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아, 나 귀엽지 외전-28화 (453/500)

외전 28화 등잔 밑이 어둡다 (4)

초등학교 선생님이 오늘 숙제를 내었다.

“여러분. 오늘 숙제가 나갑니다.”

“아아~”

아이들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기본적으로 어른이든 아이든 숙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어려운 수학 문제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무도 모르나요? 하고 되물어본다.

그때 시하가 손을 들었다.

“문화가 있는 날이요!”

“오! 시하야. 맞았어. 잘 아네?”

“저는 다 알아요.”

문화가 있는 날.

서수현이 중고 피아노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 않았으면 시하도 전혀 몰랐던 날이었을 것이다.

종수가 시하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런 날도 다 알다니.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종수의 마음에 학구열을 지폈는지 모르고 시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문화를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문화의 날을 만들었어요. 영화관이나 경기장 할인도 있고요. 노래를 부르는 청춘마이크라던가 문화 놀이터라던가 여러 공연도 하고 있어요. 민간단체와 협력을 하기도 하고요.”

선생님이 문화가 있는 날을 열심히 설명했다.

오늘의 숙제는 바로 이것이다.

문화 접하기.

“수요일이 힘들면 토요일, 일요일에도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까 보고 나서 그림일기를 써보는 거예요. 알았죠?”

“네!”

“꼭 공연을 보지 않아도 뭐든 보러 가는 건 좋아요. 도서관에도 뭔가 프로그램을 하니까 무료나 할인을 하는 곳도 좋고요. 알겠죠?”

“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어요. 다들 정리하고 점심 먹으러 가요.”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점심 먹으러 갔다.

맛있는 밥을 먹고 난 뒤에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다.

승준이 시하에게 물었다.

“시하야. 너는 뭐 보러 갈 거야?”

“나는 그림 그릴 건데?”

“오! 진짜?”

“응. 피아노에 그림 그리기로 했어.”

“와! 그럼 나도 보러 가도 돼?”

“응. 돼. 와.”

“어디서 그려?”

“혀니 누나 카페 앞에서.”

“아! 거기.”

“피아노가 아팠는데 새로 나아서 엄청 반짝반짝해. 거기에 내가 그림을 그릴 거야.”

“오오오! 그럼 나는 그거 구경하러 가야겠다.”

승준과 시하의 말을 옆에서 들은 하나와 연주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종수 패밀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단체 관람 인원이 정해져 버렸다.

“그런데 언제라고?”

“수요일에. 학교 마치고 그리기로 했어.”

초등학생이 마쳐봤자 아직 해가 쨍쨍한 오후였다.

“아. 그럼 태권도 못 가겠네.”

“응. 형아가 안 가도 된대.”

“그럼 나도 엄마한테 안 간다고 해야지.”

다른 아이들도 안 간다고 선언했다.

엄마들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있지 않았을까?

***

“그러니까 다 같이 가기로 했다고?”

“응!”

시하가 해맑게 말하는 말에 살며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래. 뭐 이제는 익숙하다.

단체로 오는 게 뭐 별 대수겠는가.

그냥 또? 이러는 마음뿐이다.

초등학교까지 갔는데 새 친구는 어쩌고 아직도 그렇게 붙어 다니나 싶다.

원래 조금씩 파벌이 나뉘지 않나?

어찌 된 게 어린이집 때랑 초등학교 때랑 달라진 게 없다.

그렇게 많이 봤는데 지겹지도 않니?

“다들 부모님께는 허락을 맡았고? 아니. 부모님은 오시고?”

“응. 다 온대. 이거 숙제잖아.”

“그래. 그림일기라는 숙제지.”

이번 기회에 다 같이 가는 거로 했나 보다.

숙제도 치울 겸 말이다.

그리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구경하다가 지겨우면 앞에 카페라도 들려서 앉아 있으면 되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위치선정이 아주 좋았다.

문화도 즐길 수 있고 카페에 앉아서 볼 수도 있고.

이거까지 다 생각하고 하는 건가 싶다.

대단하네.

“단체 관람이 되어버리겠네.”

노린 건 아닌데 시작부터 이미 인파를 만들어버렸다.

어느 정도 관객이 있으면 점점 살이 붙어나가지 않나?

아무도 안 보고 있으면 서서 구경하기 좀 그럴 텐데 말이다.

