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시사회의 분위기가 좋다고 해서 영화가 잘되는 건 아니다.
평론가의 평가, 배급사의 반응이 좋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고동수 감독의 ‘일개미’는 확실히 평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사회인 만큼 줄거리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다들 호평 일색이었다.
기사들은 손익분기점은 당연히 넘길 것이고 천만을 찍을 것인지 궁금하다는 기사가 많았다.
나도 궁금하다. 천만을 찍을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얼마 만에 천만을 찍을지.
그도 그럴 게 황금종려상이지 않은가.
“시하야. 뭐 그려?”
“쉿! 시하 지금 다 해가.”
아무래도 그림에 집중하고 있나 보다.
여느 때와 다르다. 영화를 찍고 나서부터 그렸던 그림인데 이제야 마무리되는 것 같다.
이번에는 꽤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정해진 시간에만 그리게 해서 느린 것도 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느렸다.
“엄청난 그림을 그리나? 그렇지?”
“시하가 영화 찌거서 생각해써.”
“오! 그래? 우리 시하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 대! 나중에!”
“다 되면 보라는 거지?”
“마자.”
슬쩍 봤는데 페페였다.
채색하고 있는데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나도 바쁜 사람이야. 시하야.
옆에 앉아서 오랜만에 번역 일을 했다.
장편 소설이었는데 두꺼운 책 3권 분량 정도 된다. 신간 발간하면 또 내가 맡게 될 것 같다.
일이 끊임없이 들어와서 충분히 돈벌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영화 흥행에 따라 고동수 감독님의 통역사로 일하게 될지 모르니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일 처리를 해줘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작업했다.
주변에는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와 시하가 열심히 팬으로 채색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치 백색소음처럼.
“으윽!”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 있다.
시하는 다 됐다면서 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다.
“형아. 시하 다 해써. 녹화도 다 해써.”
“오, 그래? 어떤 그림이야?”
“페페 그림.”
“그건 형아도 알거든.”
“시하가 생각해써. 페페 그림 그려서 눈에 카메라가 이써.”
“???”
시하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림을 설명한다.
아무래도 자신의 의도가 있나 보다.
첫 시작은 역시 페페.
그냥 평범한 페페였다. 원래 자주 그리던 오리지널.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시하가 눈 부분을 확대하니.
“어?”
카메라 렌즈처럼 반짝이는 눈이 그려져 있다.
확실히 평소의 검은 눈동자와 다른 카메라 렌즈가 떡 하니 있는 것이다.
“페페 감독님이야. 눈이 카메라야. 카메라.”
“이야. 엄청나네.”
“이거 눈에 카메라 쑥 너어써.”
시하가 페페의 옆모습 그림을 보여준다.
마치 사이보그처럼 페페의 머리 안에는 카메라가 작게 그려져 있다.
바로 눈부분에.
뭔가 기계 페페인 것 같아서 조금 섬뜩한 느낌이 있기도 했다.
“진짜 카메라가 있네.”
“여기 페페 속이야.”
페페 안에는 심장도 있고 폐도 있는 거 아니었나?
텅텅 비어있는데 카메라만 덜렁 있다.
뭐, 집중되어서 좋네.
이런 거 생각하며 그리느라 오래 걸렸구나?
“시하가 그림으로 영화 만드러써.”
“그렇구나.”
“여기 옷 만드는 페페야. 구리고 여기 회사언 페페. 감덩님 영화에 나오는 회사언이야.”
“오옹!”
“여기 옷이 페페 옷이야.”
“그렇네?!”
“다음에는 케이크 만드는 페페랑 쓰레기 차 모는 페페야.”
“그렇네.”
“다 가치 이써. 다 가치.”
“!!!”
“감덩님 영화에 사람 마니 나와. 재미써. 다 달라.”
같이 영화는 봤지만 시하가 저런 재밌는 요소요소들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연 재미를 느꼈는지 몰랐다.
물론 자기 나오는 장면 기다리느라고 재밌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코믹한 장면도 나왔으니까.
특히 김석현 배우의 몸개그 같은 것 말이다.
“다 가툰데 다 달라.”
어쩌면 영화를 관통하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다 똑같은 회사원인데 뭔가 다른 것.
뭔가 같은 것.
어쩌면 시하는 그런 요소요소들을 파악한 것 아닐까.
오히려 잘 모르기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여러 사람이 나오고, 가족이 나오고, 누군가는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아빠랑 만나서 냄새난다고 타박하고.
그런 아우러진 일상들이 시하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아마 이 그림에 담겨있지 않을까.
“형아. 이제 올려?”
