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초등학교 (4)
점심시간에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 집합했다.
1반, 2반이 모였는데 아쉽게도 현재 축구장은 6학년 형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지막 배식 순서라서 그런지 여유롭게 축구를 한판 하는 느낌이었다.
“으음. 아! 저기 비어 있다!”
강인 초등학교에는 풋볼장도 있었다.
큰 운동장보다는 풋볼장이 1학년이 쓰기도 좋았다.
“저기에서 하자!”
승준이 애들을 이끌었다.
손에는 오늘 학교에 가면서 준비한 축구공이 있다.
아침에 가방을 메면서 축구공 가방도 챙겼다.
승준 엄마가 한 번 말리기도 했다. 그걸 꼭 가져가야 하냐면서.
어찌 되었든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는 걸 보니 문제가 없었다.
물론 학교 체육관에 있는 공을 요청하면 사용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승준은 그걸 몰랐다.
“많이 왔네? 그럼 해볼까? 우리가 먼저 공격해도 되지?”
1반이 먼저 공을 차지하게 됐다.
“그럼 시하가 골키퍼.”
“응!”
“잠깐!”
종수가 손을 들어 막았다.
승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 진짜 시하한테 맡길 거야? 다시 생각해봐. 시하 이 녀석 은근 한 박자 늦다고. 아니지. 늦는 게 아니라 딴생각도 자주 한다고.”
좋은 인선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승준은 살짝 말문이 막혔다.
사실 골키퍼에 대해서 고민을 좀 많이 하긴 했다.
그래도 시하랑 같이 사커를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인선을 골키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내가 할까?”
“어? 윤동이 네가 해줄래?”
“어.”
승준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었다.
아는 애들의 능력치 중 운동신경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윤동이었다.
“그럼 시하는 나랑 같이 공격수 하자.”
“잠깐. 정말 그렇게 할 거야?”
“어! 그렇게 할 거야. 시하 공격수로는 괜찮아. 시혁이 형이랑 매일 같이 공 찼으니까. 그. 골키퍼는 좀 그랬지만.”
“그랬는데 시키려고 했어!”
“아, 몰라. 종수는 미드필더 해.”
“어…. 미드필더. 그래.”
종수는 미드필더가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몸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몰랐다.
“대충 해. 대충.”
승준이도 어차피 모두가 역할을 잘 수행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랑 놀 때마다 수비수가 공격수로 올라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자. 그럼 다들 어깨동무하자! 어깨동무!”
“응. 다들 모여.”
시하가 손짓했다.
종수가 또 어깨동무냐며 투덜거렸다.
강인 어린이집 출신이 아닌 아이들이 어리둥절하며 모였다.
여기서 제일 신난 건 승준이었다.
뭐가 됐든 축구를 하고 있으니까.
“자.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 하는 거다. 자. 하나, 둘, 셋! 파이팅!”
“파이팅!”
그런 1반의 모습을 보고 2반도 질 수 없는지 파이팅을 따라 외쳤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
거의 뭐 동네축구라고 해도 될 정도의 접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좀 배운 승준은 단연히 빛이 났다.
“시하야!”
“응!”
패스를 받은 이시하.
힘껏 차는 모습을 보이자 앞에 있는 아이가 움찔거린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들어 그대로 공을 가지고 제쳐 버린다.
아이가 속았다는 걸 알고 뒤쫓아 오지만 시하는 이미 앞으로 쏘다니고 있다.
그리고 패스.
승준이 공을 받지 않고 그대로 원터치로 때려 버렸다.
2반 골키퍼는 갑작스러운 슈팅에 손을 뻗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대로 골인.
“우와아아!”
“와아아아!”
승준이 혼자였으면 쉽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축구를 배운 둘이 있었기에 나온 첫 골이었다.
그것도 손쉽게 말이다.
“우와아아아!”
다른 아이들도 기뻐하며 모였다.
다들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서로 어색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같은 팀이라는 사실 하나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소속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다음 골 넣자!”
“응!”
그리고 그걸 구경하고 있는 하나와 연주.
그리고 따라온 1반 여자애 몇몇.
“오빠. 잘했어!”
“오! 하나야. 너도 와서 해.”
“싫어!”
“연주야. 너는?”
연주는 대답조차 없었다.
거절이라는 뜻이었다.
“아쉽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경기.
아이들이 신나게 공을 찼다.
골을 먹히기도 했고, 거기에 괜찮다며 격려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라는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오빠. 이제 점심시간 끝나기 10분 전이래!”
