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이게 재미있겠나? 라고 생각하다가 막상 해 보면 재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
이거 배울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막상 해 보면 배울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다.
배우고 나서야 필요성을 깨닫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서는 이게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 판단할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선택은 전혀 다르게 바뀐다.
내가 너무 수학이 싫어. 공식 외우는 것도 싫어. 이럴 수 있다. 하지만 수학이라는 것은 연역법과 귀납법을 굉장히 잘 단련시켜 주는 학문이다.
모든 문제는 이걸로 통하고 또 이건 논리력을 향상해줄 수밖에 없다.
사고가 그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
책 읽는 게 너무 싫다.
하지만 독서는 넓은 시야와 이해력을 만들어준다.
예를 들면 세계를 조망하는 역사책이나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 문학을 잘 읽었다고 하자.
인간이 벌이는 일이니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문학, 철학, 역사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문학을 으뜸으로 쳐주고 싶다. 철학과 역사를 손쉽게 담아서 읽게 하는 게 문학이 아닌가.
또 같은 기사를 볼 때는 뭘 얻어갈까?
이런 기업과 기업이 파트너쉽을 맺었네? 좋은 거네? 하고 넘어갈까?
아니다. 이 파트너쉽으로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캐치해야 한다.
엄청난 영업이익과 흑자를 남길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까지 미쳐서 주식을 살지도 모르고 주식에 관한 멘탈이 지켜질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런 말로 이해할 수 있는 시하가 아니었으니 손쉽게 이야기해 주는 게 중요하다.
“시하야. 저기 저 아저씨 웃기지?”
나는 티비에 나오는 MC를 가리켰다. 예능에 나오면서 아이들에게도 웃음을 참 많이 주는 사람이었다.
“근데 저 아저씨 착하잖아.”
“응. 착해. 장난도 많이 쳐!”
“그럼 시하는 저 아저씨 잘 알겠네?”
“나 잘 알아.”
“하지만 직접 만나서 보면 정말 시하가 아는 게 잘 아는 걸까?”
“!!!”
“시하도 연기를 해 봐서 알겠지만 그게 시하의 진짜 모습이었어?”
“아니었어.”
“그치? 그러니까 저 사람도 막상 만나면 못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착한 사람일 수도 있어.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거지.”
“응!”
“근데 만나지 않으면 모르잖아?”
“그렇지!”
“그러니 선생님한테 미술 배워야만 아, 이거 재밌네, 안 재밌네 하겠지?”
“응!”
“물론 시하가 해 보지 않고 선택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왕이면 해 보고 판단하지 않을래? 혹시 모르잖아. 내가 몰랐던 걸 배울 수 있을지. 재미없으면 그만둔다고 형아한테 꼭 말해.”
시하가 잠시 고민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한번 해보고 재미없으면 그만둘게.”
“응. 재미없으면 그만둬 버려!”
사실 이 나이 때는 필요성에 의한 판단보다 재미가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생의 조언을 하기보다는 그냥 같이 놀아주면서 친해지는 게 맞다.
좋은 말이 잔소리가 되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다.
어찌되었든 이 정도로 판을 깔아줬으니 좀 재밌게 잘해 줬으면 좋겠다.
다음에 전화할 때 무조건 재밌게 해달라고 해야지.
“그럼 형아도 같이 배우까?”
“어? 아니, 난.”
“해보지 않고 재밌는지 모르는 거잖아. 맞지?”
“어…. 그건 그렇지.”
“형아 미술 배워바써?”
“아, 아니.”
미술 학원 갈 돈이라면 차라리 아껴서 아빠 짐을 덜어드리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굳이 말하자면 학교에서 어느 정도 교양으로 배우긴 했다. 뭘 배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싸! 형아랑 같이한다!”
저기요? 시하 씨? 누구 마음대로 같이하는 거로 정하는데요?
내가 말한 게 그대로 돌아와 비수가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
아니지. 시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건 하얀 거짓말도 뭣도 아니지 않은가.
“그. 어. 잘 부탁드립니다.”
“으잉? 내가 형아한테 미술 가르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시하가 그나마 잘하니까.”
“응! 내가 형아 그림 그리는 거 도와주게!”
뭔가 좀 그렇다.
원래 애가 미술 숙제를 받아오면 부모님이 도와줄 때 하는 대사 아닌가?