이거 일이 커지는 거 아닌가?

살며시 불안해진다.

그냥 도색 업체에서 그림을 그릴 걸 그랬나?

사실 서수현이 너튜버라서 그런지 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한사코 말했다.

제목이 [미술학원 갔다가 피아노를 보아서 그림을 그렸습니다.]라는 게 영상 제목이란다.

시하도 요즘 너튜버에 관심이 있는지 하고 싶다고 한다.

아니. 너 너튜브 하고 있잖아. 그림 영상도 잘 올리고 있고.

아이들이 원하는 직업의 탑3에 드는 너튜버라서 그런지 시하도 얼굴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영상은 서수현 채널에 올린다고 하니 시하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럼 얼굴 보일 거야?”

“아니. 뒷모습만. 얼굴은 조금까지 괜찮아.”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뒷모습과 그림을 찍어달라는 거지?

엄청난 신비주의 디렉터구만.

얼굴 없는 작가인가.

뭐, 저런 영상이 인기가 얼마나 있겠나.

대충 서수현 채널에서만 좀 보고 말 것이다.

“드디어 내 카메라가 활약할 때가 왔나?”

삼촌이 카메라 렌즈를 열심히 닦으며 말한다.

저건 또 언제 가지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에 어린이집 졸업할 때도 비싼 거 들고 오시더니 이번에도 값이 꽤 나갈 것처럼 보이네요?”

“당연히 최신이지. 사람은 최신이 될 수 없지만 기계라면 언제든지 될 수 있어!”

“요즘 나이 많이 신경 쓰여요?”

“난 언제나 지금이 제일 전성기야!”

지금이 제일 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

“근데 왜 2개예요?”

“영상 찍을 거라며? 그러면 세팅이 필요하잖아. 당연히 2개여야지.”

“그날 한 번만 찍을 건데 굳이 저걸? 수현이도 갖고 있을 텐데 굳이?”

“그건 서수현 찍으라고 하고. 우리는 시하 찍을 거니까 괜찮아.”

“그래서 얼만데요?”

“자. 시하야. 어때? 이걸로 찍을 거야. 대단하지?”

삼촌이 슬쩍 말 돌린다.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데. 메이커도 딱 찍혀있고.

최신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싼 가격은 절대 아닐 게 틀림없다.

그 필요 없는 걸 2개나 사다니.

자기 돈이라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낭비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 평소에는 별로 돈 쓰시는 건 아닌데 가끔 이렇게 대책 없이 통 크게 산다.

“창고행으로 가는 거 아니죠?”

“아니! 정 안 쓰게 되면 중고로 팔지 뭐.”

“으이구.”

시하는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고 있었다.

“형아. 이거 진짜 잘 찍혀. 엄청 깨끗해.”

“그래?”

“응. 형아. 콧구멍도 보여.”

뭐 키 때문에 올려다보는 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러면 못생겨 보일 텐데.”

“아니야. 형아 잘생겼어.”

“정말?”

“응.”

시하가 카메라를 들고 삼촌을 비췄다.

삼촌이 씨익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 멋진 포즈를 취하는 것 같은데 이게 광고 찍는 것도 아니고 저럴 필요가 있나 싶다.

“나도 콧구멍 보이니까 멋있지?”

“삼촌 못생겼어.”

“야. 그거 카메라 이리 줘.”

“앗! 카메라 엄청 깨끗하게 나와. 삼촌. 카메라가 좋으니까 삼촌도 멋있게 보여.”

“쓰읍. 뭔가 욕 같은데?”

“카메라 마사지 받아서 잘생기게 나와.”

“그거 본판은 못생겼다는 말 아니야? 자꾸 역으로 멕이는 거 같은데.”

“아니야.”

시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기저기 영상을 찍었다.

카메라를 산 삼촌보다 시하가 더 좋아하고 있다.

재밌는 장난감이 생긴 거겠지.

이제는 자기 얼굴로 돌려서 영상을 찍는다.

“안녕하세요. 시하예요. 오늘은 삼촌이랑 형아를 찍었어요. 형아는 잘생겼어요. 물론 형아를 닮은 저도 잘생겼어요. 삼촌도 잘생겼어요.”

그렇게까지 말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삼촌이 못생겼는데 잘생기게 나왔다고 뻥을 쳤어요.”

“야. 이시하. 다 들었다! 가져와라.”