“알았어.”
하나가 시간을 알려줘서 아이들이 경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며 떠나가려고 한다.
“자. 다들 일자로 서! 빨리!”
1반. 2반.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승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말한다.
“다들 인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악수도 하고.”
승준의 지휘에 다들 처음 보지만 악수를 했다.
뭔가 다들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시하의 페인트에 당한 아이가 말했다.
“너 잘하더라. 깜빡 속았어.”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야?”
“어? 너한테 공으로 속은 사람?”
“그래? 몰랐어!”
“…….”
“이제부터 알게. 속은 사람이구나.”
“…….”
아이는 사기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친해진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시하만이 해맑게 웃었다.
꼭 모두가 친해지는 건 아니었다.
***
반으로 돌아와도 아이들이 시끌시끌 떠들어댔다.
오히려 축구를 한 게 이야깃거리를 더 풍부하게 했다.
“승준이 네가 공으로 막 어! 다 제치고 하는데! 와! 진짜 멋지더라.”
“시하가 패스해 주는데 그걸 딱 때리니까!”
공통된 이야기는 아이들이 할 말을 많게 한다.
그리고 같이 시간을 공유했으니 더더욱 친해지는 게 분명 있었다.
승준이가 노린 건 아니었지만 1반 아이들 말문의 물꼬를 트이게 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물론 옆에 있는 2반도 승준이 덕분에 결집한 상태였다.
“시하야. 누구한테 축구 배웠어?”
시하의 고개가 질문한 아이에게 휙 돌았다.
벌떡.
시하가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질문한 아이가 깜짝 놀라서 뒤로 주춤했다.
“갑자기 왜 일어나?”
“나 축구 형아한테 배웠어! 형아가 엄청 축구 잘해. 여기 승준이한테도 다 가르쳐줬어.”
“어. 알겠으니까. 진정해. 얼굴이 가까워! 진정해!”
시하는 얼굴을 살짝 뒤로 물러섰다.
“승준아? 맞지?”
“응. 그치. 시혁이 형이 많이 가르쳐줬지. 실제로 잘하기도 하고.”
“응! 우리 형아 엄청 대단하지.”
아이가 물었다.
“시하 형은 축구선수야?”
“아니. 통역사야! 대단하지?”
“어? 갑자기 통역사? 통역사가 뭔데?”
“통역사는 통역해 주는 거야.”
“???”
통역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통역사가 뭔지 물어본 것이었는데 저렇게 대답하면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다.
시하도 그걸 알았는지 추가로 말해 줬다.
“영어도 하고 프랑스어도 하고 또.”
“우와. 여러 말 하는 거네?”
“응. 그리고.”
뭔가 더 형아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종이 울린다.
“나중에 또 말해 줄게!”
“어? 아, 아니. 이제 충분한데?”
“아니야. 아직 몰라.”
“아니야. 나 이제 알아.”
“아니야. 몰라.”
그렇게 말한 시하가 자리로 돌아갔다.
시하에게 형아 자랑은 끝이 없었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방과 후 교실이라는 수업이 있다.
영어 수업.
선택이지만 사실상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아이가 다 들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학부모 역시 강인초에 글로벌한 느낌을 기대했다. 세계의 인재. 세계의 리더. 강인대학교도 그렇지만 강인재단이 이런 걸 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글로벌한 인재가 아닐까 싶다.
누가 뭐래도 세계에 통역사로 이름을 한 번 각인시켰으니까.
영화가 잘된 덕분이기도 하니 운이 좋았다.
“시하야. 여기야.”
“형아.”
“형아가 데리러 온다고 했지?”
“응!”
그렇게 시하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뭐지? 뭔가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시선인데? 나에 대해서 아나?
“저 사람이 시하 형이네.”
“시하가 말한 대로 엄청 어른이야.”
“우리 형은 중학생인데.”
“우리 누나는 초등학생이야.”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는데 여기까지 들리지는 않는다.
뭐 내가 신기하기도 하겠지. 이렇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어딨겠는가.
다른 어머니들도 신기해하는데 아이들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시하야. 친구들이야?”
“응!”
“인사하고 가자.”
“응. 안녕~ 내일 봐!”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해 걸었다.
가는 중에 다른 어머니들도 아이들을 차에 태워가는 게 보였다.
다들 어린아이들이 걱정되나 보다.
하긴 1학년이라고 하지만 아직 어리니까. 특히 시하는 반에서 제일 작은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걱정이 든다.
