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튤립과 장미.
상대적으로 접기 쉬운 튤립 쪽으로 재휘가 성큼성큼 갔다.
어렵다는 것에 지레 겁먹는 타입.
하지만 재휘가 좋아하는 연주는 장미 쪽으로 갈까 싶다가 재휘가 튤립으로 가길래 살며시 따라갔다.
늘 재휘가 따라와 줬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한 번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연주야. 연주도 튤립이야?”
“응. 튤립이 이쁘지 않아?”
“어? 그래? 연주 튤립 좋아하는구나. 응!”
그 말 그대로 믿어버리는 재휘는 바보였다.
사실은 그냥 재휘가 좋아서 온 건대.
“그럼 난 장미!”
승준이 장미 쪽으로 간다.
스트라이커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피하면 안 된다. 오히려 더더욱 골을 넣어야 하는 법.
이번에도 스트라이커 기질을 발휘한다.
“하나는 그럼 튤립! 하나는 그냥 쉬운 거 할래.”
“어려운 거 안 하네.”
“오빠. 나 오빠랑 따로 하고 싶은 거거든.”
“헐?”
5살이 되니 점점 현실 남매 쌍둥이가 되어가고 있는 둘이다.
성향의 차이도 있었다.
“그럼 나는 당연히 장미. 어려운 거 하나쯤은 할 수 있어야지.”
종수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쉬운 튤립을 할 수 없었다.
윤동은 살며시 주위를 보다가 은우를 돌아보았다.
“너 어디 할 거야?”
“아무거나 좋은데? 튤립 할까? 발음이 더 어렵잖아. 푸하하!”
래퍼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 딕션. 발음이 안 된다고 괜히 피하면 안 된다.
은우는 그저 단순히 발음이 어렵다고 튤립을 선택했다.
윤동은 장미 쪽에 사람이 적은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갔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편의 쪽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일손이 부족한 쪽으로 선택한다.
윤동이 말은 별로 안 하지만 은근히 남을 돕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선택을 했다.
“자! 여러분. 다 선택했으면 하나씩 배워 볼게요. 먼저 튤립 접는 건 원장선생님이 잘 가르쳐줄 거고, 장미는 이 유다희 선생님이 가르쳐줄 거예요!”
튤립은 빨간 색종이를 사용했다.
의외로 장미는 사용하지 않았다.
“장미는 노란색을 사용할 거예요.”
“왜요?”
“노란 장미의 뜻이 완벽한 성취라는 뜻이에요. 여기 대학교에서 모든 공부를 완벽하게 다 했다는 뜻이랍니다. 좋죠?”
“네!”
장미는 색마다 의미가 따로 있다.
선생님은 그 점을 신경 써서 노란색으로 만들었다.
유다희 선생님의 말을 들은 하나가 원장선생님을 보았다.
“원장쌤. 튤립은 뭐 없어요?”
“튤립도 있단다. 영원한 애정.”
“영원한 애정!”
하나가 눈을 반짝였다.
사랑이 들어간 이야기는 하나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으니까.
속으로 튤립을 선택하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조금 어렵겠지만 열심히 접어볼까요?”
아이들이 너도나도 튤립과 장미를 선생님을 따라 접기 시작했다.
다 같이 한 단계씩 열심히 접었다.
스스로 하게. 누구도 뒤처지지 않게. 천천히. 천천히.
그에 반해 시하는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완성해나가는 학위복을 입은 페페.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굉장히 집중하고 있었다.
***
2월 졸업식 날이 왔다.
이 강인대학교에 입학할 때가 떠오른다.
공부에 완전 올인해서 빨리 학점을 최대한 따고 취업을 해야겠다.
아버지께 번듯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사원증 목에 걸며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첫 월급을 받아서 부모님께 선물을 주겠다.
그런 걸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막 입학을 했지만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게 못내 이상했다.
졸업식에 가지 말고 그냥 학위만 받고 갈까 싶었다.
뭐 특별히 강당에서 무언가 들으며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졸업식에 꼭 가라고 회사 오지 말라고 해서 가기는 간다.
“어? 오빠! 오빠!”
“응?”
“졸업식 왔네요? 안 올 줄 알았는데.”
“와야지.”
같은 학년인 서수현도 졸업이다.
