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다시 현재.
나는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그는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다 울 때까지 그저 기다리며 앞을 보았다.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됐다.
시하는 나랑 참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상황과 관계가 비슷하게 엮여 있는데 또 어느 부분은 나와 달라서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가끔 이렇게 어려운 문제에는 정답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편하게 고르면 될 것 같은데.
세상은 딱 떨어지는 문제를 주지 않아서 너무 어렵다.
‘시하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 어린 우리 시하.
언젠가 말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친아버지와 시하의 인연을 내 마음대로 끊어버리거나 이어버리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보호자지만 시하가 훗날에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물론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되지 않길 바라는 것도 있다.
어쩌면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른다.
시하는 나와 비슷하면서 다르니까.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친아버지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줄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는 다 울었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시하를 후원해도 되겠습니까.”
“후원이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어요. 혹여나 제가 죽기 전에나 죽은 후에 재산도 물려주고 싶습니다.”
“만나시지는 않을 건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도저히 그 애 앞에 나설 수가 없어요. 무슨 염치로 나섭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냥 좋은 사람이 후원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세요.”
“흐음.”
“친아빠라는 걸 밝혀봤자 애가 혼란만 겪지 않겠습니까. 그냥 혜련이 몫까지 행복하게만 자라주면 됩니다. 부족한 점은 제가 채워주겠습니다. 혹여나 예술 쪽으로 간다면 제 인맥을 통해서 다 지원하겠습니다. 그런 쪽은 굉장히 금액도 금액이지만 인맥을 무시 못 하거든요. 저는 운이 좋았죠.”
“실력이 있으니 운을 잡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실력이 어디에 비롯됐는지 알면 실력이라고 말 못 합니다. 하하.”
그는 허탈한 웃음을 보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려서 그런지, 아니면 초췌한 얼굴이라서 그런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걸로 된 겁니까.”
“제가 혜련이가 애를 안고 장혁 씨랑 있는 걸 봤을 때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봤습니다. 근데 애가 형이랑 있으면 그 행복한 웃음이 그대로 보이더라고요. 닮았어요. 혜련이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인가 보다.
굳이 불편한 진실을 들추지 않고 싶은 마음.
그 모습을 보고 등을 돌린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인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저 떠나주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얼굴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저도 뭐가 옳은 선택인지 몰라요. 근데 말이에요. 저는 제 친어머니가 저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했어요. 혹여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죠.”
나는 그의 선택이 싫었다.
포기하는 게 그 애의 행복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진실을 덮고 행복해진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아이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라고? 그거야말로 아이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어도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아이의 선택권마저 박탈하지 마라.
당신이 포기하는 선택을 하는 건 아이가 선택하고 난 뒤다. 그러니까.
“지금은 혼란스러울 테니까 얼굴만이라도 보는 건 상관없지 싶어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 자격은 당신이 주는 게 아니라 시하가 주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가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나도 이게 정답이고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어린 시하를 위해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건 내 역할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이 사람은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가.
미안함과 죄책감을 안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적어도 한 번은 마주 보며 만났으면 한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도 나를 보았다.
서로 고개를 돌린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침묵이 길어지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못 만나겠네요. 꼴이 말이 아니라. 수염도 밀어야 할 것 같고.”
“그건 그렇네요.”
겨우 꺼낸 대답은 승낙이었다. 어쩌면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러세요. 멀리서 보기만 했을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
삼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하의 손을 잡고 온다.
폰을 흔들고 있는데 아무래도 왜 연락을 받지 않았냐는 듯한 얼굴이다.
이야기하고 있어서 연락이 왔는지 몰랐다.
“형아. 빨리 맛있는 거 먹자. 시하 배고파.”
“응.”
“구리고 시하랑 놀아야해!”
“응. 그래.”
아무래도 시하가 날 보고 싶어 해서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삼촌은 말릴 수 없어서 여기 온 것 같고.
옆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하의 친아빠가 있다.
시하도 그 사람을 봤는지.
“아? 미술관 아찌?”
“어? 으응.”
아무래도 시하도 기억하고 있나 보다.
“안녕하세여!”
“그래. 안녕.”
“여기 왜 이써여?”
“아. 그냥 여기 시혁 씨 만나러 왔지.”
“형아 보러여? 형아 머시써서 보러 와써여? 싸인도 바다써여?”
“아니. 아직.”
“형아. 빨리 싸인해져. 그리고 밥 머그러 가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살며시 시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시하 싸인도 해줄래. 영화 팬이야.”
“정말여?! 시하 싸인 해주께여.”
시하가 팬을 받아서 수첩에 ‘ㅇㅅㅎ’를 쓴다.
남자는 그걸 보면서 싸인을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고맙다.”
“형아 싸인도 바다주까여?”
“정말 고맙다. 흐윽.”
“아? 왜 울어여?”
“기뻐서. 너무 기뻐서 울어.”
“아? 기뻐서 우러여?”
“응. 살아줘서 고마워. 흐윽.”
“아?”
“정말 정말 고마워.”
“기뻐해져서 시하도 고마어여.”
“흑.”
어쩌면 시하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최고의 감사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시하는 그걸 모르겠지만 말이다.
삼촌도 그런 둘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
“응!”
아마 배우들의 팬서비스를 봐서 시하는 서슴없이 허락한 것일 터다.
토닥토닥.
하지만 그에게는 팬서비스가 아니라 어쩌면 그의 우울함의 한줄기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곳을 보는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통하는 점이 있었다.
시하가 말했다.
“그만 울고 우서여. 우스면 복이 와여.”
“흐윽. 응.”
시하의 말에 그는 더 눈물을 쏟았다.
