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화 등잔 밑이 어둡다 (1)
방과 후 교실은 음악 시간도 된다.
영어 대화만 주 5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강인초 영어수업은 음악과 맞닿아 있다.
레몬 트리라는 영어 노래를 외우는 것도 그의 일종이다.
두성, 비성, 흉성 등등을 자연스럽게 쓰게 만드는 팝송이니까.
의외로 어머니들은 방과 후 수업 내용을 듣고 더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다.
막연하게 프리토킹을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오늘은 악보를 볼까요?”
선생님이 쇼팽의 곡들에 관련된 악보를 보여주었다.
물론 아이들은 악보를 볼 줄 모르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뭔지 잘 모르겠죠?”
“네!”
“도레미파솔라시도~ 이건 아시죠?”
“네!”
“그걸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이런 악보로 표기한 거예요. 그럼 이 악보가 어떤 소리가 나는지 볼까요?”
“네!”
클래식 음악이 교실에서 울려 퍼진다.
잔잔한 것보다는 좀 빠른 피아노곡을 골랐다.
이런 세세한 부분도 수업에 지장이 가기 때문에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건반이 쳐질 때마다 악보가 휙휙 지나간다.
“오늘은 이 쇼팽의 곡을 듣고 느낌이 어땠는지 영어로 표현해볼 거예요.”
쇼팽의 곡을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접하게 하면서 아이들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할 생각이다.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취미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듣는다면 좋은 재료가 될 것이다.
대중음악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음악의 변화와 파격이라는 말이 파생되는 이유는 그 기본이 되는 곡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어릴 때 기억에 남는 것이 중요하다.
나중에 아이들의 어른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창의적인 영역에 관해서는 반드시 이런 인풋이 도움이 된다.
그만큼 지금 토대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럼 이 곡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유롭게 말해 볼까요?”
침묵이 찾아왔다.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로 감상을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당연하니까.
“그럼 반장인 종수가 해볼래?”
이럴 때 반장이 지목당하기 쉽다.
종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음. very good. fast.”
“와우. good job.”
담임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 엄청난 감상평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 저 정도. 뭐라도 말하는 자신감.
언어는 무섭지 않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대화가 안 통해도 그게 뭐? 아는 것만 써도 상관없다.
“그럼 다음은 승준이 해볼까?”
“very good! fast! shooting star!”
“와. 정말 잘했어.”
슈팅스타는 왜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칭찬을 한다.
앞에 종수가 말한 걸 그대로 말해도 칭찬해 주는 게 중요했다.
같은 거 말해도 돼.
선생님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 수 있게끔 유도했다.
“Next.”
선생님은 시하를 보았지만 고개를 돌렸다.
이 수업에서 너무 잘하는 아이가 먼저 하면 뒤에 사람이 힘들어한다.
더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시켜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선생님은 애써 무시했다.
“하나.”
하나가 자신 있게 말한다.
“very good! fast! shooting star! but better k-pop!”
“와우. 대단하데?”
다음은 은우.
“푸하하. very good! fast! shooting star! but better k-pop! fantastic baby!”
다음은 재휘.
“으으. 베리굿 페스트? 음. 뭐라고 했지? 뭐라고 했는데. 다 기억 못 하는데.”
재휘가 오들오들 떨면서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이다.
선생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얘들아? 앞에 말한 걸 다 외워서 추가해서 말 안 해도 되거든?”
“정, 정말요? 앞에 애들이 다 그렇게 해서 저도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안 그래도 돼.”
앞의 사람 말을 해도 된다는 의도를 주려고 했는데 어느새 게임처럼 외우기가 되어 버렸다.
거기서 감상 하나 추가하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가만 보니 다른 아이들도 앞에 뭐라고 했는지 외우고 있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흠흠. 안 외워도 돼요. 알았죠?”
“네!”
이미 아이들이 다 외운 것 같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다음은 연주.
