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오늘도 시혁은 일 때문에 시하를 데리러 가지 못했다.
그래서 삼촌이 시하를 데리러 왔다.
“시하야.”
삼촌의 목소리에 시하는 방에서 도도도 달리며 나왔다.
“삼춘! 왜 이리 빨리 와써?”
“원래 이 시간에 데리러 오잖아?”
“삼춘은 열심히 잠자고 있쑤니까 늦게 와.”
“늦잠 자는 건 맞는데 너 데리고 못 올 정도로 계속 자지는 않아. 겨울잠도 아니고.”
삼촌의 말에서 아는 단어가 나왔는지 시하가 바로 반응했다.
“시하 겨울잠 아라. 곰이 아 추어. 보일러 틀어야지! 아 따뚜테. 따뚜타니까 잠 오네? 자야지. 하고 자고 일어났는데 어? 봄이 대어써여. 해.”
“뭔 곰이 보일러를 틀어?”
“요즘에 보일러 튼대.”
“너. 삼촌 놀리려고 그런 말 하는 거지? 아직 멀었네.”
“왜?”
“따뜻하면 겨울잠을 안 자지. 집도 동굴이라 보일러도 없어.”
“정말?”
“정말이지. 털가죽이 너무 따뜻해서 보일러가 필요 없어. 그리고 겨울에 계속 잠만 자는 게 아니라 일어나서 미리 보관해둔 귤을 까먹지.”
“귤?!”
곰이 귤을 까먹는다.
시하의 머리에 어느새 입력되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티비 보면서 귤 까먹지.”
“군데 동굴인데 티비 못 보자나. 전기 업써. 시하 다 아라.”
“동굴이니까 오히려 볼 수 있지. 영화관 어두운 것 봤지?”
“바써.”
“그거 사실 동굴로 만든 거야.”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시하가 믿어버렸다.
삼촌이 또 속냐는 웃음을 보이자 그제야 정신 차린다.
“삼춘 거짓말!”
“아닌데? 진짠데?”
“삼춘 얼굴 이상해써. 시하 다 아라. 거짓말이야. 거짓말.”
“이제 내 표정 보고 다 맞추네.”
이제 시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구분할 줄 안다.
왜냐.
“시하 5살이니까. 이제 다 아라. 파박 다 아라.”
“5살은 표정을 읽을 줄 아는 나이야?”
거짓말 탐지기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능력인데?
5살이 대체 뭐길래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야?
삼촌이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런 게 포커페이스라는 거야. 이러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지.”
“시하 또 놀리려고 하지?”
“어? 어떻게 알았어?”
“시하 5살이야. 다 아라.”
삼촌은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라는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보았다.
저런 모습이 귀여워서 매번 놀리긴 하지만.
“이제 가자. 가방 싸.”
“삼춘. 여기서 기다려야 해. 알아찌? 기다려!”
“내가 개야?”
“아? 삼춘 개 아니고 백수자나.”
“…….”
삼촌은 시하의 펙트에 할 말을 잃었다.
나 백수처럼 보여도 엄연히 직업이 있는데.
하지만 노는 것도 사실.
시하는 그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방을 가지러 쏙 들어갔다.
“나가 있어야겠다.”
삼촌은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시하가 삼춘 어디써! 기다리라고 했짜나! 하면서 소리친다.
“시하가 너무 오래 걸려서 삼촌 먼저 갈게. 시하는 알아서 와. 알았지? 하하하!”
“잉잉!”
시하가 신발을 낑낑거리며 신고 밖으로 나온다.
삼촌이 진짜 저 멀리서 달리며 손을 흔든다.
“삼춘! 시하랑 가치 가야지!”
“시하는 다 컸으니까 혼자 와야지. 5살이잖아!”
“시하 10살 대면 혼자 갈 수 이써!”
“뭘 또 그런 걸 정했대.”
삼촌이 어이없어하며 달려서 시하에게 온다.
“11살 대면 불 쓸 수 이쑤니까 10살 되면 지베 혼자 갈 수 이써.”
“그래.”
“삼춘. 손.”
시하가 삼촌의 손을 잡고 걸었다.
삼촌이 궁금해서 물었다.
“근데 손은 언제까지 잡을 수 있는데?”
“삼춘 손은 6살까지야. 형아는 계속이야.”
“형아는 왜 계속인데?”
