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2화 (382/500)

382화

윤동의 정답은 연주가 맞혔다.

고개를 숙이는 벼. 그걸 지키는 허수아비.

옆에서 승준이 시하에게 진짜 아까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안 아까웠다.

어찌 되었든 다른 아이들도 하나씩 계절을 표현했다.

눈 뭉치를 던지는 겨울.

수영하는 여름.

책을 읽는 가을.

다들 계절의 특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우승자를 발표했다.

“우승은 제일 점수가 높은 연주!”

짝짝짝.

연주는 앞으로 나왔다. 선생님이 달력을 내려 주었다.

11월 달력이 드르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깨끗하게 뜯겼다.

드러나는 12월 달력.

그리고 손에 들린 커다란 11월 달력 종이.

선생님이 그걸 보며 말했다.

“커다란 종이비행기 만들 수 있겠네.”

“!!!”

“그런데 이걸로 더 재밌는 놀이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그게 뭔가 싶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11월 달력의 앞면을 보여주었다.

30일까지 있는 11월 달력이다. 이걸로 연상 그림 놀이를 할 수 있다.

“여기 보세요. 1이 있죠? 1하고 닮은 게 뭐가 있을까요?”

“몰라요.”

“연필이 있습니다! 자 연필을 그려볼까요?”

선생님이 1이 적힌 칸에 연필을 그려 넣었다.

그제야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알아차렸다.

“그럼 2는 누구랑 닮았을까요? 다들 생각해 볼까요?”

“네!”

“그럼 여기 있는 숫자들을 다 채워 보세요.”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주었다.

이제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혼자 하기에는 많으니 다 같이 하기로 했다.

시하가 말했다.

“2는 오리야. 오리.”

“아, 맞네!”

“서이는 엉덩이야.”

“우와!”

3이 엉덩이처럼 보이긴 했다.

의외로 이런 건 시하가 연상을 잘했다.

다들 그래도 생각한 것들이 있는지 손쉽게 말했다.

4는 배 모양, 5는 후크선장 갈고리, 6은 자물쇠, 7은 지팡이, 8은 공 두 개, 9는 실 달린 풍선, 10은 접시 위에 도넛, 11은 젓가락.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이 엄청나게 잘해서 깜짝 놀랐다.

숫자들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채워간다.

마치 퀴즈를 풀 듯이 아이들이 재밌어했다.

“계세요?”

그때 누군가 어린이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이 일어나서 문을 열자 아줌마 한 명이 있었다.

학교 안에 있는 은행 직원.

“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김에 이거 가져다주려고요.”

“와.”

“달력이에요. 달력.”

“감사해요. 달력 하나 필요해서 안 그래도 은행 한번 들릴까 했었는데.”

“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김에 들렸어요. 안 그래도 오늘 달력이 와서.”

“아하. 감사합니다.”

“사실 이렇게 갖고 와도 의외로 남는 게 있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그래서 하나 더 가지셔도 돼요.”

“와. 진짜요? 사실 달력이 또 애들 갖고 놀기 좋거든요.”

“그렇죠. 아, 이건 그냥 탁상 달력인데.”

“와.”

“이건 하나밖에 못 드리겠네요. 의외로 작은 탁상 달력은 빨리 떨어지는 편이라.”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은행원이 떠나자 아이들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이 피식 웃으며 이게 뭔지 설명해 준다.

“내년 달력이야. 12월이 지나면 이제 다 끝나겠지?”

“네!”

“그래서 미리 받은 거야.”

시하가 궁금해서 물었다.

“샘이 사써여?”

“아니. 안 샀어. 그냥 주는 거야. 물론 파는 데도 있긴 하지만.”

“!!!”

“한번 볼래?”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달력을 보았다.

뭐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도 탁상 달력은 계절 풍경이라도 있었다.

오늘은 달력과 친해지는 시간이었다.

***

시하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오늘 했던 놀이를 열심히 설명하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형아. 시하 생각나써! 생각.”

“응. 뭔데?”

“시하 달력 파라. 달력 파라서 보일러 트러.”

“???”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잠시 생각해 봤다.

아마도 달력을 팔아서 그 돈으로 기부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보일러 놓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래도 삼촌이 던진 질문에 해답을 찾은 거 같다.

“삼춘. 삼춘. 달력 만드러. 달력.”

“어엉? 갑자기 달력은 왜?”

삼촌은 소파에 누워서 배를 긁고 있었는데 시하가 또 눈 앞을 가린다.

“삼춘이 그래짜나. 그림 팔라고.”

“어? 내가. 그랬기는 했는데.”

“구래서 시하가 달력 만드러서 파라. 구림도 그려.”

