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옆에는 미끄럼틀처럼 단순한 봅슬레이장이 있었다.
아이들도 손쉽게 탈 수 있어서 재밌어 보였다.
“형아. 저거 타고 시퍼.”
“응. 한번 타볼래?”
승준과 하나도 눈을 반짝이며 타고 싶다고 난리였다.
썰매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갈 거 같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봅슬레이장으로 들어갔다.
옆에 있는 썰매장보다는 높이가 낮았고 평평한 느낌의 길이 있었다.
플라스틱 썰매를 타야 했는데 굉장히 재밌어 보였다.
백동환이 말했다.
“아, 저는 그냥 내려갈게요.”
“왜?”
“아니. 폭이 좀. 저 안 내려갈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 나도 안 될 것 같은데? 여기 애들 전용인가 봐.”
“그렇죠? 나만 안 되는 거 아니죠?”
아니. 그냥 봅슬레이도 너는 좀 힘들지 않을까? 워낙 덩치가 커서.
아무래도 백동환은 썰매나 타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형아. 못 타?”
“어. 형아는 못 탈 것 같아. 밑에서 만나자. 시하야.”
“시하 딴 거 타까?”
“기왕 올라온 거 한번 타봐.”
“아라써. 형아. 미테서 기다리고 이써야 해. 시하 형아 바로 차즈꺼야.”
“알았다니까.”
나는 어른들과 함께 내려갔다.
승준 엄마는 아이들 영상을 찍는다고 했다.
삼촌 역시 시하 뒷모습을 찍을 거라고 해서 나는 내려가도 되었다.
이런 건 잘 챙겨주신단 말이야.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데 시하가 출발했다.
“형님. 빨리 내려가야겠는데요?”
“어. 그러게.”
하긴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금방 내려가기는 하지.
빠른 걸음을 재촉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멀리서 보니까 썰매처럼 안내 요원이 시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형아!”
“어. 시하야.”
“형아. 너무 느져써. 지각이야. 지각.”
학교 때도 안 해본 지각을 여기서 하네.
“미안해. 시하가 너무 빨리 내려가더라. 재밌었어?”
“재미써.”
시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또 타고 싶은데 나와 같이 못 타니까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승준이랑 하나랑 더 타고 와. 형아 여기서 시하 멋지게 내려오는 모습 찍어야 하거든.”
“형아는 안 타도 대? 형아. 안 심심해?”
나는 빙긋 웃었다.
내가 심심할까 봐 걱정하는 시하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
세상에 이런 아이가 어딨냐. 아니. 요깄네?
“형아는 시하 내려오는 멋진 모습 찍는 게 너무 재밌어. 그러니까 형아는 시하가 빨리 타러 가면 좋겠는데.”
“아라써! 시하가 진짜 멋진 거 보여주께.”
“응. 안전하게 타야 해.”
“아라써.”
승준이 시하 보고 빨리 오라고 부른다.
셋이서 열심히 올라간다.
위에는 승준 엄마랑 삼촌이 아직도 안 내려오고 있다.
아마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위에도 안전요원이 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영상이 내려가는 뒷모습과 내려오는 앞모습을 다 찍을 수 있겠네.
“형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캠코더를 들고 왔어야 했는데! 삼각대 딱! 꽂고 완전 흔들림 없는 촬영을 했어야!”
“조용히 하고 따라와.”
“넵!”
“하여간 오버는.”
“근데 드론도 하나 샀어야 했을까요? 드론 띄워서 영상을 크으.”
“적당히 해라.”
“넵!”
그렇게까지 하면 주변 사람들이 아주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시하가 내려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썰매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은 브이를 한다.
저게 시하가 생각한 멋진 모습이었나 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두 손 꼭 잡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내려올 때는 눈에 힘을 빡 준다.
눈썹이 뭔가 화난 느낌인데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만족스럽게 탄 뒤에 또 썰매를 타러 가자고 했다.
“썰매 또 타고 싶다!”
그렇게 한 번 더 썰매를 탄 뒤에야 아이들이 이제 만족했는지 그만 타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다른 썰매 타러 갈래? 빙판 썰매라고 있던데.”
“빙판 썰매?!”
“응. 이거는 좀 힘들 수 있는데. 한번 해보자.”
근처에 빙판 썰매장도 있었다.
꽁꽁 언 얼음 위에 날 달린 나무 의자 썰매와 나무 스틱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썰매 위에 탔다.
“잉잉. 형아. 안 가.”
“큭큭. 이거 열심히 이 나무 스틱으로 끌면 되는데.”
“잉잉.”
시하는 힘을 내지만 눈곱만큼 가버린다.
승준과 하나도 마찬가지.
백동환도 그 모습에 웃다가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끄응. 왜 안 가지?”
“백동 형아 무거어서 그래.”
