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빵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개수보다는 양이 많은 것 같다. 여름이라면 절대 이렇게 사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방치되어서 다 못 먹었을 테니까.
오늘부터 빵과의 전쟁일지도 모르겠다.
“킁킁. 뭐 맛있는 냄새 나는데?”
삼촌이 빵 냄새를 맡았는지 귀신같이 다가온다.
이상하네. 분명 비닐에 포장되어 있는데 어떻게 맡은 거지?
“네. 빵 사 왔어요.”
“손에 케이크 상자가 있는데?”
“하하하.”
결국 시하는 내 빵으로 작은 케이크를 골랐다.
사실 큰 케이크를 선택하려다가 내가 절대 다 못 먹는다니까 아쉬운 표정으로 작은 케이크를 골랐다.
생일도 아닌데 웬 케이크인가 싶다.
“삼춘. 이거 형아 꺼야. 시하가 골라써.”
“아. 네가 고른 거야?”
“마자. 시하도 롤케익 골라써.”
“그럼 삼촌 것도 있겠네?”
“이써!”
시하가 자신 있게 빵 봉지를 뒤적거리다가 단팥빵을 꺼냈다.
돼지 모양에 눈이 못됐게 생긴 그거.
심지어 3개나 골랐다.
“삼춘 꺼.”
삼촌이 내 빵과 시하 빵 그리고 삼촌 빵을 바라본다.
그리고 시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번갈아서 찬찬히 빵을 본다.
“야. 왜 나만 돼지야? 왜 나만 싼 거냐고. 어?”
“삼춘. 바바. 이거 삼춘 달마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삼춘. 형아가 머시써. 구러니까 케이크지. 그다음에 시하가 더 머시쑤니까 롤케익이야. 그다음에 삼춘!”
“아니. 가격 차이가 심하잖아.”
“아냐. 삼춘. 이거 바. 서이 개.”
“3개가 중요하냐!”
암! 시하에게는 3개가 중요하지.
그리고 시하가 다른 빵도 꺼냈다.
오늘 서비스로 아줌마가 두 개 챙겨주셨다.
“이거 삼춘 꺼. 공짜로 져써.”
“그러니까 0원이네?”
뭐 굳이 금전적으로 따지자면 0원이기는 했다.
하지만 양적으로 보면 많다!
삼촌이 이걸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지만.
괜히 그렇잖아. 우리 둘은 화려한데 삼촌은 뭔가 소박해 보이는 느낌.
“흐음.”
“삼춘 마시께찌?”
“응. 맛있겠네. 하하하. 좋아! 그럼 내가 이거 다 먹어야지.”
“아? 아냐. 이거 시하 꺼야.”
“시하 이거 다 못 먹잖아.”
“아냐. 시하 다 머글 수 이써.”
“하지만 삼촌은 집에만 있어서 시하 꺼 다 뺏어 먹어야지.”
삼촌이 시하의 손에 있는 롤케익을 뺏어서 입을 크게 벌린다.
아그작아그작 먹는 시늉을 한다.
시하가 손을 위로 뻗으며 콩콩 뛴다.
“시하 꺼야.”
“시하가 남기면 삼촌이 다 먹어야지. 하하!”
“잉잉!”
결국 시하를 또 놀리는 거로 되었다.
뭐 삼촌이라면 단팥빵도 좋아할 거고 케이크도 좋아하시겠지.
“삼촌. 시하 거 놔두고 제 케익 좀 드세요. 저 혼자 못 먹어요.”
“으음. 싫은데?”
“왜요?”
“넌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하는 태도라서?”
“그게 뭔 개떡 같은 이유예요. 이거 못 먹고 버리게 되면 삼촌이 혼날 줄 아세요.”
“아니 왜? 내가 왜? 내가 고른 것도 아닌데?”
“다 못 드시면 매끼 빵이에요.”
“그건 아니다!”
“케이크에 김치 올려 먹고 싶지 않으면 꼭 드세요. 알았죠?”
“?!”
내가 제대로 한 방 먹였는지 시하는 옆에서 ‘형아 대다내! 형아 머시써!’ 하고 말하고 있다.
이런 거로 대단하고 멋있음을 받아도 되나?
의문이 든다.
삼촌이 말했다.
“쩝. 단팥빵이나 먹어야겠다.”
“대지야. 대지.”
“시하야. 너 이 빵 보고 말하는 거지?”
“대지빵.”
“뭔가 속은 거 같은데?”
시하의 말하는 타이밍이 좀 그런 게 있다.