“오! 뭔지 알겠는데?”

“작은 달력 시하가 만드러.”

“그러면 12월까지 그림이 12개 있어야겠네?”

“마자! 시하가 다 생각해써. 시하 그림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만드러.”

“오. 좋네. 근데 누구한테 파는데?”

“시하가 전에 페페 파라써. 구래서 또 팔면 대.”

아마도 전에 페페 프라모델을 판 걸 기억한 모양이다.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번에는 꽤 대대적으로 팔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금액이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금액이라도 기부하는 게 중요한 거다.

금액의 크고 작은 유무는 상관이 없다.

예능이나 이런 데서 달력을 만들어서 전액 기부하는 게 생각이 난다.

시하가 그런 프로그램을 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시하야. 좋은 생각이네. 그럼 그림 12개 다 정했어?”

“아냐. 시하 생각해야 해.”

삼촌이 씨익 웃었다.

“그럼 삼촌이 도와줄까?”

“삼춘이?”

“다는 못 정해줘도 같이 생각할 수는 있지!”

“!!!”

“자. 시혁아. 너도 자리에 와. 그림 콘티 회의 시간이야.”

어찌 된 게 삼촌이 아주 신나 보인다.

뭐, 상관은 없겠지. 근데 12개의 그림이면 꽤 힘들지 않을까?

나는 괜히 시하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촌이 신나서 말했다.

“그럼 먼저 1월부터 하자. 시하야. 1월은 뭐 그릴 건데?”

“시하 아라. 1월에 해 보러 가.”

“오. 그렇지. 그렇지. 새해를 보러 가야지. 그럼 해돋이 그리는 건가?”

“아? 해도지? 해도지 모야? 해도 지금 나가여! 이써바여! 해?”

“아닌데? 해가 지금 나가여! 하는 게 아니라 지구가 구르면서 해도 지금 볼게요! 하고 말하는 거야.”

“정말?! 지구가 왜 굴러? 지구가 사커해?”

“아니. 지구가 앞구르기를 잘해.”

“!!!”

갑자기 이야기가 왜 거기로 빠지는지 모르겠다.

삼촌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와서 앞구르기를 한다.

“시하 이거 못 하지?”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시하가 머리를 땅에 짚고 앞으로 구른다.

그리고 일어나서 배를 쭈욱 내밀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삼촌이 갑자기 뒤로 구른다.

“그럼 뒤구르기 못 하지?”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삼촌이 계속 놀리는 투로 이야기하자 시하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하가 누워서 발을 번쩍 위로 든다.

낑낑거리면서 뒤로 못 구른다.

“시하야. 너 뭐 하냐?”

“다 해따!”

“거짓말하지 마라. 하나도 못 굴렀거든?”

“아냐. 시하 다리가 하늘로 떠써.”

“그래. 뜨긴 했는데 멈췄잖아.”

“아냐. 삼춘 못 바써. 시하 구르고 또 하늘 바써.”

“너 맨날 삼촌이 거짓말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네가 거짓말쟁이네.”

“형아. 시하 굴러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암! 우리 시하는 뒤구르기 했다!

“이거, 이거. 완전 형제 사기단이네. 사기단이야.”

“삼촌. 착한 사람만 뒤구르기 한 게 보여요. 그러니까 삼촌은…….”

“와. 나, 나쁜 사람이야?”

“제가 그렇게 말 안 했는데요?”

“그게 그거지. 실망이네.”

“아니요. 삼촌 지금까지 했던 말 잘 생각해 보세요. 전에 시하한테 삼촌은 나쁜 사람이라서 나쁜 짓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걸 지금 써먹는다고?”

어릴 때야 삼촌에게 놀림당했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는 오히려 삼촌이 밀린다.

지금 우리는 마치 가위바위보 같은 관계도다.

시하는 삼촌에게 잘 지고 삼촌은 나에게 잘 지고 나는 시하에게 잘 지고.

아무튼, 그런 거지.

“어이쿠. 내 편 없어서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삼춘. 시하가 편해주께. 힘내.”

“너 형아 편이잖아.”

“삼춘. 형아가 레드 형아라서 어쩔 수 업써. 삼춘이 이해해.”

“뭔 말이냐?”

아무래도 삼촌보다 형아가 더 좋고 더 세다는 말일 것이다.

아직 시하 언어를 이해하려면 멀었구만.

“흠흠. 그럼 회의 계속 진행할까?”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어요?”

아직 1월도 안 정해진 거 같은데?

아무튼, 시하는 1월에 새해를 그린다고 한다.

좀 독특하게.

“레드페페 얼굴 그려. 레드페페 얼굴이 해야. 해.”

“엄청나네.”

