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는 달. 3월.
날씨는 맑고 푸른 하늘이 보이며 딱 놀러 가기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졸업한 대학교에 왔다.
시하의 어린이집이 강인대학교에 있기도 했고, 또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가 학교 운동장에서 모이기도 해서 그렇다.
늘 그렇듯 풋살장에 모였는데 오늘은 삼촌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풍경으로 느껴진다.
모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래도 꽤 같이 공도 차고 그랬다.
시하도 좋고 승준도 좋으니까.
“흠흠. 오늘은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에 삼촌이 왔습니다. 자, 박수!”
짝짝짝.
사실 동호회라면 이것보다 많아야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어린이집 남자애들도 참가하면 좋으련만.
다들 관심사가 달라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뭐, 나야 좋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축구를 하는데 이 인원수면 좀.
그래서 축구장이 아니라 풋살장에서 놀긴 하지만.
승준이 흥분한 얼굴로 삼촌을 본다.
“우와! 그럼 시하 삼촌은 우리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에 가입하는 거예요?”
“어? 뭐. 모르겠는데?”
“가입하세요. 여기 오세요. 시하 삼촌은 백수잖아요. 그러니까 가입해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삼촌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백수에게 백수라고 하면 뭔가 좀 그렇지 않나?
맞는 말인데 괜히 집구석에서 놀고 있는 한심한 놈이니 이런 거라도 가입하라고 한 것 같은 느낌.
뭐 승준이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닐 것이다.
여유 있으시니 가입하시면 어떨까요?
이 정도 뉘앙스였겠지.
하지만 받아들이는 삼촌 표정을 볼 때 괜히 전자로 느껴지는 게 틀림없다.
“너희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 백수 아니야. 나 엄연히 직업 있는 사람이야.”
“그러면 월화수목금 요일에 일 가요?”
“아니. 안 가지.”
“토요일이랑 일요일은요?”
“안 가지.”
“???”
“???”
“백수 맞잖아.”
“아니.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아니거든?”
“일 안 하잖아요. 맞죠?”
“어. 맞아.”
“???”
나는 승준과 삼촌의 대화를 보며 푸흡 하고 웃었다.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였다.
최근에 알았는데 실제로 삼촌은 한국에서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진짜진짜 놀라운 사실이었다.
근데 일을 안 가고 따박따박 월급도 받는 것도 진짜였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으면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승준아. 삼춘 백수 아냐.”
“어? 아니야? 분명 말만 들으면 맞는데?”
그거야. 그렇지. 근데 시하야. 삼촌이 백수 아니라는 점을 믿었구나? 의외인데?
“돈 마는 백수야.”
“아하!”
아니! 그걸로 정정한다고?!
하긴 그냥 백수랑 돈 많은 백수랑 건물주 백수랑은 차원이 다르긴 하지.
삼촌은 이 부분에서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입맛만 다시다가.
“그래! 삼촌은 돈 많은 백수다!”
“역시!”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나 보다.
그리고 땅에 있는 축구공을 들더니.
“그리고 축구 잘하고 돈 많은 백수다.”
“!!!”
“내가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에 가입해 주지.”
“그건 제가 생각해 볼게요.”
“어?”
“가입하려면 사커 좀 알아야 하는데 시하 삼촌이 얼마나 아는지 좀 봐야겠어요. 그리고 시하랑 이야기해서 들어오게 할지 말지 정할게요.”
아까까지는 신청하면 받아줄 줄 알았는데 가입 심사가 있었다.
승준이 사커에 대해서 진심이구나.
삼촌이 씨익 웃었다.
“심사야. 별거 아니지. 잘 봐.”
뻥!
축구공이 그림 같이 골대에 들어갔다.
시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삼촌이 축구를 잘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삼촌의 운동신경이 나쁠 리가 없다.
직업이 직업이니까 말이다.
“아직 호루라기 안 불었는데 볼을 차면 어떡해요.”
“강적이네. 너?”
사커에 진심인 승준.
룰은 지켜야 한다!
뭐 그건 그렇고 오늘은 가입 심사 놀이를 할 건가 보다.
“먼저 볼을 가지고 달리기. 볼이랑 친해야 해요.”
“마자! 삼춘. 공이랑 이야기도 해야 해. 친해져야 해. 친구야. 친구.”
시하야. 친해진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니야.
너 아직도 그렇게 친해지면 축구가 잘해진다고 믿는 거야?
“공이랑 친해지는 건 마구 때리라는 거지.”
“???”
삼촌이 골대에 공을 빼서 마구마구 슛을 하기 시작했다.
