 치고 싶지 않아.”

어려도 저렇게 잘 친 사람 뒤에 치고 싶지 않나 보다.

하긴 좀 부담스럽긴 하겠지.

옆에서 시하가 말했다.

“그럼 하나가 노래 부르면 되지.”

“응?”

“피아노 말고 노래하면 되잖아.”

과연. 피아노 치면 비교당할 것 같으니 다른 영역의 싸움을 하면 된다는 말인 것 같다.

저기 앉아있는 서수현도 그걸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하나야. 원하는 곡 있으면 쳐줄게.”

“언니 정말?”

“응.”

하나가 곡을 말하려는데 승준이 손을 들었다.

“슛 골은 나의 친구~! 볼만 있으면야 외롭지 않네!”

“오빠. 내가 곡 말하려고 했거든.”

“빨리 안 말하니까 고민하는 동안 내가 불러줄게.”

“됐거든!”

하나가 남돌 곡을 말한다.

서수현이 반주를 만들어준다.

갑자기 재롱잔치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문화라는 게 이런 거 아니겠나.

노래도 하고 피아노도 즐기고 그림도 그리고 말이다.

“get up~ 어우어. get up~ 어우어.”

하나가 작은 몸으로 안무를 춘다.

윤동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살며시 고민하다가 노래 파트가 제대로 나오는 부분에서 끼어든다.

“머리 숙이지 마. 누구에게도 숙이지 마.”

“왜 남에게 맡겨 인생. 바득바득 기어가 찐생~”

유명한 남돌 노래다.

두 명이 함께 추니까 그럴싸한 무대가 되었다.

물론 윤동이 하나보다 뭔가 남다르긴 했다. 몸에 그루브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돌에서 보면 꼭 춤 잘 추는 애가 티가 나기 마련이니까.

그런 느낌이었다.

랩 파트가 나오는 순간 은우가 끼어든다.

[get up. get up. 전진. 버럭버럭 전시.]

[살려달라 애원하면 죽음밖에 없지.]

[비는 건 god it. 웃어주는 goddess.]

[아득바득 살아! 우린 life in hero!]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원래 랩을 좀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뭔가 잘한다는 느낌은 처음 받았다.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지니까 은우가 진짜 잘하는 거구나 싶었다.

순식간에 은우가 치고 빠지며 윤동과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다시 시작되는 노래와 춤.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면 엔딩.

열심히 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짝짝짝.

“형아. 신난다!”

술 취한 아저씨 같은 춤을 추는 시하가 무대에 난입한다.

덩실덩실.

갑자기 등장한 이시하를 보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빵 터졌다.

아까 그림 다 그리고 시크하게 떠나간 아이가 다시 나타나 이러고 있으니 웃긴 것이다.

“크흠.”

멋지게 떠나가는 마무리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뭐 시하가 즐거우면 됐다.

다른 아이들도 즐거운지 시하를 따라서 앵콜 춤을 춰줬다.

덩실덩실.

멋진 남돌 노래 뒤에 웬 막춤인가 싶지만 말이다.

시하 바이러스는 어마어마하구만.

***

문화가 있는 날은 충분히 즐겼다.

이제는 시하가 그림일기를 써야 한다.

한글을 쓰는 그림일기. 맞춤법 검사도 동시에 되는 점에서 좋은 숙제라고 생각한다.

“으음.”

시하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다.

그림일기에 그림 부분을 맡기에는 좀 과한 준비물이 아닌가?

보통 연필이나 색연필 혹은 크레파스를 쓰지 않나?

“형아. 이걸로 피아노는 그릴 수 있는데 오늘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작게는 힘들어.”

“음. 그럼 안 그리면 되지 않아?”

“안 그리면 안 돼.”

“그럼 하나만 그리는 건?”

“우웅. 호롱불 하나만 그려야겠다!”

그러면서 호롱불을 그리기 시작한다.

피아노도 아주 큼지막하게 그린다.

시하는 자기 뒷모습도 보지 않았지만 그걸 그리고 있었다.

“형아. 미술 선생님이 마음에 담는 게 중요하대.”

“응?”

“보고 마음에 담아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된다고 했어. 그래서 안 본 것도 그릴 수 있대.”

“멋진데?”

“응.”

“미술 선생님 좋아?”

“좋아.”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미술 선생님 좋아하게 되긴 했구나.

시하가 붓을 내리그으며 말했다.

“미술 배우는 거 엄청 재밌어.”

“응. 그렇지.”

나중에 입시 미술 같은 거 하면 엄청 하기 싫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같이 배워서 아는데 굉장히 뭐라고 할까?

미술학원에서 할 수 없는 비싼 재료들로 가르치기도 하고, 무엇보다 색감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수업을 한다.

이 색은 어떻게 되는지. 이 색과 이 색이 어우러지면 어떤 색이 나타나는지. 얼마나 강조되는지. 어떤 느낌을 줄 수 있는지.

붓의 터치가 빠르면 이런 느낌이고 느긋하면 이런 느낌이라든지.

솔직히 같이 배우는 나는 그냥 미술학원 다니는 게 실력을 빨리 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수업 자체는 실력이 빨리 늘게 한다는 것보다는 쓸 수 있는 무기들을 다양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가진 무기들을 쓰게 만들게 하는 수업.

굳이 말하자면 대기만성형 수업이었다.

학원 다니는 애들도 개인차로 실력이 느는 시간이 길겠지만, 이 수업은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시하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미 패드로 그림을 그려봐서 그런 건지 적용하는 게 빨랐다.

