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확인해 보니까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할 수 있어서 도슨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물론 도슨트 투어 같은 것도 있었지만 굳이 해야 하나 싶었다.
일단 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도록 예약하고 오디오도 예약했다.
근데 김석현 배우가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자기도 가고 싶다고 해서 고감독과 몇몇 가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 출발했다.
이 정도면 도슨트 투어를 신청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냥 몇몇만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했다.
“시하야. 여기가 루브르 박물관이야.”
“!!!”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장엄한 입구의 건축물들이 우리를 반겼다.
유럽의 예스러운 건축 양식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기둥들.
시하는 그걸 보며.
“성이다. 성.”
“응.”
성치고는 높이가 낮다. 물론 굉장히 커 보이는 건축물이지만 성이라고 하면 정말 하늘에 닿을 듯하게 솟아 있어야 하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신전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시하는 아직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만화를 안 봤구나.
아마 글을 읽을 줄 알면 재밌게 만화로 되어있는 걸 읽을 것이다.
의외로 그냥 책보다 학습지 만화 같은 게 훨씬 더 기억하기 쉬운 것 같다.
“형아. 저거 모야?”
“응. 저건 유리 피라미드야. 루브르 박물관에 오면 꼭 보는 거지.”
“유리! 피라미드는 시하 아라. 세모야. 세모.”
“푸흡.”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세모로 되어 있긴 하지. 입체적으로 봤을 때는 저걸 세모로만 이뤄져 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저기가 입장하는 데다.”
“사람 마나!”
지금 8시 30분인데 다들 부지런하다.
아니, 저기요? 입장이 9시인데요?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삼촌이 또 흰소리를 시작한다.
“저기 유리 피라미드 있지?”
“저게 왜?”
“저기 세모가 눕혀져 있잖아. 근데 나중에 여기 루브르 박물관이 부서질 위기가 오면 저게 촤악 하고 열린다?”
“정말?”
“그리고 안에는 로보트 태권 브이가 나와.”
아니, 뭔 프랑스에 로보트 태권 브이가 있어?! 뭐 프랑스랑 한국이 프한 연합을 맺어서 군사적으로 지원해 주는 거야?
그리고 피라미드가 열린다니. 국회의사당이 열린다는 거랑 같은 급이네.
“아? 그게 모야?”
우리 시하는 세대 차이가 있어서 그런 만화를 모른다.
삼촌도 회심의 드립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통한 걸 알았는지 그냥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로봇이 나온다는 거지.”
“로봇?!”
“지이잉. 움직여서 펀치랑 킥을 날려.”
“시하 킥! 시하 킥! 시하 펀치. 시하 펀치. 이케 해?”
시하야. 시하 로봇도 아닌데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니?
그리고 킥인데 왜 주먹을 날리는지 모르겠다.
펀치가 주먹을 날리는 건 맞는데 말이다.
혹시 회심의 페이크인가. 역시 우리 시하는 천재네.
“오! 문 열린다.”
입장하자마자 가이드 오디오를 받았다.
이제부터 신나게 돌아다녀 보자.
근데 사람들이 황급히 어딘가 가는 걸 보니 뭔가 지금 봐야 하는 게 따로 있나 보다.
따라가 보니 모나리자가 보였다.
다들 사진 찍기 바쁜데 저게 뭔가 싶었다.
사진으로만 남기면 되는 것인가. 바글바글해서 그림을 제대로 감상도 못 하는데.
“형아. 엄청난 거 이써?”
“응?”
삼촌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눈썹이 없으신 분이 계시네. 뭐 보이지도 않고. 감상도 안 되고.”
“눈썹 업써?”
“없다. 볼래?”
“볼래.”
삼촌이 시하를 들어서 저 멀리 있는 곳을 보게 했다.
시하는 눈을 껌뻑껌뻑 떴다.
“눈썹 없지?”
“업써? 이써? 모르게써.”
“뭐 그렇지.”
원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주 얇게 그렸다고 했었나?
그런 설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저 때의 미인이래.”
“눈썹 업는 게?”
“아니. 그건 아니고. 이마 넓은 게 미인이래. 눈썹은 당연히 있지.”
아무리 그래도 눈썹이 없으면 좀 그렇지 않겠니?
“음. 천천히 몇 개만 집어서 볼까?”
“응!”