뭔가 이중적인 의미인 듯한 느낌이.
응. 악의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
3월 중 어느 날에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고동수 감독님이 한번 보자고 했다.
정확히는 먼저 연락이 온 건 김석현 배우였지만 이래저래 같이 만나서 밥 한 끼 하자는 말이었다.
시하도 데려가도 되냐는 말에 흔쾌히 오케이 하셨고 혹시나 싶어서 삼촌도 데려가도 되냐는 말에 이것도 오케이 하셨다.
설마 이것까지 허락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는데 별 신경 안 쓰는 모습에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처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가 불편하거나 어색하기 마련인데 별로 고민 하나 안 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대단했다.
털털하다면 털털한 모습인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세심하게 챙겨나가는 모습이 상반된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
“어? 여기. 여기.”
고동수 감독이 손을 흔드셨다.
나 역시도 번역 작업을 하면서 꽤 친해져서 어색하지 않다.
안 본 지 꽤 되어서 어색할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듯싶다.
자리에 앉으면서 여기는 삼촌이라고 소개해줬는데 김석현 배우와 고감독이 놀란 눈치다.
그도 그럴 게 외국인이 떡하니 등장할 줄 몰랐을 테니까.
“삼촌이라고 하길래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내가 편견이 있었네. 반가워요. 고동수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이먼드 톰슨입니다.”
“아이고야. 톰슨 씨. 혹시 술은 좀 하십니까?”
“상대가 없어서 못 먹죠.”
삼촌이 나를 힐끗 보았다.
고동수 감독도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킬킬거리셨다.
“애가 있으면 그렇죠. 뭐. 하하. 오늘은 저도 상대가 있어서 마실 수 있겠네요?”
“따라오실 수 있습니까?”
“어허. 굉장히 위험한 도발인데요? 아십니까? 한국에는 함부로 힘 부심, 게임 부심이나 술 부심 부리면 안 됩니다.”
“전 됩니다. 아, 게임은 빼고.”
“이야.”
고감독과 삼촌은 처음 봤는데 아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역시 술 들어가면 친해진다더니. 아니. 아직 술이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나는 옆을 보았다.
고기를 미리 시켜뒀는지 김석현 배우가 열심히 굽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우리 언제까지 존댓말 해요? 우리 친구 아닌가?”
“아닌데요.”
“아니구나. 나만 그렇게 생각했구나.”
“하핳. 농담이에요. 농담.”
“그럼 반말로 할까요? 아! 오늘 술 마실 수 있어?”
“조금만요. 차도 안 들고 오기도 했고.”
“좋네. 아! 안녕 시하야.”
“안녀하세여.”
“어이구. 우리 아들.”
“아들 아니에여. 시하 영하에서 아들 아니자나여. 연주가 딸이 자나여.”
“그걸 다 기억해?”
“시하 똑똑해여. 형아 달마쑤니까.”
“푸핫. 진짜 똑똑하네.”
내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에서 시하는 악역의 아들로 잠깐 나오는 역할이다.
아쉽게도 김석현 배우와는 접전이 없다.
연주라면 또 몰라도.
아무튼, 우리 시하는 날 닮아서 똑똑하다!
“여기 소시지가 먼저 다 구워졌거든. 시하 많이 배고프지? 이거 먹어.”
“고맙숩니다. 마시써!”
“너. 아직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어.”
김석현 배우가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나는 뭐 여기 카메라 있는 줄 알았네. 완전 리액션이 기계야. 기계.”
“시하 사람인데여?”
“어? 어, 그래. 사람이지. 사람.”
시하가 그렇게 말하며 소시지를 냠, 하고 먹었다.
맛있는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띵-동-
나는 벨을 울렸다.
고기는 미리 시켜뒀어도 술은 미리 시키지 않았으니까.
“여기 맥주 두 병이랑 소주 두 병 주세요. 그리고 혹시 쿨피스도 있으면 하나 주시고요. 없으면 사이다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맥주랑 소주는 뭐로 드릴까요?”
우리는 대충 상표를 시키고 술을 따랐다.
삼촌과 고감독이 역시 술은 소맥이지! 하면서 함께 마음을 맞춘다.
아니 오늘 둘이 처음 본 사람들 맞죠?
술로 하나 되는 문화의 신비함.
하긴 삼촌과 나는 집들이 때 이후로 오랜만의 술일 것이다.
어디 가서 내가 술 상대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시하가 있어서 되도록 안 마시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외식할 때는 꼭 차를 끌고 가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에 입도 안 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같이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 차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냥 택시 탈 생각이다.