“아니. 편집 좀 하고 올릴게. 시하 생각은 잘 알았어.”
어리기 때문에 뭣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더 잘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투명한 눈동자가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을 잘 비추는 걸지도.
나는 그저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의 세상은 이렇구나.
***
오랜만에 시하페페의 채널에 영상이 올라왔다.
오리지널 페페가 정면을 보며 서 있다.
[안녕하세요. 시하페페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오늘의 그림 제목은 ‘Kino-Eye’입니다.]
[그럼 재밌게 봐주세요.]
페페의 눈 채색이 제일 마지막에 되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좀 더 신경 쓰고 있다.
그리고 완성된 채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카메라 렌즈랑 똑같다고.
완성된 페페의 두 눈은 카메라의 렌즈를 달고 있다.
평소와는 달랐다.
영상은 그런 카메라 속으로 슝 하고 들어간다.
그리고 나오는 흰 배경.
[두 번째 그림.]
확신을 주기 위해 페페의 옆모습이 나온다.
눈이 카메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페페 머리 안에는 카메라만 덜렁 그려져 있다.
[세 번째 그림]
가위로 두 개의 천을 잡고 무언가 만들고 있는 페페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페페가 그려진다.
한 도화지에 말이다.
페페가 가진 두 개의 천 색깔이 정장과 넥타이의 색이 같다.
가위 든 페페의 위에는 간판이 그려진다.
[LSH]
그리고 정장 주머니에도 LSH가 작게 새겨진다.
같은 브랜드라는 걸 암시한다.
[네 번째 그림.]
케이크 만드는 페페.
주변에 남은 크림 같은 음식물이 통에 담긴다.
그 옆에는 음식물 수거차의 옆모습.
안에는 페페가 차를 몰고 있다.
영상은 채색으로 막바지에 이르렀고 별다른 설명의 자막이 없었다.
다만 한줄기의 글만 남겼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서로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영상은 끝이 났고 [구독]과 [좋아요]의 표지판이 둥둥 떠 있다.
-와 시하페페 이번에는 자막 별로 없네?
-대박!
-확실히 이번 그림 컨셉을 보여준 듯. 마지막 자막이 다 했네.
-근데 영상 제목의 키노-아이가 뭐임?
영상의 제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나왔다.
답글도 달렸지만 그냥 댓글에서도 이미 설명하는 사람 천지였다.
원래 그렇다.
-키노-아이 이론. 베르토프가 주장함.
세상을 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카메라라는 기계가 곧 감독의 눈이 되어야 한다고.
뭐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고 그냥 내 시선을 당신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됨.
자세한 건 찾아보시고.
내 생각에는 막 새로운 시각은 아니고 그저 시하페페가 바라본 세상은 이렇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쓴 제목이 아닐까 싶음.
-오! 시하페페!! 근데 몰라도 되는 거구나. 이미 하고 싶은 말은 말했으니까.
-그렇지 뭐
해석가도 댓글에 참여했다.
[이미 시사페페 작가가 말한 것으로 이런 뜻이구나 대단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하페페 작가의 대단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바로 장면의 구성에 있다!
키노-아이 이론을 저기 페페 그림에 눈으로 표현했다는 점!
사실 키노-아이라고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친절하게 언급한 거다.
더 빨리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첫 시작의 이야기부터 렌즈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제목이 없었다면, 이라고 가정해 보자.
더 많은 사람이 첫 번째 그림만 보고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기 두 번째 그림에서 키노-아이 이론이라고 확신을 주는데 확실히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그림이다.
우리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라보기’
이런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그런 메시지는 던져 준 적 없다.
그저 시하가 보는 시선에서의 ‘바라보기’다.
[세 번째 그림에서는 우리는 ‘연결’을 보았다.
사실 한 장소에 함께 있을 수 없을 터인 두 사람이다.
옷을 만드는 사람.
그 옷을 입고 회사를 가는 사람.
하지만 사실상 옷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하페페는 두 사람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세계 산다고 말한다.]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의도했지만 시하는 한 장소에 있는 연출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네 컷 만화라고 생각해서 네 개로 그리려다 보니 두 페페를 한곳에 있게 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그림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만드는데.
누군가는 그 음식물을 처리하고 있다.
이 이질적인 그림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다.
그래도 역시나 우리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준다.
서로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따뜻한 사랑.
언제나 그의 그림은 이런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다.]
시혁은 생각한다.
이 사람 댓글 다 긁어서 모으면 논문 한 편이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
서수현에게서 톡이 왔다.
-서수현 : 오빠! 오빠!