여기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다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오전에는 대략 시하가 흥미를 가지거나 좋아할 만한 곳들을 골라 둘러볼 예정이다.
나도 잘 아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유명한 작품들만 볼 생각이었다.
양팔과 머리가 없는 니케의 여신상.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쓰러진 사람들 위로 깃발을 들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물론 시하가 여기에 대한 역사나 그런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괜히 루브르 박물관에 왔나?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하로 가자.”
그래서 그림보다는 조각이나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물들을 돌아보았다.
막 빨리 가지는 않았다.
그저 많은 그림과 인상만 남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넓은 곳을 다 둘러보는 건 욕심이었다.
“밥 먹고 오후에는 뭐 하게?”
“오후에는 미술관 하나 더 가보려고요.”
“응? 미술관을 또?”
“네. 오르셰 미술관에 잠깐 갔다와요.”
“거긴 왜?”
거기에 그 사람의 작품이 있다.
클로드 모네.
시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었다.
***
오르셰 미술관.
어쩌면 일반인들은 루브르 박물관보다 여기에 처음 가는 게 좋았다.
그 정도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많았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르 드가, 반고흐, 로댕 등등.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지만 시하에게는 그냥 처음 듣는 이름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는 그림 중에 시하에게 모네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대의 인상에 집중한 사람이 마네라면 클로드 모네는 빛의 인상에 집중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림들을 보면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시하랑 분명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에 프라모델을 만들 때 색에 관해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설레발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빛의 인상이라는 그림을 시하의 눈에 한 번쯤은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화가로 키울 건 아니지만.’
시하가 하고 싶은 걸 하기 바란다.
하지만 시하가 미술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지금도 충분히 재능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그냥 오늘 하루는 미술관을 천천히 구경했다.
막 돌아다니며 여러 개를 보지는 않았다.
그냥 하나하나 천천히 머리에 남는 게 있을 수 있도록 돌아다녔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가슴에 엄청난 자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그랬다.
작품은 기억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남기는 거라고.
어디서 읽은 한 구절인데 그 문장이 강렬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도 그냥 그런 마음이다.
“어때? 시하야. 이게 모네의 작품이야. 클로드 모네라는 인상파 화가인데.”
“모네? 모내기?”
“모내기도 알아?”
“시하 다 아라.”
“모내기가 뭔데?”
“모 내지? 하고 내기 해? 가위바위보?”
단어만 들었지 그 단어의 뜻은 모르는구나.
어디서 들은 게 있다는 것이 저것일까?
“형아. 인상파가 모야? 인상 써?”
시하가 눈썹에 힘을 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겼다.
아니. 그런 인상 쓰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 아니야.
“음. 어떤 부분을 확 드러내는 걸 말한다고 할까? 여기 그림 봐봐. 빛의 인상에 대해서 그린 거야. 모네는 빛이 이렇게 보였나 봐.”
“빛? 반짝반짝?”
“응.”
“반짝반짝 보여써?”
“그런가 봐.”
시하가 고개를 돌려 모네의 작품을 빤히 보았다.
나는 그게 웃겼다.
루브르 박물관보다 나는 여기가 더 재밌는데.
시하는 다 재밌어해서 다행이었다.
“여기는 마네 작품. 여기는 드가라는 사람의 작품.”
사실 막 다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급하게 공부해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누구 작품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모네.”
“오. 맞았어.”
모네 작품은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럼 이건?”
“모네 아냐.”
“오?”
오귀스트 르누아르 작품.
이것도 빛의 인상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인간에 관한 관심이 나타나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가 잘 보인다.
하지만 모네는 풍경의 빛을 소중히 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드가야. 마네야.”
나는 시하에게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말해줬던 사람들의 작품을 다 구별할 줄 알았다.
마치 미술관이 퀴즈 시간인 듯이 즐겁게 맞춘다.
솔직히 나는 놀라웠다.
물론 각 화가의 그림은 인상을 정해서 그려놓은 거기도 하고 익숙해지면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근데 시하는 오늘 그림을 처음 본 거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놀라워했다.
우리 시하 천재인가?! 아니지. 괜한 설레발일 수도 있어. 근데 천재인 거 같아!
“애가 눈이 좋군.”
갑자기 옆에서 한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외국인은 아니었다. 귀에 한국어가 꽂혔으니까.
“한국 사람?”
