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어느 정도 고기와 술이 들어가자 된장찌개를 시켰다.
고기 몇 점을 된장찌개에 투하하더니 고감독님이 역시 석현이는 밥을 먹을 줄 안다면서 칭찬을 했다.
나는 밥을 입에 넣고 먹다가 살짝 느껴지던 어지럼증이 가셨는지 입에서 정상적인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근데 정말 밥만 먹으려고 부르셨어요?”
그 말에 고감독님이 커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물 한 잔 마신 후에.
“사실 같이 프랑스에 놀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어.”
“예? 놀러요?”
“물론 칸 영화제도 같이 참가하는 거지.”
“네? 제가 왜요?”
“시하 부모님으로 참석하면 되잖아. 이제 칸에 가는데 자리 한 개 정도는 받을 수 있어. 시하는 무릎 위에 앉히면 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배우도 관계자도 아닌데 레드카펫에 서는 건 좀.”
“아, 그렇지. 같이 들어가기 그럴 수 있지. 근데 통역사로 같이 간다는 거면?”
“네에?!”
“사실 나도 그렇긴 해. 뭐 엄청난 상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통역사 데려가는 게 좀 그럴 수 있지.”
“그렇죠?”
“그래도 아주 뒤에 불리지 않을까? 나 자신 있다.”
“아니.”
칸 영화제.
이름이 호명되지 않을수록 뒤에 대단한 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것도 아닌데 통역사를 데리고 가는 것도 이상할 수 있다.
거기 통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른 나라 감독님들도 각자 자국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면 준비된 통역사가 프랑스어로 번역해 준다.
자국어를 말해도 아무 상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과연 상관없는 것만으로 끝날 일일까?
그런 질문을 던지면 곤란하다.
많은 나라가 있고 거기에 번역을 하는데 하자가 없을 리가 있나.
제작사랑 배급사랑 헷갈려서 통역하는 경우도 봐왔다.
“그러니까 혹시 뉘앙스나 단어를 틀리게 통역할지도 모르잖아.”
“뭐, 통역사 데려가는 게 이상하지는 않긴 하죠.”
“그러니까. 심지어 아까 프랑스어가 참 유창하게 들리네?”
“에이. 겨우 그거 가지고 어떻게 알아요.”
“내가 프랑스어는 못 하는데 프랑스 영화는 많이 봐서 알아. 발음이 상당했어.”
“하하하.”
“사실 아까 듣기 전까지는 같이 프랑스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뭐 이런 마음이었거든? 근데 이런 통역이면 전혀 다르지.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인데.”
아무래도 아까 프랑스어를 내뱉은 게 화근이 되었나 보다.
어? 칸까지는 좀 데려가기 힘들 것 같은데 같이 영화도 찍고 번역도 고생한 사이니까 함께 힐링 여행 갈 만하지 않나? 배우들이랑 함께.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근데 내 프랑스어를 듣고 나서 칸까지 데려가서 통역사라는 그럴듯한 감투를 주면 되지 않나 싶은 것이다.
물론 시하는 문제없다.
영화의 배우로 나온 거니까.
“근데 시하는 잠깐 나온 건데.”
“그 잠깐이 얼마나 중요한 암시를 하는데.”
“배우들도 있고.”
“에이. 대부분 오는데 못 오는 배우들도 많아. 스케줄이 안 된다고. 뭐가 그리 급하다고 벌써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대.”
뭐 모든 사람의 스케줄을 맞출 수 없는 거다.
원래 데려가야 할 인원수에서 빵꾸가 좀 났는데 한두 명쯤은 채워도 문제없다는 이야기다.
“여기 돈 있어도 쉽게 갈 수 없어. 일반인도 마찬가지고.”
“그건 알고 있어요. 근데 회사도 있고.”
“그래서 지금 3월에 물어보는 거잖아. 5월에 프랑스에서 놀다가 칸에 쫙 차려입고 가는 거지. 시하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걸?”
“으음.”
하긴 5월에 칸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는 게 도움이 될 거다.
시하가 5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뭐 여러 가지 프랑스에서 놀고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인종차별을 당하면 엄청 열 받을 것 같지만.
“프랑스에는 루브르 박물관도 있었죠?”
“오! 관심 있어?”
“아니. 뭐. 시하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우리도 아주 도움이 돼. 프랑스어 되잖아. 도슨트 말을 딱딱 듣는 거지.”
“거기라면 영어로 잘 말해 주지 않을까요?”
“영어로 듣는 거랑 한국어로 듣는 거랑 편한 게 같나. 어차피 한국어로 통역해야 할걸? 시하가 못 알아듣잖아.”
함께 가서 내 통역을 듣겠단 소리군.
잠깐만. 이 정도면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통역 관광으로 일하러 가는 거 아니야?
내가 무언가 깨닫고 지긋이 보더니 고감독이 찔끔해서 눈을 돌렸다.