페페의 붉은 털이 번쩍번쩍해서 새해를 밝히겠구만.

“바다야. 바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레드페페 얼굴.

뭔가 상상은 호러 영화 같은 느낌인데? 얼굴이 참수된 건 아니지?

아무튼, 귀여운 얼굴이니까 괜찮을 듯싶다.

“그럼 2월!”

“2월?!”

2월은 꽤 어려웠다.

설날이 있긴 했지만 그건 한국에서 즐기는 거니 한복 페페는 조금 그랬다.

밸런타인데이도 챙기는 나라만 챙기니.

고민이 든다. 아니지. 그냥 밸런타인데이가 좀 더 낫나?

“밸런타인데이 그림 그리면 되겠네. 아니다. 초콜릿 그림 그려놓은 거 있지 않아?”

“마자! 이써!”

“그럼 그걸로 채우면 되겠다.”

있는 거로 채우기도 해야지.

12장 다 그리면 너무 힘들다. 줄일 수 있는 건 줄이도록 하자.

삼촌이 말했다.

“그럼 3월은 뭐로 할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삼춘! 서이 월이 제일 중요해!”

“왜?”

“서이 자나.”

“???”

3을 좋아하는 시하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달이다.

삼촌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는지 고민한다.

“형아. 시하 조은 생각 나써!”

“응? 뭔데?”

“서이 자나. 형아. 시하. 삼춘!”

“어?”

“이시하 이시혁 페페 그려!”

“그게 뭐였지?”

“형아한테 선물 져떤 거. 서이야. 서이.”

“아! 작년에 텀블러에 그렸던 ㅇㅅㅎ 초성 그림?”

“마자!”

이미 그렸던 거라 구도랑 생각할 시간이 줄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이 회의에서 최대한 일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밀 생각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정해져 간다.

4월은 돛단배 탄 페페.

5월은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 페페.

그리고 6월.

“이건 아주 쉽네.”

“삼춘 조은 생각 이써?”

“삼촌이 잘하는 거잖아. 따봉!”

따봉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말이네.

엄지를 세워서 치켜든다.

한마디로 최고를 외치는 페페였다.

“삼춘이 왜 따봉 잘해? 삼춘 칭찬해?”

“삼촌 칭찬 잘하잖아. 칭찬왕!”

“거짓말! 삼춘 맨날 거짓말하자나.”

“맨날은 아니다.”

“구럼 맨날 노라. 시하보다 마니 노라.”

“어? 그건. 맞지.”

어린이인 시하보다 많이 노는 백수 삼촌!

묵직한 펙트에 삼촌이 시무룩해졌다.

“뭔가. 뭔가. 심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은데?”

“삼촌. 사실이잖아요.”

“왜 6월 그림으로 이런 심한 펙트를 맞아야 하지?”

“그럼 일하시면 되잖아요.”

“와. 너희들이 모르는데 나 열심히 일도 해.”

“???”

“어?! 일어나서 말이야. 너희들 배웅해 주지! 빨래도 하지! 널어주지! 어! 이게 어! 집안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네. 그래요. 감사합니다!”

“감사가 안 느껴지는데? 이게 문제야. 문제. 집안일은 넘치는데 해도 해도 티가 안 나. 티가. 그러니 노는 거로 보이지.”

“그래서 티비 시청은 얼마나 하는데요.”

“어? 거의 종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잠깐만! 이러면 내가 진짜 매일 노는 것 같잖아!”

진짜 매일 노시잖아요?

새삼스레 왜 그러시는지?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건조기가 말리고.”

“커흠.”

“밥은 제가 하고. 집에 와서 물걸레질 제가 하고.”

“커험. 흠흠. 그래도 로봇청소기 청소는 내가 하잖아. 아니다. 됐다! 나만 나쁜 놈이네.”

“푸흡. 아니에요. 티나요. 티나.”

그때 시하가 말했다.

“삼춘! 머 그릴지 바야지! 또 놀고 이써.”

“시하야. 삼촌은 형아랑 이야기했잖아. 형아는 왜 안 혼내?”

“형아는 일하고 와서 피곤해. 삼춘은 놀아짜나.”

“그건 그렇네.”

“형아는 쉬어야 해.”

“헹. 삼촌은 나쁜 사람이라서 그냥 계속 쉴래.”

삼촌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또 저렇게 시하를 놀린다.

시하가 삼촌이 이럴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소파에 있는 삼촌의 배를 콕콕 찔렀다.

“삼춘. 시하가 한 번 바주께.”

“이거 진짜 웃긴 애네.”

삼촌이 시하를 어이없이 본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피식 웃다가 고민이 들었다.

이 회의 오늘 안에 끝나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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