「재휘랑 같이 듣고 싶은 연주였어.」
연주가 싱긋 웃으며 재휘를 보았다.
재휘도 대충 알아들었는지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선생님은 속으로 외쳤다. 너희 뭐 하니?
“윤동아.”
“Let’s dance.”
안 신나는 얼굴로 말하니까 정말 춤추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이렇게 하나씩 아이들이 열심히 감상을 말했다.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아는 영어가 다 나와서 좋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하의 감상이 남았다.
「빨라서 좋고. 슈팅스타고. 케이팝이 더 낫고. 환상적이고. 재휘랑 같이 듣고 싶고.」
23명이 말한 것들을 전부 말했다.
아니. 이걸 다 외웠어?!
「저는 형아랑 같이 듣고 싶어요. 신나서 같이 춤추고 싶기도 하고요. 삼촌은 이상하게 춤출 것 같은데.」
“시하야.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근데 삼촌은 이 음악 안 좋아할 것 같아요. 드라마 본다고 빨리 끄라고 할 것 같아요.」
오늘도 TMI 이시하가 등장했다.
그거 이 음악에 대한 감상평이 맞는 거니?
“우와. 시하 잘한다!”
“영어 진짜 잘하네.”
“연주도 저 정도 할 수 있는 거 같은데.”
“막 솰라솰라 잘해.”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감상평을 내보이는 거로 보였다.
시하가 살며시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형아. 통역사야!”
우리 형아가 통역사니까 당연히 나도 영어를 잘한다는 말이었다.
“역시. 역시.”
“대단해.”
“시하 형아 진짜 대단하네.”
선생님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아이들도 시하 형아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정하게 되었다고.
수업 방향이 이게 맞아? 내가 생각한 방향이랑 다른 것 같은데?
언제나 의도는 숨은 그림자처럼 안 보이는 법이다.
***
미술 수업을 받는 날.
배상현은 준비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8살 아이랑 친해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몰라서 준비된 수업을 하는 형식이다.
그래도 준비한 수업을 좋아해 주니 그걸 위안으로 삼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상담할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배상현 : 8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죠?
-시혁 : 특별한 말을 안 해줘도 돼요. 오늘 밥은 먹었니? 간단히 안부만 말해줘도 되는걸요.
-배상현 : 정말 그거면 되는 겁니까?
-시혁 : 지금 잘하고 계세요ㅎㅎ
톡을 확인하지만 영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다.
그냥 즐겁게 인사하고 안부만 묻고 오늘 뭐 재밌는 일 있었는지 가끔 묻고.
정말 이것만으로 되는 건가?
시하만 말하고 자신은 별로 말하지 않는데?
배상현은 솔직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친한 친구에게 연락하게 되었다.
비록 문화의 차이로 좀비로 변신시킨 것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있는 아버지로서 뭔가 이야기는 할 것 아닌가.
-배상현 : 혹시 아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주로 해?
-친구 : 아들? 우리는 캐치볼도 자주 하지.
-배상현 : 운동 말고 대화 말이야.
-친구 : 쯧쯧. 캐치볼 하면서 대화하는 게 재밌어. 캐치볼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도 이야기해 주고.
-배상현 : 그래 봤자 옛날 일인데 애들이 재밌어해?
-친구 : 옛날 일이 무슨 상관이야. 재미는 달라지지 않아. 알잖아. 미술이 아무리 변화해 와도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단걸.
-배상현 : 그래. 그렇지.
배상현은 친구의 말에 깨달았다.
그래. 역시 좀비는 문화가 달랐을 뿐이다.
사람 사는 재밌는 에피소드를 말해준다면 아이가 재밌게 들을 것이다.
전에도 친구가 말했지만 애들하고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띵동-
벨이 울렸다.
배상현이 문을 열어서 시하를 반겼다.
“안녕. 시하야.”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해.”
“네!”
“시혁 씨도 잘 부탁해요.”