어찌되었든 시하는 7살이나 됐는데도 아직 형아랑 같이하는 걸 여전히 좋아한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금까지 저렇게 커 왔는걸!
아직 형아를 졸업하려면 시하는 멀었다.
“그럼 나도 같이할까?”
삼촌이 슬그머니 나와서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니. 삼촌은 안 해 봐도 돼.”
“왜! 왜 나는 안 되는데!”
“어휴. 삼촌.”
시하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이어 말했다.
“제발 눈치 좀 챙겨!”
“내가 뭘?! 내가 뭔 눈치를 못 챙겼는데!”
“삼촌. 낄낄빠빠 몰라?”
“어. 몰라. 난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거 눈치채고 이렇게 끼는 거야. 난 그 표정이 너무 좋더라. 푸하하.”
“이잇!”
여전히 시하 놀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삼촌이었다.
아무리 시하의 머리가 컸어도 삼촌의 그에 맞춰서 놀리는 능력도 상승하고 있다.
뭐 저런 것도 다 애정표현이니까.
“삼촌. 그럼 삼촌은 다른 데서 배워.”
“싫은데~ 같이 배울 건데~”
“이잇!”
내가 봐도 삼촌은 좀 때리고 싶네.
“아, 맞다! 시하야. 미술 선생님은 예전에 프랑스랑 미국에서 봤던 그 아저씨야. 놀이터에서 안아준 아저씨.”
“?!”
그 사람이 미술 선생님이었냐는 얼굴이다.
“그 아저씨, 노숙자 아니었어?”
저기 시하야? 아무리 수염 엄청 기르고 어? 자기관리 안 하고 어? 옷도 좀 그렇게 입어도 어? 놀이터 벤치에 한참 앉아 있고 그랬어도!
어? 표현하니까 좀 노숙자 같은데??
시하 아버지에게 좀 말끔하게 다니라고 말해야겠다.
그래도 안을 때 냄새는 안 나지 않았나? 씻고는 계셨어!
뭐 그것도 이제 1년 전 일이니 시하 입장에서는 별생각이 안 날 수도 있다.
***
시하의 친아버지인 배상현의 하루는 부산스러웠다.
면도도 말끔히 하고 옷도 예전 걸 버리고 새로 샀다.
시하가 어린이집 졸업하기 전에 미리미리 좀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물론 그러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이제부터라도 마음먹고 준비해야 했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입었어? 얼굴은 어떻게 된 거고?”
배상현의 친구인 스테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한국에 좀 가려고.”
“한국에? 한국에는 왜? 아! 맞다. 너 한국 사람이었지.”
“할 게 있어서.”
“하긴. 너 거기 건물도 하나 사지 않았어?”
배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 시하를 만나고 나서 아는 사람을 통해 한국의 집 하나를 샀다.
주택으로 되어 있고 리모델링을 부탁해서 화실을 꾸민 곳이다.
다가갈 용기도 없으면서 그 당시에는 뭐라도 해야지 싶어서 구매한 곳이다. 물론 방치되어 있지만.
거기도 사람을 불러 청소하고 가구를 들여야 했다.
“드디어 가긴 가는구나. 결심이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무슨 일인지 너는 모르잖아.”
“내가? 아닌데. 아는데? 너 술 취하면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거 알지?”
“젠장!”
배상현은 혀를 찼다.
술을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다행이야. 나는 너 언젠가 죽는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이 바쁜 몸을 이끌고 왜 자주 여기까지 왔겠어!”
“내가 그린 걸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걸 알아차리네.”
친구의 으쓱임에 배상현이 피식 웃었다.
같은 동료 화가인 친구였다.
자신만큼 유명했고 그러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다.
자신에게 자주 찾아오는 걸 보며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가 봐. 나 바빠.”
“그런데 왜 마음에 바뀐 거야?”
“너처럼 좋은 사람이 자꾸 찔러서. 그래서 용기 한번 내보려고. 그럴 자격 만들 수 있게 해 보려고. 해 보면 알겠지.”
“잘 생각했어!”
“근데 뭘 가르쳐야 재밌어 할지 모르겠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그 색감! 나 그거 보러 오는 것도 있잖아.”
“난 안 돼. 너라면 모를까.”
“왜? 색감이 우울해서?”
배상현이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럼 다양하게 쓰게 해보는 건 어때?”