어린이집 아이 중에서도 작았는데 이제 초등학교에서도 제일 작다니.
나중에 성장기 때 폭풍 성장하겠지?
지금부터 키 성장에 도움 되는 영양제라도 먹여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형아. 차는?”
“응? 아! 차는 안 가지고 왔어. 오늘은 걸어갈 거야.”
“왜?”
“시하가 나중에 학교까지 걸어갈 수도 있잖아. 그래서 형아랑 같이 매일 걸으려고. 아! 아침에는 빼고.”
아침은 바쁘기 때문에 예외다.
그것보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오늘 학교 어땠어?”
“재밌었어!”
“새 친구들이랑 많이 친해졌고?”
“응. 친구들도 이제 형아 다 알아.”
“???”
친구들이랑 친해진 거랑 나를 아는 거랑은 대체 무슨 상관이지?
설마 아까 수군거리면서 나를 본 게 시하가 뭔가 이야기해준 게 있어서였나?
“형아에 대해서 뭔가 말했어?”
“응! 다 말했어.”
“구체적으로 대체 뭘 말했는데?”
“형아가 통역사고 영어도 엄청 잘하고 다른 나라 말도 잘하고. 오늘 점심시간에 사커했는데 사커도 잘한다고 말했어.”
“아, 그래?”
뭐 있는 사실을 이야기했네. 없는 이야기는 안 했다. 근데 왜 그렇게 신기한 눈으로 본 거지? 다 알면서?
“그거 말고 또 말한 거 있어?”
“몰라. 기억 안 나.”
저 몰라, 라는 말이 참으로 무섭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더 한 거야?! 기억 안 날 만큼 많이 이야기했어?! 그 짧은 시간에?!
나 또 어린이집에서처럼 1반의 유명인이 되는 건가?
어? 그건 좀. 진짜 좀 그래!
어린이집 애들이야 거의 뭐 가족 같은 느낌이라면 새 친구들은 그냥 남인 느낌이라 더더욱 그렇다.
“뭐 이상한 거 이야기 안 했지?”
“응! 좋은 말만 했어!”
그래! 당연히 좋은 말만 했겠지!
“어. 음. 그래.”
찜찜한 느낌을 가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 왔어?”
삼촌이 소파에 누워 있다.
분명 집에서 나가기 전에는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씻었는지 티비를 보며 배를 긁적이고 있다.
“삼촌! 들어봐. 들어봐. 나 오늘 초등학교 갔다 왔어.”
“초등학교 갔다 온 게 뭔 대수라고.”
“들어봐. 오늘 엄청난 일이 있었어.”
“넌 맨날 엄청난 일 있었다면서 별일 아니잖아. 비켜봐. 안 보여.”
“아니야. 내가 티비에 나온 것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해 줄게.”
“너 학교에 있었던 일 하나도 안 재밌거든?”
“아니야. 진짜 재밌다니까. 내가 1반이거든.”
“아아. 안 들린다.”
삼촌이 손바닥으로 자기 귀를 덮었다 뗐다를 반복했다.
내가 봐도 너무 유치한 행동이다.
“근데 2반이랑 우리 반이랑 붙었어. 그래서 우리 반이 이겼어.”
“어? 뭔데? 뭔데? 그게 무슨 말인데? 반끼리 싸웠어? 갑자기 재밌어지는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는 싸움 이야기였다.
“승준이 막 찼는데 바로 들어가 버려서 잘 이겼어.”
“승준이가?”
“응. 나도 승준이 도와줬는데 승준이가 나랑 잘 맞아서 이겼어.”
“이야. 자세히 좀 이야기해봐.”
“응. 그러니까 승준이 먼저 2반에 가서 한판 붙자고 했는데 거기 반장이 알았다고 해서 다들 점심 먹고 운동장에 모였어.”
“어어.”
“그래서 승준이가 먼저 공격을 했는데.”
“이야. 선빵 쳤구나? 근데 너는 멀쩡하네?”
“승준이가 다 했지.”
시하 이야기를 들고 있자 웃음이 나왔다.
아니. 시하야. 주어를 빼지 말고 이야기해야지.
삼촌이 감탄했다.
“이야. 승준이가 싸움 잘하나 보네.”
“응? 승준이는 사커 잘하는데?”
“어? 싸움 이야기 한 거 아니야? 첫날부터 싸웠다며?”
“으잉? 아닌데. 사커 이야기인데?”
“???”
뭐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거 보니 오늘 초등학교는 재밌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