캬캬캬 하는 사악한 웃음소리를 일부러 내신다.
“안 대! 소중히 해야지!”
“삼촌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거 신경 안 써!”
퍽. 퍽. 퍽.
저 공이 살아있었으면 굉장히 폭력적인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경찰에 폭행죄로 잡혀갔을지도.
“공 하고 달리기도 잘해.”
공을 가지고 드리블을 한다.
승준이에게 슬금슬금 다가간다. 뭐 애들 상대로 진심을 내지 않겠지만.
“간다! 뺏어봐.”
“이얏!”
삼촌이 공을 가지고 전력으로 달린다.
내가 좀 착각했나 보다. 우리 삼촌은 애들 상대로 진심을 발휘하는 타입이다.
그러고 보니 놀리는 데 진심이었지…….
“헐. 엄청 빨라!”
“삼춘 빠르다! 집에서 맨날 나무늘보인데!”
“어쩔 수 없네. 가입 허락해 줄게요.”
“시하도 허락하께.”
삼촌이 어이없다는 듯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저렇게 말하면 마치 정말 가입하고 싶어서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제발 가입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되지 않나?
이렇게 열심히 한 건 애들을 놀리기 위해서였지 필사적으로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럼. 시혁이 형아. 오늘은 뭐 해?”
“형아. 모해?”
“시혁아. 얘들 너무 웃긴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린이집 애들이 마이페이스가 강하긴 해요. 시하를 포함해서요.
소수정예의 어린이집이라서 더 그런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스트라이커에게 제일 중요한 훈련을 할 거야.”
“???”
“상황은 이래. 현재 결승전에서 썬더 사커팀이 전반전과 후반전 동점 상황으로 끝났어. 그리고 연장전도 다 썼어. 그다음은 뭘 하지?”
“승부차기!”
“맞아. 승부차기를 하는 거야.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어. 제발 이겨달라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달라고. 그렇게 두 손 모아 빌고 있어.”
“!!!”
“엄청난 부담감이 어깨에 얹어져 있어.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골을 넣어야 하는 게 바로 사커 선수야!”
“!!!”
승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엄청난 상황 설명에 눈을 빛냈다.
시하는 뭔지 모르겠는지 눈을 깜빡 떴다.
아무튼, 이런 상황 설명이 축구를 더 재밌게 할 수 있다.
“자. 상대는 나쁜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골키퍼 삼촌이 있어.”
“형아. 나뿐데 칭찬 바다?”
“응. 골키퍼를 너무 잘하는 적이니까 나빠 보이지? 그래서 그래. 우리 팀이었으면 착해 보였을 텐데. 비유야. 비유. 진짜 나쁜 사람은 아니지.”
“!!!”
시하가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삼촌은 자신이 골키퍼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는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나? 그렇게 드리블과 슛으로 가입시켜 놓고 골키퍼? 골키퍼?”
“제가 정했으니 그렇게 아세요.”
“헐?”
어찌 되었든 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스토리를 주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더 흥미진진하게 하지.
그냥 훈련은 재미없다. 그렇다고 인터벌 달리기처럼 탄력적으로 진짜 훈련시킬 수 없지 않나.
이게 헬스도 아니고 그냥 공차면서 노는 건데.
훈련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재밌게 노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그렇게 시작된 승부차기.
제1팀 : 시하, 승준, 시혁.
제2팀 : 삼촌.
삼촌이 동호회에 가입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적으로 설정해 뒀다.
“나 먼저!”
승준이 제일 먼저 나섰다.
삼촌이 씨익 웃으며 골대 앞에 선다.
“자. 차 봐.”
“이얏!”
인사이드로 차는 공.
오른발에 맞아서 쭉 뻗어 나간다.
하지만 삼촌은 손쉽게 공을 막는다.
툭. 데구르르.
“별거 아니네.”
“앗!”
“다음은 내가 찰 차례지?”
그렇게 말하며 진심을 찬다.
나도 살짝 놓쳐버려서 한 골 먹혔다.
삼촌이 앞에서 좋아하는데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아니! 애들한테 져 주라고요!
이거 위기에 몰리게 만들어서 져 주는 패턴이죠? 그렇죠? 믿을게요?!
아무래도 내가 적팀이었어야 했나 살며시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시하. 시하야. 잘해.”
“아라써!”
시하가 삼촌을 보았다.
1 대 1 승부의 세계.
“삼춘. 안 보여. 비켜 바.”
“야. 골키퍼가 골대에서 비키면 어떡해.”
“삼춘. 골대가 자가서 안 보이자나. 비켜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풋살장 골대가 축구장 골대보다 작긴 했으니까.