-시혁 : ?
-서수현 : 나 관객 시사회 떨어졌어ㅠㅠ
-서수현 : 개봉까지 기다려야 해? ㅠㅠ
-시혁 : 얼마 안 남았으니까 기다리면 되지.
-서수현 : 오빠. 시하만 찍은 영상 있죠? 그거 보내줘.
-시혁 : 내가 왜??? 너 또 단톡에 올릴 거지?
-서수현 : (머리에 꿀밤 하며 혀 내미는 개구리 이모티콘)
-시혁 : 죽는다. 진짜.
-서수현 : 내가 그렇게 막 퍼트리고 하는 사람 아니거든???
-시혁 : 응. 너 사람 아니고 개구리ㅎ
-서수현 : 이 오빠가 진짜!
-시혁 : 임티도 개구리면서... 이쯤 되면 즐기고 있는 거 아니냐?
-서수현 : (입이 모자이크되어 있으며 마치 욕하는 것 같은 개구리 임티)
-서수현 : 앗! 잘못 눌림
서수현이 메시지를 삭제했다.
-시혁 : 일부러 그런 거 다 들켰거든요?
-서수현 : 아니... 진짜 잘못 눌렸어요... 히잉
-시혁 : 개굴 하고 울라고 했다...
-서수현 : (모자이크되어 있는 손가락을 올리는 개구리 이모티콘)
-서수현 : 어엇? 잘못 올라갔다... ㅈㅅㅈㅅ... ㅠㅠ;;;
-시혁 : 너 좀 보자. 집에 와라.
-서수현 : 오빠... 나 너튜브 작업해야 하거든? 나중에 연락할게!!! ㅃㅃ
-시혁 : 어디가!! 좋은 말로 할 때 일로 와라...
-서수현 : (홍대맛집 컵케이크 기프티콘)
-서수현 : 개굴개굴
-시혁 : 하... 이번만 넘어간다...
-시혁 : 선물로 넘어가는 거 아니다... 개굴개굴로 넘어가는 줄 알아...
그렇게 톡을 마무리하는데 시하가 달려온다.
형아를 부르며 폭 안긴다.
“형아. 형아. 형아.”
“응. 한 번만 불러도 형아는 여기 있어.”
“형아도 회사 가?”
“응? 왜?”
“형아눈 언래 노투북으로 일하자나. 군데 영화에서 회사 가.”
“아…. 그렇지. 형아도 회사 가.”
“???”
“몰랐어? 전에 일하러 외국 갔을 때도 회사에서 가라고 한 거야.”
“형아 맨날 영어 썼는데?”
“뭐, 그렇지.”
박한수 사장님이 시키는 게 번역과 잡무니까.
회사에서는 잡무랑 번역 일도 잠깐 하고.
혹시 외국에서 연락 오면 영어로 응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막 하는 일이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형아. 군데 영화는 언제 나와?”
“아. 5월 30일에 개봉한대.”
“개봉? 시하 개봉은 모르고 따봉은 아라! 따봉!”
시하가 엄지를 척, 하고 든다.
그래. 따봉은 아는구나?
그거 어디서 들었어? 요즘 따봉 같은 거 안 쓸 텐데?
“삼춘!”
시하가 삼촌에게 달려간다.
아무래도 영화 개봉일을 물어본 건 삼촌이 영화 봐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긴 시사회에도 오지 않았으니까.
“왜?”
삼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있다.
“삼춘! 영화 보꺼야? 안 바짜나.”
“나 봤는데?”
“거짓말!”
“진짠데? 봐봐. 시하 시사회에도 삼촌이 왔었어.”
“거짓말! 시하 삼춘 못 바써.”
“아니야. 시하 시사회 때 이벤트도 했잖아. 삼촌이 사진도 찍었는걸?”
“정말?!”
시하야. 그걸 또 믿니?
삼촌이 씨익 웃으면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시하의 얼굴이 이상하게 호빵처럼 되어 있는 사진.
저거 전에 내가 단톡에 보내준 사진인데 진짜 앱으로 얼굴을 저리 만들었구나?
“너 사진 엄청 못 나왔어. 푸하하.”
“아? 시하 얼굴 아냐.”
“호빵처럼 나왔잖아. 푸하하. 여기 봐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지?”
“!!!”
앱으로 효과도 넣었나 보다.
“시하 아냐. 시하 아냐.”
“푸하하. 다른 사람들이 시하 호빵으로 봤겠네.”
“잉잉! 시하 아냐!”
어떻게 놀릴 생각만 가득한 삼촌이었다.
뭐, 저렇게 놀릴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