중간에 휴학 한 번 할 만한데도 그냥 다이렉트로 졸업해 버린다.
여자애들은 휴학하면서 어학연수 다녀오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도 많던데 서수현은 그러지 않았다.
뭐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취업으로 빨리 가는 여자애들도 많다.
“오빠. 오늘 끝나면 다 같이 사진 찍어요.”
“응. 그러자.”
“어차피 한 번뿐인 졸업식인데 사진 안 찍으면 완전 손해 아니에요?”
“그럼 저 밖에 돌아다니시는 사진사 아저씨 붙잡아.”
“어후. 나는 그거는 좀 그렇더라. 뭔가 비싸서 아까운 느낌? 요즘 폰도 좋고 인쇄도 잘되는데 굳이?”
“음. 사진사들 실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히 잘 찍는 사람은 잘 찍더라.”
“그것도 그래요. 근데 저희가 저 사진사분 사진을 본 적은 없잖아요? 심지어 여러 명 계신대.”
“일리가 있네.”
우리가 저 사진사분을 처음 봤는데 실력이 어떤지 어떻게 알 것인가.
“근데 의외다?”
“뭐가요?”
“수현이 바보 아니네.”
“아니. 뭔.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연히 바보 아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앞에서 소리쳤다.
“우리 수현이 바보 아니다!”
“아! 쫌!”
“근데 은근 좋아한다?”
“누가요? 누가!”
아닌데. 볼이 빨개져 있는데? 부끄러워서 빨개진 건가?
근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나는 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 없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어쩌면 졸업하는 거라서 들뜬 건지도 모른다.
“입은 왜 씰룩여서 착각하게 해. 바보라 해서 좋아하는 줄 알았네.”
“바보라고 해서 좋아한 거 아니거든요. 이 오빠가 진짜.”
“자자. 진정하고 들어가자.”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학과장이 4학년 대표에게 학위를 수여하고 짧은 덕담을 이야기했다.
“너무 길면 여러분 잠 오잖아요. 그렇죠?”
“아니요! 아니에요!”
“더해 주세요!”
“이미 고등학교 때까지 단련되었어요!”
학과장님이 그 말에 웃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단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래. 다들 사진 찍고 시간 보내야지. 밥도 한 끼 먹으러 가고. 시간 되는 사람은 술 한잔도 할 거고.”
“네!”
“그러니까. 나 마지막에 너희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기고 싶다.”
“푸하하.”
“졸업 축하한다! 앞으로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잘 해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학과장이 내려오고 4학년 과대가 올라온다.
축하의 말을 하고 술집 한 곳을 예약했으니 혹시 괜찮으면 다 같이 가자고 한다.
강요는 아니니 따로 갈 사람은 따로 간도 된다고 한다.
옆에 있던 서수현이 물었다.
“오빠. 오빠는 갈 거예요?”
“아니. 안 갈 건데?”
“왜요? 또 일하게요? 이런 날 좀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그래야지. 앞으로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요?”
“어이가 없네. 나 일하고 있거든?”
“아, 맞다. 맞네. 사회 생활하니까 여기 안 오는 거네.”
“뭐, 그런 게 아니라 갈 때가 있어서.”
“네? 어디요?”
“그게…. 어?”
그때였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어린이집 아이들이 쪼르르 일자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앗! 시혁이 오빠 나왔다!”
하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비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린이집 아이들, 선생님들, 시하, 삼촌, 백동환, 문도환.
전부 와 있었다.
“시혁이 오빠. 이거!”
“시혁이 형아. 이거!”
한 송이 튤립과 장미.
색종이로 만들어져서 아이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중히 시들지 않는 꽃들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시하가 등 뒤로 꽃다발을 숨기고 있었는데 뒤에 포장지를 다 가릴 수 없어서 다 보였다.
“형아. 졸업 추카해!”
시하가 꽃다발을 주었다.
분명 포장지는 꽃다발이 맞는데 안에는 학위복을 입고 있는 페페가 들어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저게 뭐야.
“정말 고마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꽃다발이네?”
“정말?”
“응. 엄청 특별한 꽃다발이야.”
시하의 꽃다발에 7개의 꽃을 꽂아놓았다.
인형과 종이꽃이 어우러져 있어서 보기 좋았다.
문도환도 백동환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이게 뭐라고.”