“형아가 더 머시쑤니까.”
“뭔 논리야. 그게.”
삼촌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크면 손잡는 건 안 하게 되어 있다.
사춘기가 오면 더더욱.
“아. 맞다. 시하야. 이제 형아 졸업식이잖아.”
“아? 졸졸식?”
“졸졸식이 아니라 졸업식.”
“그게 모야?”
“학교 정말 정말 잘 다녔어요. 이제 안 다녀도 충분히 공부했어요. 더는 배울 게 없어요. 축하해요. 하는 거야.”
“구럼 형아 대학교 이제 안 가?”
“졸업하면 안 가지. 이제 회사만 가지?”
“형아 지굼도 잘 안 가. 시하 다 아라.”
“그거야 강의가 다 끝났으니까.”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형아 공부 다해따! 하고 축하해 주는 거라는 건 알았다.
삼촌은 시하가 뭔가 감을 못 잡는 것 같아서 추가로 비유를 해주었다.
“시하도 나중에 어린이집 졸업해야 해.”
“왜?”
“초등학교 갈 거니까. 어린이집에서 공부 다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해야지. 친구들이랑도 헤어질지도 모르고.”
“왜?”
“그야. 다른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그렇겠지?”
“가튼 곳 가면 대자나.”
“그게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란다.”
부모님이 어디 좋은 사립학교를 희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미지 좋은 초등학교에 갈 수도 있다.
어쩌면 이사를 해야 해서 집이랑 가까운 초등학교가 배정될 수 있는 거고.
아직 초등학교까지 한참 남아서 그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삼촌도 몰랐다.
“우웅. 시룬데.”
“그래서 졸업식이 있는 거야. 축하도 하고. 우리 지금 헤어지지만 전화나 노는 거 자주 하자. 이렇게 하자고.”
“졸업식 중요해!”
이제야 시하는 졸업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실 뭐 그렇게 꼭 중요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학교를 졸업한다는 건 스펙에 한 줄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시하는 거기에 관해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형아 추카해져.”
“그렇지. 형아 축하해 줘야지.”
“군데 멀로 축하해져?”
“보통 꽃다발 주고, 사진도 찍고, 모자도 하늘 위로 던져도 보고. 뭐 그러지? 아마?”
삼촌 역시도 졸업식을 안 간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을 한참 더듬어야 했다.
지금도 비슷하겠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시하는 옆에서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하도 형아한테 따따발 줄래.”
“따발총?”
“아냐. 따따발.”
“꽃다발이겠지.”
“그거! 줄래! 시하 다 아라. 학교 아페 파라써!”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꽃다발 파는 모습이 많이 보았다.
입학식, 졸업식,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파는 시기는 늘 정해져 있어서 어린이집을 오래 다니면서 자주 봐왔다.
“군데 시하는 딴 거 주고 시퍼.”
“뭐? 졸업선물 같은 거?”
“아냐. 페페. 페페 줄래.”
“그거 맨날 네가 그리는 거 아니야?”
“마자! 페페 꽃다발이야. 페페.”
“오! 괜찮은 생각인데?”
“정말?”
“응. 시하가 그리면 삼촌이 꽃다발 만드는 거 도와줄게.”
“아라써!”
시하는 형아에게 줄 꽃다발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
다음 날. 어린이집.
시하는 어제부터 열심히 페페를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페페를 그릴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형아에게 줄 꽃다발 페페.
뭔가 잘 그려서 주고 싶었다. 그리고 삼촌이 이 그림으로 인형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우웅.”
고민하는 시하 곁으로 승준이 다가왔다.
“시하야. 무슨 일 있어?”
“시하는 형아한테 선물 주고 시퍼. 졸업 추카 페페 꽃다발이야.”
“졸업?”
“응.”
“졸업이 뭐지?”
다른 아이들도 졸업이 뭔지 몰라서 눈을 멀뚱멀뚱 떴다.
종수가 자신 있게 나와서 말한다.
“이 학교에서 공부 다 했다고 졸업하는 거야. 너희 그것도 몰라? 여기 대학교 들어올 때 입학식 하잖아. 그러니까 나갈 때는 졸업식을 하는 거지. 엄마가 알려줬어.”
지식의 원천은 엄마였다.
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구래서 페페 그릴 건데 머 그릴지 고민이야.”
“바보야. 그냥 졸업할 때 옷 그리면 되잖아.”