김석현이 내 어깨를 잡았다.
“하하하. 우리 감독님 바빠서 그렇게 같이 못 놀아요.”
“그래요?”
“농담. 영화 끝나면 이런 백수가 없어요.”
“야!”
고감독이 김석현을 손가락질한다.
아무리 봐도 둘이 엄청 친하다. 근데 백수라고? 어쩐지 삼촌이랑 친하더라.
둘이 공통점이 있었구만.
고감독이 당당하게 말한다.
“휴식이야. 휴식. 나 새 작품도 구상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안 믿네?”
“믿죠! 당연히 믿죠. 그래야 제가 감독님께 또 불리지 않겠습니까.”
“이거, 이거 완전 세속적인 이유네. 꺼져 임마. 다시는 너 안 불러.”
“감독님. 저는 언제나 함께 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영어도 되잖아요. 함께 돌아다닐 맛 나지 않겠어요?”
김석현 배우의 뻔뻔한 모습도 잘 봤다.
어찌 되었든 조금 고민이 되었다.
5월이면 이래저래 정리될 시기이기는 한데.
그 전까지 번역 일은 좀 마무리하면 될 것이고.
사실 이런 핑계로 해외여행을 한번 가보고 싶긴 했다.
전에 박한수 사장님이랑 일하러 갔을 때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으니까. 시하도 없었고.
“비용은 우리 회사가 다 내는데. 배우들이랑 스태프들이랑 같이 놀기도 하고.”
“좋네요. 가는 거로 할게요.”
고감독님! 그것부터 말했어야죠!
뭔 이것저것 말하면서 설득을 합니까! 예?!
거절하기에는 공짜에 혹해버렸다.
괜히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흠흠. 일단 사장님에게 이야기 좀 해보고요.”
“그래. 그래. 얼른 해. 지금 해.”
“아니. 뭔. 으음. 일단 톡만 남겨 볼게요.”
[고동수 감독님에게 5월에 프랑스 같이 놀러 가 칸 영화제에 참석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혹시 그때 연차 다 쓰고 휴가도 쓰고 그래도 될까요? 출근 거의 못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퇴사할까요?]
뭔가 적어서 보내다 보니까 협박하는 거로 보이는데?
-박한수 사장 : ?!?!?!
-박한수 사장 : 아니 고동수 감독님?! 헐?! ㅠㅠㅠ 나 완전 팬인데. 거기 김석현 배우도 우리 아내가 좋아하고. 칸 영화제 간다고?! 무조건 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통역사로 참가하는 거야? 어? 그런 거야? 와, 씨! 대박! 나중에 싸인도 받고 배우들 싸인도 받아줘. 회사는 괜찮아. 이제 안정적이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돌아가지. 제발 퇴사는 하지 말자ㅠㅠ 한 달에 하루만 출근해도 돼. 그러니까 제발ㅠㅠㅠ
“어휴. 무슨 장문을.”
단답이 나왔다가 마음이 급해지셨는지 엄청난 장문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고감독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뭐라고 왔는데?”
“어…. 팬이라서 괜찮다는데요?”
“하! 석현아. 봐봐. 나 아직 안 죽었어!”
김석현이 역시 감독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저 다음에 출연시켜줄 거죠? 라고 다시 한번 딜을 시도했다.
고감독님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다.
둘이 정말 잘 노네.
“근데 마지막으로 회장님에게 허가를 받아야 해요.”
“어? 사장이 오케이 하면 된 거 아니야? 거기 회사 회장님에게도 오케이 받아야 해? 근데 회사가 어디라고 했지? 대기업?”
“아뇨. 제 옆에 시하 회장님이요.”
옆에서 냉면을 쪼르르 먹고 있는 시하를 모두가 바라보았다.
“아?”
“시하야. 프랑스라는 외국에 가서 한 열 밤 정도 놀 건데 괜찮아? 영화도 보고 미술관도 가고 그럴 건데.”
“형아랑 가치?”
“응. 형아랑 같이.”
“구럼 갠차나. 시하는 형아랑 가치면 다 갠차나.”
그때 삼촌이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하야. 삼촌은? 삼촌은 같이 가냐고 안 물어봐?”
“삼춘은 드라마 보느라 바빠. 구래서 집에 이써.”
“야! 내가 무슨 맨날 드라마만 보는 줄 알아?”
“예능도 봐!”
“그래 맞아! 이게 아니지! 나도 같이 갔으면 하지? 그렇지?”
“삼춘 집 잘 지키고 이써야 해.”
“야! 집 팔 거거든.”
“안 대!”
시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구러면 삼춘. 비행기 가치 타자. 집 팔지 마.”
“진작 그럴 것이지.”
“군데 시하 집 사면 집 파라도 대.”
삼촌이 이거 웃긴 애네 하면서 쳐다보았다.
“그럼 만약 시하가 집 샀어. 그리고 외국 갈 상황이지. 그럼 삼촌도 같이 가는 거야?”
