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어찌 되었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근데 시하는 어느새 게임에 관한 관심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도트 그림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퀄리티가 좋은 도트 그림도 엄청 예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으음. 좋군.
비가 내리는 도트 그림도 있었는데 엄청난 퀄리티라서 눈이 부릅떠지는 것 같다.
저게 도트 그림 맞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걸 일일이 그리나 싶어서 시하 옆에서 찾아보니까 원래 그림을 도트 그림으로 변환해 주는 것도 있었다.
물론 변환하고 손질을 좀 해줘야 했다.
오호.
“시하야. 너 그냥 그림 그려서 도트 그림으로 만들면 된다던데.”
“정말?”
“응. 이 영상 한번 봐봐.”
간단히 도트 그림으로 변환한 다음에 도트 브러쉬를 가지고 깔끔하게 수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냥 도트로 열심히 노가다를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와! 예뻐!”
“그치?”
“응!”
도트 그림은 도트 그림만의 감성이 있다.
시하가 벌써 이 감성을 알다니.
“형아. 시하 이케 그릴래.”
“응?”
“이케 그려서 만들래.”
“페페 그릴 거지?”
“시하 딴 거 그리꺼야.”
“게임은?”
“게임은 형아가 그린 페페로 하께.”
“어? 내가?”
“응!”
여기 경트리오가 보내준 게임은 그렇게 변환하지 않고 간단한 캐릭터 그림으로 싸우긴 형식이었다.
근데 말이 간단하다는 거지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좀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아니. 시하야. 너 게임 만들고 싶다며?!
게임보다는 도트 그림 만들기에 꽂혀버렸다. 문제는 게임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지 나에게 맡겨버렸다는 사실이다.
“페페 캐릭터 이상해도 해야 한다?”
“갠차나. 형아가 그리면 다 머시써.”
“어. 그래.”
실망시켜 주고 싶진 않지만 나는 시하에 비해서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살면서 도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일단 시하가 그린 페페 그림을 보면서 앱으로 톡톡 그려보았다.
도트 변환으로 그리면 게임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수작업 시작이다.
애초에 이 게임 역시 수작업이니까 문제없겠지.
시하는 옆에서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나는 손가락으로 톡톡 폰을 두드린다.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났다.
별다른 걸 건드리지 않았는데 1시간이다.
원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면 이 정도는 금방이었을 건데 나는 괜히 어쭙잖게 열심히 해본다고 시행착오가 많았다.
나름 괜찮은 것 같은데 시하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페페와 다르게 생긴 결과물이 튀어나왔다.
아. 이 애 페페 아닌 거 같은데. 얜 누구야?
“으음. 시하야. 형아는 다 그렸는데. 색칠도 하고.”
“보자!”
나는 폰을 가슴에 숨겼다.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페페인 듯 페페가 아닌 페페 같은 거인데.”
“아?”
“아무튼, 열심히 그리긴 했는데 형아가 시하보다 못 그리거든. 그건 알지?”
“시하가 형아보다 더 잘 그려!”
“그래. 그건 알아서 다행이네.”
무조건 형아가 시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림만큼은 시하가 최고다.
솔직히 시하보다 잘했으면 내가 지금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나는 남들 하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 이런 밑밥이 있어 줘야 실망을 덜 한다.
“기대하지 마. 기대.”
“아냐. 시하 기대 안 해. 조금만 기대해.”
“조금이 얼마만 한데?”
“이만큼?”
시하가 두 팔을 활짝 벌려서 원을 그린다.
엄청 크네! 그 정도 아니야! 내 그림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더 작아야지!
“주먹만 하면 안 되나?”
“아냐. 지구만큼이야.”
그 팔이 지구를 표현했던 거였어? 엄청 기대하는 중이잖아!
형아가 잠시 그림 학원 3개월만 다녔다가 보여주면 안 되겠니? 전문적으로 열심히 좀 배워서 보여줄게. 도트 그림으로. 그러면 실망이 덜할 것 같은데.
온갖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다.
“흠흠. 돌멩이만큼만 기대해 줄래? 조약돌도 좋고.”
“형아 못 그려써?”
“응. 형아 그림 잘 못 그려.”
“아라써. 윤동이만쿰 못 그려?”
“어?”
윤동이가 얼마나 못 그리는데? 그것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
시하가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형아를 보았다.
아무래도 윤동이의 그림이 참으로 심각하나 보다.
“형아. 시하도 준비해써.”
“마음의 준비?”
“응!”
윤동이 그림이 그 정도였니?!
아무튼, 이제 시하에게 보여줘야겠다.
어차피 이 그림으로 게임을 하게 될 거니 문제없겠지.
“바로 이거야.”
“!!!”
“이상해?”
“아냐. 윤동이보다 나아! 기여어!”
“정말?”
“응.”