시혁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수업은 못 들을 것 같아요. 혹시 작업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러세요.”
시혁이 가끔 수업을 듣지 않고 이렇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둘만 있을 시간을 준다.
“형아. 또? 많이 바빠?”
“응. 형아가 돈을 벌어야 다 먹여 살리지.”
“삼촌이 일하면 되잖아.”
“삼촌은 일 안 해도 돼. 집을 제공하고 있으니까.”
“그래?”
“응.”
“그럼 나중에 돈 모자라면 시하 돈 써.”
“응. 알겠어.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니야. 등잔 밑도 두들겨봐야 한 대~”
“돌다리도 두들겨봐야 하는 거겠지. 섞였어. 섞였어.”
“아, 맞다!”
배상현은 이 대화를 유심히 보았다.
자신도 뭔가 재밌게 말하고 싶었다.
“그럼 돌다리도 어둡다는 말도 있나? 하하하!”
“???”
두 사람의 머리에 물음표가 떴다.
배상현이 눈을 내리깔면서 웃음을 멈췄다.
“미안하다.”
시혁이 그제야 웃기려고 노력한 걸 알았는지 뒤늦게 웃어 주었다.
“하하하. 정말 재밌다. 하하하.”
“형아. 저게 재밌어?”
“…….”
물론 의도와는 다르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펙폭시하가 형아에게도 발동했다.
배상현의 자신감이 한 번 떨어져 버렸다.
“그럼 수업하러 갈까?”
어렵게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네!”
시하가 밝게 대답했다.
배상현은 실패를 디딤돌 삼아 수업하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 다짐을 했다.
“오늘 수업은 검은 도화지에 스케치해볼 생각이야. 이제는 이렇게 도화지를 바꿔서 그림을 그려볼 거야. 색이 어떻게 나오는지 잘 봐.”
“네!”
언제나 배상현의 수업은 색에 관해서였다.
드로잉에 관해서는 전혀 터치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미 시하가 어느 정도 드로잉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고 못 한다고 해도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색. 색이 중요하다.
사실 드로잉 같은 경우는 노력하면 가장 빨리 익히는 기술 중 하나다.
하지만 색만은 빨리 익혀지지 않는다.
이제 와서 수능 언어나 수리 영역 한 등급이 아니라 두 등급을 올리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토익 600점에서 700점. 700점에서 800점. 이 벽을 깨는 것만큼 단계적인 상승을 기다리는 게 지난한 일이다.
그만큼 노력 대비 올리기 힘든 게 색감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 이렇게 배우고 색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게 중요했다.
시하가 미술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아도 이런 능력 자체는 귀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계통에 일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나중에 미술이 취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걸 직업을 꼭 삼는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하얀색을 이용해서 그리는 거야.”
“네! 이미 밤이네요.”
“밤이지.”
“근데 완전 밤은 아니에요.”
“음. 그렇지.”
검은색도 밝은 농도가 있으니 칠흑 같은 밤은 아니었다.
“해 볼까?”
“네!”
시하가 흰 물감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려봐야 어떤 색감인지. 다음에는 어떻게 그려서 표현할지를 안다.
배상현은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재밌는 이야기를 고민했다.
“어때? 재밌어?”
“재밌어요.”
“그래? 어떤 점이 재밌어?”
“검은색인데 흰색으로 바꾸는 거요.”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배상현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두운색을 자꾸 쓰게 돼.”
“왜요?”
“어둠의 자식들이거든.”
“?!”
“하하하.”
배상현은 어릴 때 선생님께 들은 어둠의 자식들아~ 하는 표현을 써봤다.
점심시간에 불을 꺼두고 자고 있으면 다음 수업 시간에 늘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시하에게는 공감을 살 수 없었다.
“좀비?”
“아니. 좀비는 잊어줘.”
배상현은 속으로 친구 탓을 했다.
옛날이야기 들어도 재밌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