“형아. 소맥이 모야?”
삼촌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꼬꼬마는 몰라도 돼.”
“아냐. 시하 마출 수 이써.”
“그래. 맞춰봐라. 소맥이 뭐게?”
“소랑.”
역시 소가 나올 줄 알았다.
근데 시하야. 동물인 소가 아니라 소주의 소야. 형아가 아까 소주랑 맥주 시켰지 않니?
아무래도 까먹은 모양이었다.
“맥은. 맥은.”
맥은 뭐 없지. 솔직히 끝말잇기를 해도 쉽지 않은 첫 글자였다.
한참을 ‘맥’만 외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말했다.
“맥반석 계란?”
“푸흡.”
소와 맥반석 계란의 조합. 합쳐서 소맥.
대체 무슨 조합인 거야?
“소고기랑 맥반석 계란이랑 가치 머거. 마시써!”
“같이 먹어보지 않았지만 맛은 없지는 않겠다.”
삼촌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성실하게 이야기해줬다.
고감독님과 김석현 배우는 시하가 귀여운지 아빠 미소를 하고 있다.
“음. 시하야. 소맥은 말이야. 여기 소주랑 맥주랑 섞은 거야.”
“!!!”
“뭐 섞으면 맛있어서 먹는데.”
이런 거 가르쳐줘도 되나?
뭐 마시지는 않겠지만 엄청 쓸데없는 지식 같은데.
아니. 뭐, 나중에라도 알게 될 건데.
“형아. 형아도 머거?”
“어? 어. 나도 먹지.”
“구럼 시하도 머글래.”
“아니. 시하는 아직 술 마시면 안 되지. 경찰 아저씨한테 혼난다?”
“아냐. 시하 술 말고. 쿨사 마실래. 쿨사.”
“쿨사는 뭐야?”
“쿨피스랑 사이다.”
그걸 섞어 먹겠다고?
아니,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긴 한데. 화채에도 그렇게 먹는 경우가 있긴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섞어 먹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먹고 싶은가 보다.
그러면 사이다가 소주처럼 투명하니까 소주만큼 부으면 되는 건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게 한다.
삼촌은 재밌겠다면서 사이다도 한 병 시킨다.
저기요? 술도 안 드셨는데 벌써 취하셨습니까?
“형아! 쿨사야!”
“응. 그러네.”
기어코 쿨사를 제조했다.
우리는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쳤다.
시하가 꼴깍꼴깍 열심히 마신다.
“형아. 쿨피스 맛이야? 왜지?”
그거야. 쿨피스를 많이 탔으니까 그렇겠지.
“탄산은 안 느껴져?”
“목이 보글보글 안 해.”
“아니야. 자세히 마셔봐.”
“보글보글?”
뭔가 탄산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나 보다.
“고기나 먹자.”
“아라써.”
다 구워진 고기를 먹는다.
김석현 배우는 또 고기를 올리고 자기도 먹는다.
내가 하겠다고 하니까 시하 열심히 먹이라고 말한다.
누가 정해 주지도 않았는데도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영화에 나온 대본처럼 말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인간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김석현 배우가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뭐가요?”
“언어를 많이 하잖아. 그것도 매일 훈련하나 싶어서.”
“네. 해요. 아침에 요리하면서 안 잊어먹게 하고 있죠. 보통 뉴스를 좀 틀어둬요. 지루하면 노래를 틀기도 하고.”
“오! 대박. 평소에 노력하는구나.”
“다들 그럴걸요? 섀도잉으로 따라 말하기도 하고.”
“이번 5월에 칸 영화제를 가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칸에 초청되었다고 들었다. 5월에 칸에서 개봉하고 상도 받을 수 있으면 좋고.
그리고 한국에서 개봉해서 스코어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
“칸은 프랑스잖아. 혹시 프랑스어도 해? 번역할 때 영어만 했다고 들었는데 프랑스어도 할 줄 아나 싶어서.”
“프랑스어는.”
뭔가 말하려고 할 때 폰이 있는 허벅지에서 찌릿한 느낌이 왔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내 입은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이 튀어나왔는데 변형이 되어버렸다.
「못 하는데요? 으음. 할 수 있게 되었나? 하하」
이렇게 되면 잠시간은 프랑스어가 저절로 튀어나오게 되겠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어야겠다.
김석현 배우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헐. 대박!”
본의 아니게 고기 먹다가 퍼포먼스를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