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반장 (2)
시하가 뭔가 상장 같은 걸 들고 왔다.
오늘 반장 선거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거 기대해볼 만한가?
그런데 나갈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뭔가를 딱히 준비해준 게 없었다.
나갈 줄 알았으면 공약 같은 것도 연습시켰을 것이다.
“혹시 반장이 된 거야?”
“아니!”
“아. 아니야.”
“응!”
“그럼 부반장?!”
“아니!”
“아. 아니야?”
“응.”
나는 그럼 이게 뭔가 싶어서 임명장을 꺼내 보았다.
환경미화부장.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도 뭔가 쓸데없이 있었던 것 같다.
“미화부장은 뭘 하는 건지 알고 있어?”
“응! 환경도 깨끗이 하고 열심히 반도 예쁘게 꾸미는 거잖아.”
“잘 아네?”
“나 다 안다니까.”
“우와! 우리 시하 미화부장 된 거 축하해!”
“응! 나 3등이야. 진짜 좋아.”
“투표 3위야?”
“응!”
우리 시하는 1등이 되는 것보다 3등이 되는 게 좋은가 보다. 여전히 3을 좋아하네.
아무렴 어떤가. 분명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서 나갔을 텐데.
등 떠밀려서 반장을 하면 별로 좋지도 않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해야지.
“오늘 축하 파티라도 해야겠는데? 케이크도 사고 폭죽도 사고 노래도 틀고.”
“친구도 초대하고?”
“아니. 우리끼리만.”
재빠르게 친구 초대를 차단했다.
내가 말을 꺼내긴 했지만 친구 초대는 차원이 다르다.
옆에 있던 삼촌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뭔 미화부장 된 거로 파티를 해. 그냥 초코파이 쌓아서 축하하자.”
“삼촌! 미화부장 중요해!”
시하가 눈에 힘을 준다.
물론 미화부장은 중요하지. 반장이나 부반장이 안 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된 게 어딘가.
“미화부장이 정확하게 뭐 하는데?”
“학교 끝나면 내가 로봇청소기 돌리고 나가.”
“헐?”
로봇청소기라니.
예전에 청소시간이 있었던 그 시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책걸상 뒤로 밀어서 빗자루 들고 쓸고 닦고.
화장실에서 밀대 들고 슬슬 밀어두고.
분필지우개 들고 창문 밖에서 탁탁 털어서 가져다 놓고.
그런 추억이 있어야 학교가 아닌가.
로봇청소기라니!
“세상 많이 좋아졌네.”
삼촌의 말에 동감한다.
그래도 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을 게 분명했다.
“분필 쓰냐?”
“???”
“분필 안 써?”
“분필이 뭔데?”
삼촌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학교에 분필을 안 쓴다고? 이런 표정이었다.
“그, 그래. 요즘 화이트보드로 쓴다고 하더라. 보드마카. 그래.”
“전자칠판도 있는데.”
“뭔 칠판?”
“전자칠판.”
“???”
“이렇게 화이트보다 밀면 전자칠판 나와!”
“???”
삼촌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학교 처음 안내받았을 때 놀랐다.
전자펜으로 그림도 그리고 영상도 틀고 터치도 하고.
무슨 학교가 최첨단이다.
“내가 아는 학교랑 뭔가 아주 다른데?”
“왜?”
“으음. 혹시 뒤편에 게시판은 전자칠판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닌데. 우웅. 초록색인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 아! 그래. 그거. 그거는 최첨단이 아니구만.”
삼촌은 뭔가 안심한 듯한 표정이다.
너무나 달라져 버린 교실 풍경에 자기는 멀리 떨어져 버렸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다.
“시하야. 그럼 너 거기 꾸며야겠다.”
“응. 오늘 선생님한테 들었어.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 보래.”
“오! 너한테 딱 맞는 감투네. 다 생각했어?”
“아니. 아직!”
하긴. 오늘 임명됐는데 어떻게 꾸밀지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데 나도 도와줘야 하나? 시하가 생각하기 힘들면 같이해 줄 수도 있는데.
이런 경험이 없으니 뭘 하면 좋을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도와주거나 하면 혹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될 수 있다.
뭐 1학년이니까 자유롭게 꾸밀 수 있도록 하자.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야. 모르겠으면 친구들에게 물어봐. 알았지?”