“아?”
“그 까만 옷인데. 저승사자 같은 옷인데.”
선생님은 그 말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승사자라니. 참으로 아이다운 신선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보면 저승사자 같은 옷이긴 했다.
“여러분. 그건 학위복이라고 해요. 여기 학사모라고 모자도 있고.”
“시하 아라여! 삼춘이 모자 던진대여. 하늘에 던진대여.”
“요즘도 하늘에 던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모자는 있어요.”
아이들이 그렇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폰으로 학위복을 찾아서 보여줬다.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이거다! 싶은 순간이었다.
학위복을 입은 페페.
시하는 이걸 그릴 생각이었다.
“근데 이건 기본적인 형태고. 대학교마다 학위복이 조금씩 달라요. 강인대도 학위복 있어요.”
선생님이 사진을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대학생이 아니라 아이였다.
강인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아이 사진.
시하와 친구들의 선배 격인 아이들이었다.
강인 어린이집의 졸업 복장은 강인대 학위복이랑 같은 작은 디자인이었다.
강인 재단에서 정해줬는데 이유는 강인대를 잊지 말길 바라는 것과 아이들에게 미니용으로 입히면 귀여워 보일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어때?”
“머시써! 마법사야. 마법사.”
“푸흡.”
마법사 가운처럼 생기긴 했다.
기본적으로 검은색 바탕이고 카라 부분에서 길게 밑단까지 붉은색 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손목 부근에도 붉은색 선이 둘러싸여 있다.
가슴에는 강인대 로고가 박혀있다.
원형으로 되어 있는 월계관.
그 안에 있는 위도와 경도만 그려진 지구.
그리고 지구 안에 적힌 KI의 표시.
뜻을 풀면 이렇다.
월계관은 명예와 영광을 상징하고, 지구는 세계, KI는 강인대학교 이니셜이다.
강인대학교 학생은 세계로 나가 명예와 영광을 차지하는 리더가 되어라.
그런 의미의 로고였다.
“어때? 엄청 멋있지?”
“머시써!”
시하는 강인대 학위복 입은 페페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샘. 폰 주세여.”
“응? 왜?”
“보고 그릴래여.”
“아. 이거?”
“네!”
시하가 선생님에게 폰을 받아서 패드에 열심히 그렸다.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 시하가 그리는 그림을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승준이었다.
“그럼 우리도 시혁이 형아한테 졸업 축하한다고 해야겠다. 그치 하나야?”
“오빠. 오랜만에 좋은 생각이야.”
“야! 오하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맨날 쓸데없는 말 하는 거 같잖아.”
“오빠. 오빠는 맨날 쓸데없는 소리 해.”
“!!!”
남매가 그렇게 투덕거리는 동안 재휘가 연주에게 다가갔다.
“연주는 시혁이 형아 축하해줄 거야?”
“응? 응. 같이 축하해 주자.”
“꽃도 줄 거야?”
“주는 게 좋은 거 아니야?”
“그건 그래.”
선생님이 아이들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런데 꽃이 비싸자나요. 그쵸?”
“비싸요?”
“네. 꽃다발만 해도 많이 비싸죠. 그리고 꽃에 물도 줘야 하고. 근데 우리 싸게 꽃을 만들 수 있어요.”
“정말요?”
“그럼요.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어요. 바로 종이접기!”
“에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예쁘냐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입체적인 종이접기를 하면 굉장히 예쁜 법이다.
“그런 반응일 줄 알고 선생님이 두 송이 접어왔어요. 짜잔!”
“우와!”
튤립과 장미.
두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줄기도 선생님이 만들어서 정말 꽃 한 송이가 있는 것 같았다.
“자. 여러분. 그런데 선택하셔야 해요.”
“뭘요.”
“쉬운 걸 할지. 어려운 걸 할지. 자! 튤립은 그나마 접기 쉬워요! 그런데 장미는 많이 어려워요! 여러분의 선택은!”
시하가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서 다시 그린다.
“샘. 시하 바빠여.”
“응. 시하는 시하만의 꽃다발 전해 주자.”
“아라써여.”
다른 아이들이 어떤 걸 접을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하는 그림 그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왜냐면 시하만의 특별한 축하 꽃다발이 있었으니까.
선생님도 그걸 막지 않았다.
시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도 했고 언제나 교육은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