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시간을 거슬러 12월의 이야기다.
시하가 길 가다가 우연히 예쁜 사탕 통을 발견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돼지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서 저거 사자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사보니 사탕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은 친한 사람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것.
추운 겨울에 기분 좋은 따뜻한 온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시하도 사탕을 다 나눠주고 뿌듯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기뻐하는 감정은 형체가 없지만 괜히 주는 사람의 마음에도 돌아온다.
그런 온기가 세상에 필요한 일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형아. 저거 모야?”
“응?”
학교에 있는 게시판에 알록달록한 포스터 하나가 있다.
빨간색 모자.
신생아를 위한 모자 뜨기 캠페인.
아마 시하는 빨간색이 눈에 확 들어와서 궁금했나 보다.
“모자 만들어서 아기한테 주는 거야. 신청할 사람은 신청하라는데? 봉사동아리가 만들었나 보네.”
“아기?”
“응. 엄청 작은 아기. 이제 막 태어나서 응애응애 하는 아기.”
“모자는 왜 져?”
“아기가 너무 추어서 많이 아파하거든.”
“보일러 틀면 대!”
“외국에는 보일러 없는 데도 있어서 그래.”
“!!!”
그건 몰랐다는 듯이 시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느 나라든 부족한 나라도 있고 너무 과도하게 발전한 나라도 있다.
세상은 넓고 보이지 않는 차별들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따뜻한 점도 있는 건 맞다.
“형아. 시하도 만드까?”
“응?”
“모자. 시하는 아기 아야 안 해쑤면 조케써.”
“으음. 하나 사볼까? 근데 시하가 만들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어.”
“시하 잘해.”
안 해보고 어떻게 잘한다고 하냐.
뭐 정 안되면 내가 도와주면 되지만 이런 건 처음이라서 나도 잘 못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시하가 하고 싶다고 하는데 시하가 크면 하자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못 할 거라고 미리 단정 짓고 싶지도 않았고.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상태에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그냥 뛰어들며 이리저리 구르며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나는 지금 시하의 말에 응원해 주고 싶다.
“알았어. 그럼 하나만 신청한다?”
“조아!”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학생들이 다 같이 단체 주문을 하는 것 같았다.
함께해 보자는 뜻에서 포스터를 붙여서 진행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취지는 좋은 것 같다.
적혀 있는 메일로 학과, 학번, 이름을 보내며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의외로 답장이 빨리 돌아왔다.
[오늘 마지막 신청일이었는데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체 주문을 할 것이고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봉사동아리실에서 배부할 예정이니 나중에 찾아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뜨개질하는 모자를 받게 되었다.
곤란한 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엄청 어렵다는 거였다.
“시하야.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이케?”
시하의 손 위로 같이 잡고 열심히 뜨는 데 참으로 쉽지 않다.
그래도 집중력 있게 열심히 한다.
이건 거의 내가 완성하는 거 같은데…….
시하도 그걸 느꼈는지.
“형아. 시하 잘 모태.”
“괜찮아. 괜찮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정말?”
“응. 형아도 완전 처음 했으면 잘하지 못했을 거야. 뜨개질은 예전에 해봐서 그래.”
이렇게 위로하는데 삼촌이 웃으면서 찬물을 끼얹는다.
“아닌데.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꼭 있던데.”
“아, 삼촌!”
“왜? 세상에는 말이야. 처음부터 잘하는 그런 불공평한 사람도 있다고. 재능 있는 사람은 처음에 버벅대더라도 금방금방 해버린단 말이야. 시하도 그걸 알아야지.”
물론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타이밍에 말해야 했습니까!
“시하야. 세상은 쓴맛이야. 하하하!”
“삼춘 거짓말!”
“하! 거짓말이라니. 삼촌은 언제나 진실만 말한다고.”
시하는 입을 삐죽이며 뜨개질을 보았다.
작은 손으로 뭔가 열심히 하는데 나도 많이 도와줘야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많이 겪으며 모자가 완성되었다.
“형아. 다 해써!”
“그래. 시혁이가 다 했지. 시하는 뭐 한 게 없네.”