“아니야. 할 수 있어! 흡!”
드디어 조금씩 움직인다.
내가 보기에는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힘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백동 형아. 아까 시하 차 탈 때 느려져써. 무거어서. 썰매도 느려져.”
시하야. 그런 펙트는 꺼내는 게 아니야.
백동환이 침울해지고 있잖아.
“푸흡.”
삼촌은 그런 시하와 백동환을 보고 웃는다.
어찌 된 게 쌩쌩 잘 타는 삼촌이었다.
“삼춘. 어떠케 그러케 타?”
“마자요. 시하 삼촌! 혼자만 잘 타고!”
“하나도 그렇게 타고 시푼데.”
삼촌이 씨익 웃는다.
또.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너희들이 안 움직이는 건 말이지. 빙판이랑 친하지 못해서 그래.”
“!!!”
“빙판 자식들이 빙수거든. 근데 너희들이 맛있다고 계속 그러니까 화나지. 빨리 사과해.”
시하가 정말 그러냐는 듯이 사과를 한다.
“미아내. 빙수가 너무 마씨써서 그래써. 다움에 얼음 있눈 빙수 말구 딸기 빙수랑 수박 빙수 머그께. 미아내.”
승준도 사과했다.
“사커하고 빙수 먹었을 때 정말 맛있었어. 근데 미안해. 다음에는 두 개 안 먹고 한 개만 먹을게.”
하나도 사과를 한다.
“미안해. 하나도 맛있게 머거써. 군데 안 머글 수가 없어. 그래서 다음에는 조금만 먹을게.”
이런 순진한 아이들.
졸지에 썰매에 앉아서 사과하고 있다.
그런다고 잘 타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그래. 이제 해봐!”
“잉잉!”
“이얍!”
“하나도 간다!”
하지만 여전히 잘하지 못하고 앞으로 정말 조금씩 간다.
“삼춘! 이거 안 대. 빙판이 화나써!”
“푸하하. 그거 뻥이었는데!”
“삼춘! 거짓말해써!”
“푸하하. 너무 화내지 마. 삼촌이 진짜 잘 타는 법 알려줄게.”
“모야?”
“시하가 잘 못 타는 건 ‘형아랑 같이’가 아니라서야.”
“!!!”
“승준이랑 하나도 마찬가지고.”
“!!!”
아니. 왜 다들 날 쳐다봐?
“흠흠. 시하야. 내려봐.”
일단 시하를 썰매에서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썰매를 가지고 왔다.
바로 줄 달린 썰매.
“그럼 형아 썰매 출발합니다.”
“!!! 형아랑 가치!”
그래. 삼촌이 이걸 말하는 거다.
옆에서 백동환과 교수님이 승준과 하나의 썰매를 끈다.
승준 엄마는 그 모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삼촌은 철없이 열심히 썰매를 즐긴다.
알고 보면 여기 혼자 와도 정말 재밌게 놀 수 있으신 분 아닐까?
“형아 썰매 출발!”
“시하야. 같이 가자.”
“하나도 같이.”
그렇게 우리는 다 같이 아이들 썰매를 끌었다.
아까 혼자 굼벵이처럼 끌었던 속도와 차원이 다르다.
슥슥.
마음 같아서는 더 빨리 끌어주고 싶은데 바닥이 얼음이라서 쉽지 않다.
스케이트보드가 있으면 더 잘 미끄러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시하야. 재밌어?”
“형아랑 썰매가 합체해서 더 재미써!”
“그렇지?”
스케이트 타듯이 슥슥 빙판 한 바퀴를 돌았다.
놀 수 있는 게 굉장히 많네.
이미 2만 원어치는 본전을 뽑고 남았지 않았을까?
근데 옆에서 교수님이 빙어, 빙어 노래 부르고 있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나 본대.
이거 끝나고 빙어낚시 안 갈 건데 말이다.
여기에 아주 특별한 열차가 있다고 해서 그거 한번 타고 빙어 잡으러 가지 않을까 싶다.
왜 이런 루트로 짰냐면 너무 얼음에만 있으면 아이들이 추울지도 모르고 옷도 다 젖어 좀 그래서 그렇다.
“삼춘. 시하 타.”
“어. 그래. 시하는 꼬맹이라서 누가 끌어줘야 하지?”
“시하 꼬맹이 마자. 군데 삼춘은 누가 안 끌어주네? 시하가 끌어주까?”
삼촌이 이거 웃긴 놈이네 하는 듯이 시하를 보았다.
설마 저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겠지.
“그럼 부탁해 볼까? 끌어줄래?”
“아냐. 삼춘은 혼자 끌어. 시하는 형아만 끌어주꺼야.”
삼촌은 한 방 맞았다는 얼굴이었다.