“페페는 아니지?”
“아냐. 페페야.”
크흑. 페페도 아닌데 페페라고 말해주는 이 배려심을 보라.
우리 시하 6살 되더니 아주 잘 컸다!
그때 삼촌이 등장했다.
“야. 시하야. 나도 페페 그렸다.”
“정말?!”
“어. 자 봐봐.”
삼촌이 아주 당당히 보여주었다.
나도 궁금했다. 삼촌이 그림 실력이 얼마나 되면 저렇게 자신 있게 보여주는가 싶어서.
“페페 아냐!”
“그러게.”
삼촌이 풉 하고 웃음을 보였다.
“왜? 페페는 삼각김밥 아니었어?”
“아냐!”
그러고 보니 시하의 페페 몸이 삼각김밥처럼 통통하긴 하네.
아주 정확하게 짚은 것 같다.
“아니던데. 똑같던데? 아, 맞다. 이거 시하 얼굴이랑 똑같네. 아주 삼각김밥처럼 볼살이 튀어나왔어.”
“아냐! 시하 머시써.”
“어디? 어? 시하야 얼굴에 뭐 묻었네.”
“아?”
삼촌이 시하의 볼살을 손을 슬쩍 닦아준다.
그리고 히죽 웃더니.
“못생김! 푸하하!”
“잉잉!”
“못생삼김. 푸하하!”
“아냐! 시하 멋진삼김이야.”
“결국 삼김 됐네! 푸하하.”
“아냐! 시하 멋진 동생이양!”
“이미 늦었어.”
“잉잉!”
역시 시하를 놀리려고 또 저러고 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삼촌 저도 삼촌 그렸어요.”
시하를 놀리는 동안 급하게 그린 그림을 삼촌에게 보여주었다.
“야!”
내 폰에는 오징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아주 심보가 못된 오징어였다.
오징어가 무슨 잘못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뜻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능을 자주 보는 삼촌은 이 뜻이 뭔지 안다.
“나보고 못생겼다는 거지?”
“아니요. 심보가 못생겼다는 거지요.”
시하도 내 말에 거든다.
“삼춘은 형아 동생 아니라서 안 머시써. 삼춘도 형아 동생이어야 머시써지눈데.”
허리에 손을 얹고 배를 쭈욱 내민다.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크흠. 형아 동생만 멋있어지는 거냐? 크흠. 부끄럽네. 흠흠.
삼촌이 말했다.
“근데 저거 자세히 보니까 똥 같은데?”
“에이. 착각이에요.”
“혹시 나더러 똥이다. 뭐 그런 뜻은 아니지.”
“어허. 제 그림을 똥 같다고 말하다니. 설마 절 똥손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이 심하시네요.”
“왜 내가 못된 놈이 되는 거냐? 네가 먼저 오징어라고 하지 않았어?”
“제가요? 아닌데요. 전 마음이 좀 그렇다는 걸 표현한 것뿐이지 얼굴이 그렇다고 안 했잖아요.”
“그게 뭔 개똥 같은 논리야? 어찌 되었든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삼촌. 옛날 영화 그만 좀 봐요.”
“참나. 옛날 감성이 엄청 좋거든? 둘은 도트 그림 그리면서.”
그렇게 말하면 그렇네.
이게 바로 내로남불인가 보다.
“그런데 시하야. 시하는 뭐 그려?”
남은 건 시하 그림이다.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시하는 딴 딴 따 단~ 그려!”
“응?”
“미국에서 아찌가 결혼한대써.”
“???”
삼촌이 아! 하면서 말했다.
“너 일할 때 성당에 간 적 있거든. 건축물이 예쁘잖아.”
“아하.”
“마침 신부님이랑 마주쳤는데 여기서 오늘 결혼식 한다고 말하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있는 게 성당 내부인가 보다.
아무래도 결혼식 하려고 준비 중인 성당 내부를 기억하고 그리는 것 같은데.
도트 그림이 되면 예쁠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왠 결혼식?”
“우웅? 샘 결혼한대!”
“어?”
“오늘 결혼할 거래.”
“오늘???”
아니. 오늘 결혼하는 거면 도환이 형이랑 결혼한다는 건데 왜 나에게 미리 말을 안 해줬지?
가만 생각해 보니 시하가 말을 잘못한 건 아닐까 싶다.
“시하야. 오늘이 아니라 올해 아니야?”
“아코!”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쩐지. 도환이 형이 결혼하면 아무래도 안 알려줄 리가 없으니까.
“응?”
폰에 톡이 왔다.
도환이 형이었다.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열어서 내용을 보는데 결혼식에 관한것이었다.
***
알다시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 부모님들도 모두 알게 된다.
유다희 선생님이 올해 결혼한다!
이미 부모님들에게 소문이 났다. 그래서 전화나 문자로 언제 결혼하는지 먼저 나서서 물어보는 분들도 있었다.