“구럼 시하 열 밤이나 생각해 보께.”
“뭔 고민을 열 밤씩이나 해!”
“아라써. 시하가 서이 밤 해주께. 싸게 해주께.”
“그래. 고오~맙다!”
삼촌이 그런 시하를 보면서 밥을 푹푹 먹었다.
시하가 저렇게 말해도 아마 삼촌을 꼭 데려갈 것이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으니까.
집을 잘 지키라는 말만 해도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대변하는 것이다.
고감독이 말했다.
“그럼 회장님 허가도 떨어졌으니까 가는 거로.”
“아, 네.”
그렇게 우리의 프랑스행이 결정되었다.
***
실컷 먹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술 때문에 알딸딸해서 아까는 생각 못 했는데 칸 영화제에 들어갈 때 삼촌은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 삼촌.”
“응?”
“삼촌은 관계자가 아니니까 들어갈 수 없지 않아요?”
“괜찮아. 같이 레드카펫에는 못 올라가도 같이 들어는 갈 거야.”
“???”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지?
무슨 수로?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자기 폰을 흔들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
“아, 네.”
“아마 경호원으로 있을 것 같긴 한데.”
“아. 경호원. 응? 그런 것도 돼요?”
“응. 총기도 소지하겠지. 사실 총기 소지도 하려는 마음이 커.”
프랑스가 총기 허용국가이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새끼들. 괜히 인종 차별하면 머리에 바람구멍 내줄 거야. 어디 우리 시하를.”
“제발 영화제에서 정말 첩보 영화는 찍지 맙시다. 알았죠?”
“내가 그 정도 구분은 할 줄 알아. 어? 막 사람들 다 쳐다보는 데서 쏘지는 않는다고. 무슨 소문이 나려고.”
왜 나는 저 말이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곳에는 총을 쏘겠다는 말 같지? 내 착각인가?
삼촌이 손을 흔들며 전화를 하러 나간다.
나는 그사이에 시하를 씻겼다.
“삼춘!”
“어?”
“어디 가따 와?”
“잠시 밖에서 전화 좀 했지.”
“안 대. 삼춘 지베서 전화해야지.”
“왜?”
“삼춘 집 잘 지키고 이써야 해.”
“또 그 얘기야.”
“삼춘 맨날 집에 이짜나. 집 지키고 이써서 그래. 삼춘 일이야.”
“내가 맨날 집에 있는 건 맞지. 그래도 나 운동도 하러 나가고 그래.”
“안 대. 지베서 해야 해.”
삼촌이 어이없다는 듯이 시하를 쳐다보았다.
시하야. 그거 완전 집 지키는 개 아니냐?
삼촌이 언제부터 애완동물이 된 거야?
아니지. 앙마니까 애완앙마인가?
“근데 삼촌 어디 갔는지 그렇게 신경 쓰였어? 그랬어?”
시하가 모른 척 도도도 달려가 소파에 앉는다.
삼촌이 감 잡았다는 듯이 히죽 웃는다.
“왜 말을 못 해?”
“모가?”
“아. 부끄러운가 보지? 그렇지?”
저렇게 얄밉게 하면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
괜히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다.
어쩜 이렇게 놀리는 각을 잘 보지? 저것도 엄청난 재능인데?
“삼춘. 프랑스 가 바써?”
말을 돌리는데 삼촌이 이거 한 번 넘어가 준다는 식으로 웃는다.
“가봤지. 삼촌이 정말 많은 나라를 가본 사람이야.”
“정말? 구럼 프랑스어 할 줄 아라?”
“뭐, 조금? 진짜 조금. 봉쥬르~ 하면 돼.”
“봉쥬루?”
“안녕이라는 말이지.”
“구러면 프랑스에 머 이써?”
“파리가 있지.”
“!!!”
“엄청 크고 좋지. 파리.”
“!!!”
시하가 팔을 활짝 벌렸다.
“파리 엄청 커?”
“크지?”
어라? 뭔가 대화가 어긋나지 않나?
서로 다른 말 하는 거 같은데?
“파리 조아? 차캐?”
“으음? 좋은데. 착한 건 모르겠다.”
“조은 파리야.”
시하가 말하는 건 똥파리 말하는 거 같은데.
삼촌은 별생각 없이 말하고 있다.
“밤에 보면 더 예뻐. 번쩍번쩍 빛나.”
“!!!”
“에펠탑도 멋있게 빛나지. 에이 모양으로 빛나지.”
삼촌이 팔을 삼각형으로 세워서 에이를 만들었다.
시하는.
“엄청나! 대다내!”
“그럼 대단하지.”
아마 시하의 머릿속에는 엄청 크고 좋은 똥파리가 A자 형태의 빛을 번쩍번쩍 빛내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저기요? 이제 눈치 좀 채시죠? 서로 다른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 파리는 그 파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