우리 시하. 굉장해. 삼촌한테 계속 당하면서 점점 성장하고 있어.
“야. 너 그거 차별이야. 차별.”
“군데 시하는 삼춘만 차별해서 갠차나.”
우리는 본전 뽑고 남았는데 삼촌은 괜히 덤볐다가 본전도 못 뽑았다.
둘이 뭔가 투덕거리면서 진짜 잘도 노는 것 같다.
왠지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삼촌 간다!”
“삼춘 가치 가. 형아. 삼춘 따라가져.”
너 그렇게 삼촌 차별해놓고 따라가고 싶니?
오늘의 악마는 삼촌이 아니라 시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한참을 썰매를 끌다가 이제는 재미없어졌는지 아이들이 빙판을 타고 논다.
한산한 느낌이 이렇게 좋다.
슬슬 사람들도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썰매를 타러 가지만 아직 여기는 할 만하다.
“형아.”
“응?”
“다 노라써.”
“실컷 놀았어?”
“응.”
승준과 하나도 재밌게 놀았다고 이제 나가자고 한다.
“그럼 쉬면서 드라이브 한번 하고 빙어 낚시갈까?”
“드라이브?”
“응. 여기 열차가 있다네. 쭉 한 바퀴 돌 수 있대.”
이제 아이들과 같이 트랙터가 모든 깡통 열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인당 5천 원.
여기도 돈을 받는구나 싶어서 부들부들 떨게 했지만 그래도 애들이라도 재밌게 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형아도 가치!”
“마자! 시혀기 형아도 같이야!”
“시혀기 오빠도 타야 해!”
이런 아이들의 주장으로 어른 중에는 나만 타기로 했다.
이거 한 번 타는 데 5천 원은 다른 어른들도 아까워했으니까.
총 2만 원이 또 날아가는구만.
가만 보니 엄마랑 타는 아이도 있고 형제랑 타는 아이들도 있다.
대부분 부모님이 아까워하시네.
“형아. 출발해.”
“응. 그렇네.”
그래도 맘 편히 앉아서 쉬면서 사진이나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하 사진 많이 찍어야지.
“시하야. 김치.”
우리 시하는 모든 사진이 브이다.
어찌 시간은 가는데 포즈는 변하는 게 없을까.
“승준아. 김치!”
승준이는 해괴한 표정을 짓는다.
혀를 내밀어 메롱을 하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구기거나.
그거. 얼굴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너는 왜 맨날 사진 찍을 때마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더 다양해지는 느낌이기는 한데. 이거 예술적 표현 아니지?
“하나야. 김치.”
하나는 브이도 하고 꽃받침도 했다.
윙크도 하는데 애교가 있어 보였다.
“시하야.”
“아?”
“윙크!”
시하는 감은 눈 위에 브이를 덮는다.
그거. 윙크 맞아? 아니. 한쪽 눈 감은 거면 윙크가 맞긴 한데.
아무튼, 윙크 맞겠지.
찰칵.
“형아. 저기 염소 이써.”
“어? 정말 그러네.”
“염소 아찌. 메에! 하고 우러.”
“응. 메에! 하고 울지.”
여기저기 끌고 가는데 풍경은 그저 그랬다.
그래도 이상하게 애들이 재밌어한다.
기차놀이의 연장선 같은 거라서 그런가?
그렇게 다 타고 나서는 뭔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바로 비싼 드라이브 값인가.
“형아. 이제 빙어낙시 가?”
“응. 빙어낚시 가자.”
아이들도 기대에 찬 눈빛이었는데 특히 교수님이 제일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이것만은 기다려왔다는 듯이 말이다.
삼촌은 또 뒤에서 허풍을 떤다.
“시하야. 삼촌이 말이야. 빙어낚시 엄청 잘하거든. 손을 휙! 하면 금방 잡혀.”
“정말?”
“어. 그리고 거기 폭탄 떨어뜨리면 빙어 다 잡혀.”
“!!!”
삼촌. 그거 범죄행위 아닙니까?
경악한 채로 삼촌을 보자 뭐가 문제 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다.
“시하야. 폭탄 떨어뜨려서 잡는 건 아주 나쁜 짓이야.”
“삼춘! 시하한테 나쁜 짓 가르쳐써?!”
삼촌이 피식 웃는다.
“삼촌 원래 나쁜 사람이라 나쁜 짓 해도 된다고 했잖아.”
“삼춘 앙마야. 앙마.”
“시하야. 그거 알아?”
“모가?”
“삼촌이 그래도 내 사람한테는 천사야.”
시하가 삼촌을 빤히 보다가 한마디 했다.
“삼춘 거짓말!”
그야 그렇지. 맨날 놀리는데 천사로 보일 리가 있나.
어찌 되었든 우리는 빙어낚시 하러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