“아. 미안하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었고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눈은 뭔가 힘없이 내려가 있었는데 우울한 느낌을 많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술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그저 이별한 사람처럼 눈빛만 슬퍼 보였으니까.
“아니에요. 그냥 제 지인이 아닌 사람에게서 한국말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이럴 줄 알았으면 프랑스어로 할 걸 그랬네. 나는 여기 살고 있거든.”
“아, 그러시구나.”
“말 걸 생각 없었는데 아이가 너무 좋은 눈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그럼. 나도 화가라서 알지. 어릴 때 저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좋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건 그렇죠.”
“그래도 대단한 거지. 아마 이름 알려주지 않은 작품들도 다 구분하고 있을걸?”
나는 시하를 보았다.
요거랑 요거 가타. 막 그런 말이 들려온다.
“시슬레는 모네랑 비슷한 색감을 가지고 있지. 저기 전시되어 있어.”
“아…….”
시하가 ‘형아. 이거 모네 아냐. 비스테. 군데 아냐.’ 하고 말한다.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시하를 보았다.
따뜻한 웃음을 보였는데 그 순간 슬픈 감정이 얼굴에서 지워졌다.
저런 얼굴도 되는구나 싶었다.
“시슬레는 모네보다 좀 더 펴서 바르는 터치를 하지.”
“아, 그렇군요.”
“물론 그런 설명은 저 아이에게 필요 없는 거긴 하지만.”
구분하기 위한 정보들은 시하에게 필요 없었다.
그냥 구분하니까.
정보를 받아서 눈으로 보고 이건 이거네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보면 안다.
생각해 보면 맞추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런 구분하는 눈도 대단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다르긴 하네.’
보다 보니 다른 게 눈에 보인다.
삼촌이 어느새 시하 곁에 바짝 붙어서 눈을 가늘게 뜨며 여길 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와서 경계하는 모습이다.
모습이 꼭 주인을 지키는 개다.
뭔가 개라는 어감이 좀 그래서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저렇게 구분하고 맞추면 미술관이 재밌지.”
“아는 게 많으면 좀 더 즐길 수 있으니까요. 영화도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의도 같은 거 말이다.
카메라 무빙, 배치된 사물들이 뜻하는 바, 대사 속에 숨겨진 속뜻, 인물 간의 대화는 없지만 눈빛 속에 담은 시그널 등등.
풍자하는 카메라 표현의 방식들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알고 나면 영화를 보는 게 더 풍부해진다.
나는 저 사람의 말에 미술관 역시도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좀 재밌다고 느낄 수 있던 것은 시하에게 뭘 보여줄지 고민하고 찾아봐서 그런 것이었다.
아는 게 좀 있게 되니까 가능한 일.
물론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네. 나는 배상현이라고 하네.”
“이시혁입니다.”
“이시혁. 좋은 이름이야. 아. 내가 초면에 반말을 해버렸어. 아니. 어요. 미안해요. 뭐라고 해야 하지. 편한 것도 있는데 오랜만에 한국 사람이랑 이야기 나눈 거라.”
“아. 여기 사신다고 했죠?”
“그래요.”
오래 살면 그럴 수 있지.
사실 반말하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불친절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배상현이 말했다.
“근데 많이 아는 것도 때로는 안 좋아.”
“네?”
“너무 현실을 잘 알아서. 때로는 안 좋기도 하더라고. 아, 미안해요. 너무 쓸데없는 말이었죠? 괜히 처음 본 사람 불편하게. 그럼 갈게요. 아이 재능있다고 너무 이쪽으로 가게 하지 말고.”
“아…….”
“제가 화가인데 이 바닥이 너무 힘들어서. 암튼, 그래서 괜한 말을 걸었네요.”
“아니에요.”
“그럼.”
“아, 네.”
뭔가 이런 만남도 있나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시하는 천재다! 암튼 천재다!
“형아.”
“응?”
“아찌 얼굴에 털 마나.”
“응. 그랬네.”
삼촌이 다가와서 말했다.
“시혁아.”
“네?”
“이상하지는 않았어? 쏠까?”
삼촌이 가슴 주머니를 톡톡 두드린다.
이 사람이 큰일 낼 사람일세. 쏘긴 뭘 쏴?
그리고 언제 어디서 총을 받아서 챙겼어요?
저 사람보다 삼촌이 훨씬 미스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