“안 되거든?”
“구러면 시하 좀 더 아페서 찰래.”
“왜?”
“골대가 자가. 구러면 더 아페서 차도 대자나.”
“안 되거든?”
“치사해! 나빠!”
“시하 네가 하는 말이 더 치사하거든? 왜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하마터면 내가 진짜 치사한가? 그렇게 생각할 뻔했네.”
나도 순간 ‘와, 삼촌 치사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른과 아이의 승부니까 저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구럼 간다.”
“그래. 빨리 좀 와라.”
“진짜 간다.”
“그래! 입으로 축구 하니?”
“마자!”
그걸 또 인정하는 이시하.
어마어마하구나.
시하가 정말로 공을 찼다. 이제는 5살이라서 그런지 전과 다르게 꽤 힘 있게 날아간다.
하지만 그래도 애가 찬 공이다.
삼촌에게 손쉽게 막혔다.
“삼촌은 또 골을 넣어야지.”
“형아. 잘 막아져.”
삼촌의 차례가 왔다.
나도 이제 방심하지 않고 집중해서 공을 막았다.
삼촌이 혀를 찼지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골대가 작아서 그렇지 컸으면 못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승부차기는 골키퍼에게 굉장히 불리한 싸움이니까.
나도 공 찰 준비를 했다.
이번에 한 골 넣어야 동점 상황을 만들 수 있다.
“형아. 하팅!”
“시혁이 형아. 파이팅!”
이거 스토리 상황을 내가 만들긴 했지만 왜 내가 부담감을 느끼는 거지?
실제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흠흠.”
괜히 목을 가다듬고 공을 찼다.
삼촌이 아주 헐리우드 액션으로 공을 찬 곳과 반대로 몸을 움직였다.
골.
근데 골대가 작아서 저렇게 안 움직여도 되는데?
너무 일부러 져 주는 게 티가 나서 시하가 한마디 했다.
“삼춘! 일부러 그랬지? 왜 형아만 바져?”
“아닌데?”
“아냐. 시하 다 바써. 형아 안 바져도 골 넣는데 왜 바져써.”
“안 봐줬다니까.”
“거짓말!”
저렇게 골이 들어가니 김빠지기는 한다.
아니! 애들한테 그렇게 해주지 왜 나한테? 아, 잠깐만. 일부러 저러신 거 같은데. 실실 웃는 모습이 확신을 들게 한다.
그건 시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표정. 이제는 잘 구분할 수 있으니까.
“자. 시하야. 잘 생각해봐. 형아는 엄청난 실력자지?”
“마자.”
“그러니까 우리 둘이 눈으로 엄청난 심리전을 한 거야. 분명 시혁이가 왼쪽으로 차려고 했거든? 근데 공이 오른쪽으로 가네? 그러면 삼촌이 바로 낚여서 골이 먹힌 거지.”
“정말?”
“그럼. 삼촌이 시혁이한테 완전히 속은 거지.”
“!!!”
시하야. 그걸 또 믿니? 맨날 속으면서 왜 또 속아?
하지만 별말을 하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삼촌에게 또 속은 이시하. 그렇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나도 다시 한번 삼촌의 공을 막으며 확실히 동점 상황을 만들었다.
“이제. 진짜 중요해. 골 넣어야 해. 알았지?”
“시혀기 형아. 나 진짜 잘 찰게!”
나는 골키퍼를 하는 삼촌에게 가서 옆구리를 푹 찔렀다.
“좀 봐줘요.”
“왜?”
“삼촌 계속 그러면 오늘 저녁밥 없어요.”
“아, 그건 너무 치사하잖아.”
“애들 상대로 진심 내는 삼촌이 더 치사하거든요?”
“왜? 재밌잖아? 아! 알았어. 알았어. 봐주면 되는 거지?”
“네.”
자리로 돌아가 삼촌이 선언했다.
“나 한 발로 서서 막을게. 그래도 다 막을 수 있을 거야. 푸하하!”
그렇게 도발을 걸면서 핸디캡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저 정도면 괜찮은데?
헐리우드 액션보다는 훨씬 낫다.
“이제 넣는다!”
뻥! 골이었다.
“시하도!”
뻥! 골이었다.
그렇게 삼촌은 어쩔 수 없이 패배했다.
“우와와와! 시하야!”
“아싸!”
어떻게 보면 위기를 기회로 만든 상황이 연출되었으니 기쁨도 2배였다.
“쩝. 내가 이기려고 했는데. 저녁밥 때문에.”
뭐, 삼촌은 아쉬움 2배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