“아냐! 시하도 쪼꿈 해써.”
“그래. 진짜 눈곱만큼 했지.”
“삼춘 나빠!”
나는 그래도 이 조금 한 거라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잘 안 되었지만,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예쁘지 않은가.
어쩌면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앙마야. 앙마.”
“그럼 시하가 자신 있게 저거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
“우웅.”
시하가 고민하면서 눈을 굴린다.
“삼촌. 그만 놀려요. 시하도 잘했어요. 시하 잘했어.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끝까지 한 거 정말 잘했어!”
“정말?”
“응. 응.”
삼촌이 피식 웃었다.
“시하는 다음에 잘하는 거로 도와주자.”
“아?”
“너 그림 잘 그리잖아. 그런 거로 도와주면 되지.”
“시하 그림은 손대면 몸이 안 따뚜테져.”
“누가 그림 선물하랬어.”
“아?”
“그림 팔아서 아기들 빨리 나으라고 돈 보내면 되잖아.”
“!!!”
아마도 후원 이야기하는 거겠지.
뭐, 잘하는 거로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
꼭 이렇게 잘하지 못하는 걸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네가 잘하는 거로 도움이 되도록 해봐라.
놀리는 줄 알았는데 삼촌은 이상하게 격려를 하시는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하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구나.
“삼춘. 그림 머 그려서 파라?”
“그건 네가 생각해 봐야지.”
시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삼촌이었다.
시하야. 근데 이 뜨개질 모자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런 말이 목 끝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시하에게 좋은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
“형아는 빨래하고 있을게.”
그래서 나는 그냥 빨래해서 모자를 말리기로 했다.
***
시하는 고민 중.
가끔 멍하니 뭔가 생각하다가 안 떠오르는지 잊어먹고 놀기도 한다.
시혁은 그런 모습을 보며 힌트 같은 걸 줄까 고민했다.
“생각이 안 나?”
“안 나.”
“그럼 형아가 생각 나는 법 알려줄까?”
“모야?”
“시하가 그림 뭐 그릴지 고민하잖아. 그러면 어떻게 생각나?”
“우웅. 시하 놀다가 생각나눈데.”
“응. 맞아. 열심히 놀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
시하가 정말 그러냐는 듯이 시혁을 쳐다보았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이래저래 경험을 해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책을 읽는다던가 어디 계곡에서 논다던가.
다 경험한 걸 섞어서 그림을 그렸지 않은가.
“그냥 놀다 보면 계기가 올 거야. 그냥 그래.”
“마자! 시하 놀다가 그림 그려.”
“응. 맞아. 그런 거지.”
때로는 고민만 하다가 고민으로 끝날 때가 많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질문을 담아둔 채 그냥 그 질문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일을 하나둘씩 하다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실컷 노는 거다?”
“아라써! 시하 열심히 노께!”
그래. 그러면 되는 거다.
시혁은 어린이집에서 시하를 데려다주고 일을 하러 갔다.
“시하야! 안녕!”
“시하야! 안녕!”
쌍둥이들이 시하를 반긴다.
시하도 손을 흔들며 얼싸안는다.
선생님은 이제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희미한 웃음만 보인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상의한다.
“시하는 미끄럼틀!”
“나는 그럼 사커!”
“아니야. 밖에는 추우니까 소꿉놀이.”
“나는 같이 책 읽는 게 좋은데.”
다들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지 열띤 토론을 한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다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11월. 저 부분을 떼는 걸 잊어먹었다. 12월로 바꿔야 했다.
손으로 찢으려고 잡는데.
“샘. 시하가 하고 시퍼여.”
“어? 시하야. 언제 왔니?”
“시하가 할래여.”
시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뜯고 싶었다.
드르르륵 뜯는 게 아주 재밌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시하의 말을 듣고 다른 아이들도 하고 싶다고 난리였다.
“아! 나도 할래! 나도!”
“하나도! 하나도!”
“저도 하고 싶어요.”
저기. 얘들아? 너희 아까까지 뭐 하고 놀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지 않았니?
왜 여기에 관심이 쏠렸어?