“뭘?”
“재료들 말이야. 붓도 족제비 털이나 여우 털이나 재료에 따라 만든 것들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잖아? 색감도 뭘 섞어야 이런 거 나오는지도 알고. 이거 웬만한 돈으로도 배우기 힘들다. 알지?”
배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 특히 배상현이 만드는 색감은 안료를 열심히 생각하고 조합하는 걸로 나온다.
물론 요즘 시대에는 이런 게 잘 나오지만 그는 예스러운 것을 사랑했다.
오히려 이런 요소 때문에 부호의 눈에 든 것도 있다.
후원자들이 지원하는 건 돈뿐만이 아니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도 구해주는 것이다. 물론 너무 비싼 거면 좀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런 부분은 명성도 한몫해야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거 좋지. 근데 재미없다고 하면?”
“그러면 딴 걸 고민해 봐야지. 근데 웬만하면 다양한 색깔로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할 거야. 내 아이도 그러던걸.”
“그렇구나.”
배상현은 친구의 조언을 한번 따라보기로 했다.
아이에게 뭔가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뭐를 재밌어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친구의 조언 덕에 안심되는 부분이 있었다.
“고맙다.”
“뭘 이런 거로. 그럼 오늘 술 한잔?”
“나가!”
“안 취할 정도로만 마시면 되잖아. 입 싹 닦고 물러갈게?”
“끄응.”
배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가 오늘 찾아온 이유에 같이 술 마시러 가자는 게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좋아. 같이 마셔주면 내 아이가 좋아했던 걸 알려주지! 도움이 될걸?”
“정말이지?”
“그럼! 나만 믿으라고!”
***
나는 시하랑 함께 어느 집에 와 있다.
3층 주택인 거 같은데 리모델링한 지 1년도 안 된 거 같은 느낌이다.
언제 이런 집을 구한 거지?
그런 생각이 들지만 일단 들어가자.
문이 열려 있다고 했으니 그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시하야. 들어가자.”
“우와. 형아. 마당이야.”
“응. 마당이네.”
뛰어놀기 참 좋아 보인다.
역시 아이 있는 집은 마당이 있어야 하나? 관리가 귀찮아 보이니 아파트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시하는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제 들어가자.”
“응!”
미술 배우러 주택에 들어가는 건 처음인 거 같다.
물론 학원에도 안 다녀봤지만.
앞에 문은 도어록인 거 같은데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문이 열렸다.
정말 안 잠그셨구나. 이래도 되나? 뭐 안에 사람이 있으니 괜찮겠지.
“형아. 어두워. 캄캄해.”
“그렇네.”
집 안에 불도 켜져 있지 않아서 아주 어두웠다.
그렇다고 새까맣지는 않았다. 빛은 조금 들어왔다.
굳이 말하자면 아침에 커튼 쳐진 방의 어두움 느낌?
근데 왜 이런 암실이지? 아! 뭐 미술하려면 이런 어두운 공간이 필요한가?
이런 건 잘 모르니 그냥 신발 벗고 들어왔다.
설마 신고 들어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시하랑 나를 위해 앞에 슬리퍼 2개가 놓여 있는 걸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시하야. 가자.”
“응.”
시하가 어두운 게 조금 무서운지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저. 선생님? 미술 선생님? 어딨어요? 저희 왔는데요~”
“저도 왔어요!”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지? 뭐지? 잠시 어디 나가셨나?
그런 생각으로 시하랑 거실로 들어갔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
소파가 보이고 티비도 보이고.
“시하야. 아무도 없는 거 같지?”
“응. 아무도 없어. 어디 갔나 봐.”
“그러게.”
그때였다.
덜컹 소리가 부엌에서 들렸다.
뭔가 싶어서 쳐다보는데.
“키아아아악!”
마치 좀비처럼 특수 분장을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으아아악! 형아!”
시하가 너무 놀라서 나도 덩달아 많이 놀랐다.
매미처럼 내게 철썩 붙어서 소리를 지르며 함께 뒷걸음질 쳤다.
좀비가 빠르게 다가왔다.
“형아! 형아!”
시하는 패닉에 빠져서 내 손을 잡고 도망쳤다.
좀비가 굉장히 빨라서 내 몸을 붙잡았다.
“으아아아! 형아!”
잡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달이 10월이긴 한데 할로윈 데이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