***
일개미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순조롭게 순항 중이다. 그 무수히 많은 인터뷰를 소화해 나간 보람이 있었다.
또 상을 받았다고 인터뷰 요청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일 자체가 언제 끝나는 건지 난감할 정도였다.
그래도 뭐 보람은 있었다. 큰 행사는 다 끝난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 받을 상이 더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시하의 친아버지는 배상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시하에게 친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말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2월이 가고 3월이 왔다.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또 상 받을 일이 있으면 같이 가서 통역할지도 모르겠다.
뭔 놈의 영화상 일정이 이렇게 엄청난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봄바람이 솔솔 부는 걸 보니 꽃이 필 계절이 온 것 같다.
시하도 이제 6살이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형아. 형아. 모해?”
돌아와서도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데 시하가 내 어깨를 흔든다.
“형아 일하지.”
“형아. 시하랑 놀자.”
“응. 알겠어.”
일이야 천천히 해도 되겠지.
시하랑 노는 게 먼저일 것 같다.
“뭐 하고 놀까?”
“게임 만들자!”
“응? 게임?”
“응. 시하가 게임 만들래. 게임.”
“시하가 만든 게임이라.”
나 역시 게임 만드는 걸 공부하긴 했지만 프로그램 짜는 건 별나라 이야기였다.
물론 프로그램을 보면 대충 이런 알고리즘이구나 이런 말이구나 해석은 된다.
근데 그건 짜는 것과 다르다.
영어로 된 소설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으음. 어떤 게임을 만들까?”
“진짜 할 수 있는 게임! 폰 게임!”
“아하. 폰 게임이라.”
“시하가 만든 거 움직여.”
“아하.”
아무래도 시하는 자기가 만든 캐릭터를 움직이고 싶나 보다.
아마 게임을 만들려고 하면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흐음. 간단히 움직이는 거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본격적인 게임은 만들지 못하겠지만.
도움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야지.
“잠시만.”
나는 오랜만에 경트리오 애들에게 톡을 남겼다.
-시혁 : 야, 야. 시하가 폰 게임 만들고 싶다던데 간단히 캐릭터 넣어서 움직일 수 있는 거 할 수 있어?
-안경호 : 응??? 게임 만드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시혁 : 그러니까 그냥 캐릭터 움직이는 것만 보이면 되지 않을까?
-박경준 : 그 정도면 괜찮지. 아! 혹시 도트 게임 어때? 그거면 우리가 만든 거 있거든. 캐릭터만 바꾸면 됨 ㅇㅇ
-신경환 : 너희들 웬일로 정상적인 말을 하냐.
-안경호 : 우리는 게임에 한해서 진심이다.
-박경준 : 암! 암! 진심이지! 우리는 진지하다구!
-신경환 : 아, 그래? 그럼 다음 게임 개발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해 볼까? 이제 할 때 됐지?
-안경호 : 아직 시즌3도 발매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박경준님이 방을 나갔습니다.]
[이시혁님이 박경준님을 초대했습니다.]
-이시혁 : ㅎㅎㅎ
-박경준 : ;;;
-박경준 : 크흠. 내가 도트게임 캐릭터 그릴 수 있는 에디터 만들어 둔 거 있거든? 그거 줄 테니까 쓰셈 ㅇㅇ
-이시혁 : ㅇㅇ 땡큐!
나는 그렇게 톡을 끝내고 박경준이 보내준 에디터 파일을 받았다.
아무래도 저 세 명이 만들었다던 게임과 연동되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려서 여기에 넣으면 되는 건가 싶다. 안 되면 전화해서 물어봐야지.
“시하야. 다 됐다! 그림 그리자. 이건 도트 그림이라고 하는데 재밌을 거야.”
“도트가 모야?”
“점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이케?”
시하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 찌른다.
펜이 있었으면 얼굴에 점이 그려졌겠지. 아니. 진짜 점을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내가 설명하려고 할 때 삼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찾는 듯이 서랍 여는 소리가 나더니 금방 나온다.
시하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고 의문이 섞인 시선이었다.
삼촌이 나왔다.
“삼춘?”
“삼촌이라니. 나는 삼촌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야.”
뭔 개소리인가 했더니 삼촌의 눈 밑에 점이 떡하니 찍혀있다.
“이게 그 증거야.”
“점이다!”
“네가 아는 삼촌이 나를 닮았는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이다.”
“삼춘 마짜나!”
“아니야. 레이서희 톰슨이야.”
레이서희는 또 뭔가 싶다. 영어와 한글이 섞인 이름도 되나 싶은데.
“아닌데. 삼춘 맞는데.”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놀림당하기만 해~ 모든 걸 말하는데~ 너만 모르니~”
“우웅?”
“다른 사람이라니까.”
“정말?!”
“응.”
“거짓말! 삼춘이라는 거 다 아라.”
“삼촌이라는 증거가 어딨지? 난 안 보이는데?”
“우웅. 구럼 시하가 그거 점 지우께.”
“오. 그래. 해봐.”
시하가 물티슈를 들고 삼촌의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시하가 어푸어푸 시껴주께!”
이번에는 삼촌을 끌고 가서 비누칠해 주며 세안을 했다.
하지만 점이 지워지지 않았다.
“!!!”
“내가 아니라고 했지.”
“왜 안 지어져?”
“푸하하. 바보야. 이거 유성 매직이거든! 푸하하. 시하 바보래. 물로 안 지워지거든. 그것도 모르냐.”
“잉잉!”
삼촌에게 속았다는 걸 알은 시하가 허벅지를 토닥토닥 때렸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삼촌을 보았다.
유성 매직 쓸 정도로 놀려야 했던 건가 싶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놀리는 거에 진심인 삼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