“큰일 났어요! 앙마삼촌이 잡으러 와요. 혹시 이 영상을 보신 여러분은 119에 신고해 주세요! 앙마삼촌 머리에 불이 나서 식혀야 해요.”

“이리 내놔라!”

삼촌이 시하에게 카메라를 뺏으러 간다.

시하는 깜짝 놀라서 거기에 도망친다.

영상은 흔들리는 배경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

문화가 있는 날. 당일.

길거리에 중고 피아노를 놓는다.

예쁘게 꾸며진 노란 피아노와 분홍 피아노.

회색의 거리에 있는 것만으로 산뜻한 느낌을 준다.

완연한 봄을 나타내듯이 꽃 그림도 그려져 있다.

카페의 한 거리.

검은색 피아노가 놓인다.

기다리던 피아노였다.

카메라는 한쪽에 2개나 세팅이 되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문득 피아노를 발견했다는 컨셉이지만 사실은 발견한 게 아니다.

물론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는가이고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피아노를 치기 전에 아이가 먼저 그림을 그린다.

그게 오늘 시하가 할 역할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그냥 그림 그리는 거라고 생각해.”

“응. 긴장 안 해. 형아. 나 영화도 찍었어.”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냥 그림만 그릴 건데.”

“응. 맞아. 그것만 하면 아무 문제 없어.”

“그럼 갈게.”

“응.”

시하가 캡이 있는 빵모자를 똑바로 썼다.

멜빵바지도 입었다.

그래서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손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안에는 그림 도구들이 들어있었다.

“갈게.”

“응. 고우!”

시하가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평일 오후지만 사람이 꽤 지나가고 있다.

다들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냥 갈 길 간다.

보통 저렇겠지.

“응? 피아노?”

시하가 주변을 둘러본다.

저 멀리에 피아노가 또 있다. 거기는 꾸며져 있는 피아노였다.

다시 검은 피아노를 본다.

아무것도 꾸며져 있지 않다.

살며시 피아노의 오른쪽 옆면으로 가더니 털썩 앉는다.

가방에서 안료와 붓을 꺼낸다.

먼저 잡은 것은 흰색.

팔레트에 덜어서 붓에 묻혀 곧바로 칠하기 시작한다.

스케치 없는 그림.

하지만 매끄러우면서도 빠르게 하나가 완성된다.

등잔이었다.

어째서 왼쪽 위에 여백을 뒀는지에 대한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시하는 빠르게 칠하기 시작했다.

마치 당연히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등잔들을 계속 여러 개 그려지는데 불규칙한 배열인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규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하가 뭘 의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지켜만 보았다.

“우와! 대박!”

“저기 봐. 애가 그림을 그리고 있어.”

“빵모자 귀엽다.”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승준이와 친구들은 진작에 왔었다.

몇몇은 카페 창을 통해서 시하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몇몇은 밖에 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구경하고 있으니 예상대로 몇몇이 점점 자리에서 서게 되었다.

“시하 진짜 잘한다.”

“시혁이 오빠. 저거 등잔이지?”

“응. 등잔이야.”

시하는 피아노 뒤에서 등잔들을 잔뜩 그렸다.

이러다 등잔이 꽉 채워지겠다.

다음은 왼쪽으로 가서 그림을 그린다.

승준과 하나는 자리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내가 막았다.

지금 사람들이 궁금해서 보고 있었는데 여기서 자리를 이탈하면 나중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후우.”

등잔을 다 끝냈는지 시하가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고른 곳은 노란색과 붉은색이다.

등잔의 불이 하나둘씩 시하의 손에서 켜지기 시작했다.

검은 배경의 피아노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

정말 똑같은 작업의 반복인데도 사람들은 등잔에 불이 다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다.

등잔이 굉장히 빽빽하게 작게 나열되어 있고.

밑에 한 줄은 또 띄워져 있어서 빽빽하면서도 여백이 있는 그림이었다.

검은색 배경은 일종의 선의 역할도 같이 겸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8살 어린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그저 등잔의 불을 그리는 작업이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호롱불이 켜지는 걸 지켜보는 건 굉장히 장관이었다.

그리고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데 어떤 물건에 가로막히는지 윤곽이 생긴다.

나도 사람들도 깨닫는다.

저건 등잔 받침대라는 걸.

호롱불이 등잔 받침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