날짜는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유다희 선생님은 그냥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는데 엄청나게 연락이 와서 당황했다.
결혼식은 날짜는 5월이라고 한다.
아이들도 선생님의 결혼에 대해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승준이 말했다.
“그럼 하나가 결혼식 피아노 치면 되겠다!”
“응! 하나가 칠게! 하나는 피아노 학원 다니니까.”
6살이 되면서 하나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노래 교실도 다니지만 악기 하나쯤은 다루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엄마에게 졸랐다.
승준도 같이 보내려고 했지만 승준은 음악에 관심이 없다.
썬더 쓰리 축구 동호회에 아직도 만족하고 있다.
“연주는 바이올린 켜면 되겠다.”
“응. 할 수는 있는데.”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바이올린 배운 연주.
하지만 결혼식 때 바이올린을 켜도 되는지 몰라서 그저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시하는 그림 선물!”
“시하 준비해써!”
“윤동이는 춤추면 되겠고 은우는 랩하면 되겠다. 재휘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예쁜 꽃 준비하고 종수는 그냥 앉아있으면 되겠네.”
승준이 그렇게 말하자 종수가 발끈했다.
“야! 왜 난 그냥 앉아있어!”
“응? 괜찮아. 나도 같이 앉아있을 테니까.”
“어?”
“우리 둘은 결혼식 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냥 박수 치고 있으면 돼.”
“뭔가 이상한데?”
선생님은 어이가 없었다.
거의 뭐 결혼식이 애들 놀이터가 되었으니까.
물론 애들이 선생님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감사하나 만약 한다고 하면 그걸 보는 하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깐깐한 어른들도 있으니 싫어할지도 모르고.
피아노부터 축하 공연, 선물까지 애들로 꽉꽉 채워진 결혼식!
물론 엄청 특이하게 되겠지만 좀 그랬다.
“여러분. 피아노 치는 분도 있고 축하 공연해 주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아이들이 실망했다는 얼굴을 한다.
그때 시하가 말했다.
“샘. 시하가 신부 하까여?”
“어? 신부??? 시하가??”
“응! 시하가 신부 하께여!”
“선생님이 결혼하는데 왜 시하가 신부를???”
시하가 문도환 씨를 그렇게 좋아했나 싶어서 의문이 들었다.
아닌데. 시하는 형아를 좋아하는데?
“시하가 아페서 막 일거져여.”
“아. 아. 그 신부.”
시하가 말하는 건 천주교의 신부님이었다.
유다희 선생님은 잠시 착각해 버렸다.
“시하 잘해여.”
“응. 잘하겠네. 근데 말이야.”
“시하가 해보께.”
이미 신부님도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려는데 시하가 시범을 보였다.
“검은 머리 파뿌리카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시하야. 파프리카는 먹는 거고 파 뿌리야.”
파프리카 될 때까지 사랑하면 머리가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될 게 분명했다.
염색한 것도 아니고 그런 휘황찬란한 색이라니.
갑자기 색이 그렇게 바뀌면 병을 의심해 봐야 했다.
“아? 파 뿌리? 군데 샘. 왜 머리가 파 뿌리 돼여?”
“아. 그건 파 뿌리가 하얀색이라서 흰 머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세요. 하는 거랍니다.”
“화이트!”
“응. 화이트지.”
“군데 레드가 머시써여.”
“응. 레드가 멋있네. 근데 시하야. 이미 신부님은 계셔서 시하가 안 해도 돼.”
“으잉?”
“풉. 근데 시하야. 정말 선생님한테 줄 선물 그림 준비했어?”
“응! 시하가 열심히 그려써여!”
“와. 궁금하네. 근데 이거 비밀 아니야?”
“!!!”
시하가 눈을 좌우로 움직이더니.
“샘. 못 들어써여. 귀 막아여.”
이미 들었는데 이제 와서 귀 막으라고 하면 어쩌니?
선생님은 그래도 시하 말대로 귀를 막아주었다.
“난 못 들었다. 난 못 들었다.”
승준이 애들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도 선물 주자!”
아이들이 서로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다 들렸지만 귀를 막고 안 들린다고 말하고 있다.
종수가 그걸 보더니 선생님을 구석에 끌고 갔다.
“샘. 다 들리잖아요. 여기 있어요. 원장샘! 선생님이 감시해 주세요!”
종수는 시하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중삼중으로 비밀 보안까지 하고 있었다.
“근데 어차피 받은 건데 선생님이 좀 들으면 괜찮지 않을까?”
“안 돼요!”
아이들 다들 하나같이 비밀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선생님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얘들아. 무슨 비밀을 선생님 있는 데서 상의하고 있어. 비밀스럽게 따로 모여서 해야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들이 다 같이 모일 데가 여기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