“응!”
정답은 이거일 것이다.
어차피 친구들도 같이 보는 게시판일 건데 함께 꾸미거나 의견을 묻는 게 좋아 보였다.
원래 이런 감투는 지휘하는 것이니.
“형아.”
“응?”
“축하 파티 하자!”
“아! 그렇지. 축하 파티 해야지.”
환경미화부장이 된 축하 파티다.
그래도 뭔가 하나 일을 맡았다는 게 중요하다. 책임감도 생길 게 분명하다. 귀찮은 일도 생기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시하야.”
“응?”
“반장이 누구야?”
이제 와서 질문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만 뭐 어떤가.
시하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종수!”
이상하게도 종수의 미래가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까?
열심히 해라. 종수!
넌 1반을 컨트롤해야 하는 반장이다!
원래 반장은 중재자 역할이지.
***
1학년 반장.
사실 반장보다는 반장의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른바 1반의 대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행사에 발맞춰서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서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었다.
어찌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종수 엄마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진두지휘하고 감투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들답게 교육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다.
사실 사립학교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교육에 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머니들이 한데 모여서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종수 엄마. 종수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에이. 아니에요. 그냥 뭐 아이가 공부를 좋아하기도 하고 재밌어하기도 해서 조금 진도가 빠른 것뿐이에요.”
“와. 우리 아이도 공부를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숙제조차 관심이 없어.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그럴 때는 말이죠.”
이런 식으로 자리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어머니들 사이에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사실 강인 어린이집 어머니들이 없었으면 이렇게 편하게 있지 못했을 것이다.
엄청 불편한 체 주위를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나만 남자니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불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시하 형아분?”
옆에 있는 어머니 중 한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아. 이시혁입니다.”
“아, 네.”
“제가 형이라는 건 알고 계셨네요?”
“아. 저희 애가 시하 형아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들어서.”
이시하. 대체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기에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 부모님까지 알고 계시는 건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들었나요?”
“엄청난 통역사라고. 공부도 잘하시고 랩도 다 씹어 먹는다고 그러던데요?”
“예?”
씹어 먹기는 뭘 씹어 먹는가?
“아! 노래 잘하는 예쁜 여자친구도 있으시다고.”
“어머! 그거 나도 들었어.”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아이에게 들었다는 썰이 튀어나온다.
이시하. 대체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건가!
어떻게 모르는 아이와 어머니들이 없을 수가 있지?
나를 딱히 소개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이거야 원. 자랑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조금 자중하라고 말해야 하나?
여기서 어떤 말이 더 오갔는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 그냥 빨리 벗어나고 싶다.
조금 불편했었는데 너무나 불편해졌다. 아니, 부끄러워졌어!
“하하하. 아, 맞다. 그런데 1학년인 아이들에게 뭔가 너무 많이 시키면 안 좋을 것 같은데. 혹시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뭘까요?”
빠르게 이 화제를 넘어가자.
교육열이 있으신 분들이니 덥석 내 말을 잡았다.
“저희도 너무 많이 시키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맞아요. 그래도 애들이 싫다고 하면 안 시켜요. 좋아하니까 하는 거지.”
“종수 엄마. 종수는 컴퓨터 배우고 있다며?”
종수 엄마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종수가 열심히 타자 연습도 하고 있어요. 그 덕분인지 한글은 곧잘 쓰더라고요.”
확실히 타자 연습은 단어라던가 글자를 보고 쓰는 거긴 하니까.
받아쓰기도 쉽게 할지도 모르겠다.
“아. 그게 그렇게 도움이 되네. 우리 아이도 국어를 잘해야 할 텐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머니들 사이에는 수학이나 음악보다는 국어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정확히는 언어에 관한 것이다.
영어를 중시하지 않았으면 강인 초등학교를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게 읽기 위주가 아니라 회화 위주로 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 강인 초등학교 아닌가.
종수 엄마가 말했다.
“저도 언어적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알다시피 영어를 잘하려면 거기에 관한 이해력이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그렇죠. 그렇죠.”
“결국, 영어 지문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 말짱 꽝이니까.”
“맞아요.”
“그래서 그런데 2주에 한 번 독서 모임을 하는 건 어떨까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요.”
“오! 좋네요!”
내가 생각했을 때 취지는 좋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따라 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다 같이 책 읽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을 것 같기도 했다.