“와야지. 나도 이 졸업에 지분 있다.”
“형은 지분 있는 거 인정.”
초반에 많이 도와준 문도환 형.
여러모로 조언도 해주고 고마운 형이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일에 제가 빠질 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선배에게 부랴부랴 좋은 카메라도 가져왔다고요!”
“고맙긴 한데 카메라는 왜?”
왜 굳이 그걸 빌려와?
“자. 자. 다 같이 서보세요. 사진 찍읍시다.”
보니까 다른 친구들도 졸업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우리 말고 다른 학과들도 이런 풍경을 보이겠지? 알리사도 패디과에서 엄청 찍고 있을 것이다. 우리처럼 학과장님이 빨리 끝내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그렇고 오늘 기점으로 서로 취업 준비를 하고 혹은 취업을 해서 연락이 뜸해지겠지.
그래서 마지막 대학 생활을 기념하여 이렇게 사진을 찍는 것 같다.
찰칵!
우리는 함께, 시하랑 둘이, 삼촌과 셋이.
그렇게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충분히 찍어서 괜찮을 때쯤.
“동환아.”
“예?”
“사진기 좀 나 하루만 빌려줄래?”
“얼마든지요. 근데 어디 가시나요? 갑자기 사진기는 왜?”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보러.”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다들 이해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
납골당.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안치되어 있다.
손에는 학위증이 있는데 앞에서 뭐라고 말할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나 오늘 졸업했어. 봐봐. 학위증이야…….”
나는 졸업식이 싫었다.
아버지가 오시는 건 좋았지만 다들 어머니가 오시니까.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오시니까.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래도 대학교 졸업식은 기대하고 있었다.
아. 이 졸업식만은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겠구나. 그건 좀 기대가 되는데? 나도 구성원이 다 있는 졸업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가? 뭐, 그런 생각에 히죽 웃기도 했다.
“대학 졸업하는 거 보고 싶어 했잖아. 나랑 같이 사진 찍는 거 바랬잖아. 읍.”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원래라면 우리는 여기가 아니라 대학교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야 할 텐데. 그랬을 예정이었을 텐데.
“그래서 나. 흐윽. 같이 졸업 사진 찍으러 왔어. 이거 흐윽. 같이 찍고 싶어서. 나. 꽃다발 못 받을 줄 알았는데. 흐윽. 다들 나 챙겨줘서. 삼촌도 챙겨줘서.”
일할 때면 그렇게 말을 잘했는데 아버지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너무 고마워서.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닦고 다시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 시하도 진짜 잘 지내. 진짜 처음에는 돈도 없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지금은 삼촌도 있고 나 엄청 일도 많이 들어와서 잘 벌어. 막 남들처럼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하 잘 키울 수 있을 정도는 돼. 그러니까. 그러니까.”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이제 안심해도 돼요. 나 진짜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것저것 생각나는 걸 말했다.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근데 또 말은 잘 안 나와서 답답하고 슬프고 그랬다.
“우리 이제 사진 찍자.”
나는 눈물을 닦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하는 삼촌의 손을 잡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형아.”
“응.”
“울지 마.”
“응. 안 울어. 안 울어. 시하도 같이 찍어야지.”
“응.”
“삼촌. 부탁해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하려다가 미안하다고 한마디를 뱉는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나는 미안할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럼 찍는다?”
“응. 시하야. 꽃다발이랑 학위증 좀 들고 있을래?”
“응.”
나는 시하를 품에 안아 올렸다.
분명 졸업식에서 아버지가 시하를 안아 올리며 같이 사진을 찍었을 테니까.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찰칵. 찰칵.
세 번의 셔터음이 울리며 사진을 다 찍었다.
삼촌은 나온 사진을 확인했다.
“여기 조명이.”
“왜요? 잘 나오지 않았어요?”
“아니. 뭔가 희미하게 파란 조명하고 분홍 조명이 유리에 좀 비치는 것 같아서. 여기 조명 색은 아닌데?”
“근데 예쁜 거 같은데요?”
“그렇지? 신기하네. 딱 사진 하나만 이러네.”
“그러게요. 예쁘다.”
이상하게 이 사진을 보니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졸업 축하한다. 시혁아. 장혁이도 아주 좋아하고 있을 거야.”
“그렇겠죠?”
이것으로 나의 2월 졸업식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