“형아. 이거 봐봐. 다 했어.”

“그렇네.”

그림 일기장치고는 너무 고퀄리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이 놀라는 거 아닌가 싶다.

아니. 일기 쓰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거 아니야?

보통이라면 30분에서 1시간이면 끝날 것 같은데.

“이제 글 써야지.”

“응!”

시하가 이제야 연필을 들었다.

그때 소파에 누워 있던 삼촌이 소리쳤다.

“이시하! 제일 중요한 거 빼먹었잖아.”

“응? 어떤 거? 여기 삼촌도 그렸는데?”

“나는 괜찮아. 하지만 카메라는 왜 안 그리는데!”

“카메라는 여기 들어갈 자리가 없어.”

“아니야. 저기 조그맣게 그리면 되지. 그거 비싼 거야. 꼭 그려야지.”

“카메라는 여기 있어. 여기 전체 네모. 사람들 찍고 있어.”

“아니지. 삼촌이 카메라에 담길 리가 없잖아. 내가 카메라맨인데.”

시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삼촌이라고 그린 뒷모습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거 삼촌 아니야.”

바로 삼촌 아니야 시전.

이제 그림에 삼촌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야! 아까는 삼촌이라며?”

“삼촌은 자기 안 그려도 상관없다며.”

“그건 카메라가 그려져 있었을 때 이야기지!”

또. 또. 쓸데없는 거로 시하랑 투덕거린다.

카메라가 뭐시 중헌가.

이제 그림은 좀 넘어가고 글자 좀 쓰자.

솔직히 이 그림 그린다고 1시간은 지난 것 같다.

숙제 좀 끝내자. 제발.

“카메라 여기 있다니까. 네모야. 네모. 찍고 있어.”

“그걸로는 카메라로 찍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 이걸 본 사람들도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아야지.”

“알았어.”

“진작 그럴 것이지.”

시하가 네모에 줄을 띡 긋더니 [카메라]라고 썼다.

“이러면 카메라인 거 알아.”

“야! 그리라고. 글자를 쓰지 말고.”

“글도 그림이야.”

“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글도 그림이라니.

어디서 그런 말을 또 들은 걸까?

아니면 지금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에이. 몰라.”

삼촌은 삐졌다는 듯이 소파에서 돌아누웠다.

등이 보였다.

“삼촌 삐졌어?”

그걸 또 굳이 물어보는 이시하.

“안 삐졌거든! 나 잘 거거든.”

“삼촌. 밥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누우면 안 돼.”

“벌써 1시간이나 지났거든?”

“벌써 그렇게 지났어?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지? 어휴. 매일 이렇게 빨리 지나가.”

“어이가 없네?”

“삼촌이랑 말하다가 1시간 지났잖아.”

“네가 그림 그린다고 지난 거거든!”

“이제 일기 써야 하니까 쉿 해. 쉿.”

시하가 검지로 입술에 댄다.

그러고는 연필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시하예요.”

일기인데 인사하는 이시하였다.

인사성이 바르다.

이건 나를 닮았구만.

“오늘 길을 지나가는데 피아노를 봤어요.”

본 게 아니라 본 척한 거 아니니?

“저 멀리 있는 피아노는 꾸며져 있었어요. 근데 내가 본 피아노는 꾸며져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앉아서 그림을 그렸어요.”

오늘 있었던 일을 적는다.

벌써 저것만 해도 아주 잘 적고 있다.

물론 맞춤법이 좀 틀리고 있지만 말이다.

“다 그렸는데 사람들이 칭찬했어요. 피아노도 기쁜지 예쁜 노래를 불렀어요.”

서수현이 친 건데 피아노가 노래를 불렀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시하는 천재인가?

아무래도 이런 부분도 나를 닮은 것 같군.

“남에게 맡겨 인생. 바둥바둥 기어가 진상.”

[왜 남에게 맡겨 인생. 바득바득 기어가 찐생~]이겠지.

가사가 이상하게 틀렸는데 의미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이런 부분은 날 닮지 않았다.

삼촌을 닮은 게 틀림없다.

“랩도 했어요. 살려달라. 웃어주는. 히어로?”

[살려달라 애원하면 죽음밖에 없지.]

[비는 건 god it. 웃어주는 goddess.]

[아득바득 살아! 우린 life in hero!]

라는 가사였다.

뭐야. 그거. 살려달라고 했는데 히어로가 웃고만 있으면 그건 빌런 아니야? 그게 히어로야? 그건 너무 무섭잖아.

피아노가 전부 부른 거로 적히게 되었는데 예쁜 노래와 다르게 섬뜩한 노래를 부른 게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아주 좋아서 박수~”

저 가사로 좋아했다면 사람들도 무섭다.

뭐야. 일기가 호러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삼촌을 닮았다. 암!

“마지막에는 나도 신나서 춤을 췄어요. 문화가 있는 날은 너무나 재밌었어요. 끝!”

마무리도 완벽하게 끝맺음을 맺었다.

이런 부분은 또 나를 닮았단 말이지. 칭찬해주자.

“우와. 시하 다 썼네?”

“응.”

“정말 잘했어.”

“정말?”

“응. 응.”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 부분은 선생님에게 맡기도록 하자.

지금 고쳐봤자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선생님이 색깔 펜으로 고쳐줘야 확 들어오는 법이니까.

“그럼 이제 씻고 자자.”

“응!”

그리고 다음 날.

서수현이 밤새 편집한 너튜브 영상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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