“강요는 아니니까 참가할 분만 참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좋은데요?”
종수 엄마가 나를 본다.
저요? 왜요?
“시혁 씨는 괜찮겠어요?”
“네?”
“아니. 시혁 씨는 일도 하고 바쁘니까요.”
“아. 괜찮아요. 저야 뭐 번역도 하고 이래저래 자연스럽게 읽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뭐 하면 거기서 작업해도 되고.”
어머니들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번역도 한다는 말에 꽂힌 게 틀림없다.
뭔 말을 못 하겠다.
“시혁 씨가 번역도 하시는구나.”
“대단하네요. 언어적 능력이 아주 뛰어나겠어요.”
이거 뭘 잘못 말한 것 같은데?
그냥 시간 날 때 참석한다고 말할걸.
“혹시 시하는 어떻게 교육하고 계세요? 학원 같은 것도 다녀요?”
“그냥. 친구들이랑 태권도 학원 보내고 주에 한 번 미술도 좀 배우고 그래요.”
“다른 공부는 시혁 씨가 가르쳐주고요? 영어나 독서나 뭐 그런 거는요? 우리 애한테 듣기로는 시하의 영어 발음이 좋아서 선생님께 칭찬 들었다던데.”
아, 모르겠다. 그냥 알아서 배웠다고 하자.
시하는 천재니까.
“그냥 뭐 제가 일상에서 영어를 쓰니까 시하가 따라 하는 거죠. 따로 가르친 건 없어요. 책도 제가 번역하면서 자료가 필요하니까 읽고 있으면 시하가 옆에서 같이 읽고요. 따로 뭐 더 가르치거나 이런 건 없어요.”
안 가르쳐도 시하가 알아서 배웠어요.
뭐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해 주었다.
“역시. 평소에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다 시혁 씨를 보고 시하가 배웠네요. 공부 분위기 조성도 중요하니까. 역시. 역시.”
예? 분위기 조성이요?
집에 오면 삼촌이 배를 벅벅 긁고 티비 드라마나 보고 있는 백수 분위기입니다만.
뭐 나는 나대로 시하를 보다가 중간에 시하가 딴 놀이에 빠질 때면 일도 좀 더 하고 그런다.
틈틈이 전략이라고 할까?
요즘 그럴 때면 시하가 슬쩍 와서 책을 읽으면서 일하는 척 따라 할 뿐이었다.
딱히 공부 분위기 조성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아. 저도 시혁 씨처럼 영어를 잘 써야 했는데. 아쉬워요.”
“하하하.”
평상시 영어 쓰는 것도 좀 웃긴 일이긴 했다.
시작은 정말 작은 계기였으니까.
삼촌이 시하를 놀리기 위해 영어까지 쓰니까 시하가 어떻게 알아들으려고 배운 것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이건 이렇다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영어 관련해서는 삼촌의 역할이 컸다.
뭐 대부분 놀리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다양하게 놀리면서 다양한 영어를 쓰게 되니까 도움이 된 건가?
어찌 되었든 이런 속사정까지는 말하기 좀 그렇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한 건 아니다.
일상에서도 쓴 건 맞으니까.
뭐, 아이의 공부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술은 학원에 보내는 거예요?”
“아. 그냥 개인 과외라고 할까요?”
“아하. 서양화?”
“네. 뭐. 서양화 쪽이죠.”
“역시. 벌써부터 클래식하게 배우네. 어머, 어머. 알고 보니까 시혁 씨 교육 잘하네~”
그…. 클래식하고 교양 있는 서양화 가르치려고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시하 아버지랑 친해지라고 보내는 건데요?
이것 역시 사정을 말하기 껄끄러워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여자 친구가 작곡하는 사람이니까. 어머, 어머.”
시하가 거기까지 말했군요. 네.
“음악도 자연스럽게 배우겠네? 뭐 교육 너무하는 거 안 좋다면서 다 갖춰져 있네요.”
그게. 그렇게 되나?
미술, 음악, 언어, 독서.
그러고 보니 다 갖춰져 있긴 했다.
어머니들이 나를 보며 눈을 흘겼다.
아니. 진짜. 제가 뭘 많이 시키는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요소요소를 놓고 보니 여기서 제일 많이 시키는 부모의 포지션이 되어 버렸다.
아, 억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