안타깝게도 다들 해주고 싶지만, 이 달력을 떼는 건 한 명밖에 할 수 없었다.
“흠흠. 안타깝게도 이걸 뗄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에요!”
“!!!”
“그럼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 이걸 뜯을 수 있는 거로 할래요?”
선생님은 언제나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
잘됐다는 듯이 준비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사실은 방금 생각한 프로그램이지만. 어찌 되었든.
“여러분. 한국은 사계절이 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시죠?”
“네!”
“그럼 속으로 계절을 고르고 몸으로 표현해요. 그 계절을 잘 맞춘다면 1점! 거기에 자세히 말한다면 또 1점을 줄게요. 가장 점수가 놓은 사람이 이 달력을 뜯을 수 있어요.”
“!!!”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아이들이 계절의 특징과 변화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막상 한번 생각해 보면 더 좋다.
“그럼 선생님이 먼저 해볼게요. 나중에는 한 명씩 나와서 문제 내야 해요. 알았죠?”
“네!”
선생님이 손을 호호 하고 분다.
그리고 어딘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무언가 말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손에 둥근 컵을 잡는 모습을 보이며 볼에 살짝 갖다 댄다.
그다음 의자에 앉아서 마시는 시늉.
고개는 옆으로 돌려서 밖을 보는 것 같았다.
시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정답! 형아!”
“땡!”
시하가 시무룩해졌다.
누가 봐도 형아가 차 마시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흠흠. 여러분. 계절부터 맞춰주세요.”
종수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겨울이요! 호호 손 불고 커피 하나 시켰어요!”
“와 다 맞혔네요! 종수 2점!”
종수가 승리의 미소로 시하를 보았다.
시하는 아직도 왜 틀렸는지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럼 다음은 종수가 내볼까?”
“네!”
종수가 앞으로 나온다.
수도꼭지를 트는 시늉을 한다. 물을 받고 여기저기 뿌린다.
손바닥을 붙였다가 위로 올린다.
그리고 두 손을 펼친다. 새싹이 났다는 듯이.
설명 끝.
시하가 손을 들었다.
“싹이 나써여!”
“어. 그거 맞긴 한데. 맞다고 해야 하나?”
“물주고 싹 나써.”
“어. 맞아! 그거. 근데 계절도 맞춰야지.”
“군데 여름에 강낭콩 심으면 싹이 나써여 안 해?”
“어엇?”
“가을에는?”
“어엇?”
사실 종수는 거기까지 생각 안 해봤다.
설마 싹이 난 것 가지고 봄이라고 말할 것이냐고 시하가 묻는 듯했다.
하지만 시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종수 몰라?”
“아니. 알지! 음! 그. 온도 잘 조절하면 나와. 싹.”
“마자!”
“그래서 계절이 뭔데?”
“봄이야.”
“알면서 왜 물었는데!”
“궁굼해서 물어써.”
“야!”
종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는 시하 차례였다.
“시하가 문제 내께. 바바.”
시하가 입을 아~ 하고 벌린다.
잠깐 그러다가 윗옷을 잡고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 다시 아~ 하고 입을 벌린다.
종수가 눈을 부릅뜨고 보지만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승준이 알았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든다.
“나 알았어! 나 알았어.”
“모야?”
“겨울이야. 시하는 입 벌려서 눈 먹고 이써!”
“땡!”
“헐. 틀렸다니!”
일단 겨울은 제외가 되었다.
종수는 하나라도 맞추자는 의미에서 손을 들었다.
“정답! 가을!”
“땡!”
“으윽.”
그때 슬며시 윤동이 손을 들었다.
“여름.”
“마자!”
“그리고 선풍기 앞에서 노는 거. 입 벌리고 배에 바람 넣고.”
“마자! 윤동 대다내!”
윤동이 어깨를 으쓱했다.
종수는 조금 분했다. 자기도 여름에 저렇게 논 적 있는데 왜 못 맞혔을까 싶어서.
“그럼 이제 내가 낼게.”
그림이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거면 윤동은 자신 있었다.
춤도 결국 몸으로 표현하는 거니까.
고개를 숙인다. 웨이브로 일어선다. 또 고개를 숙인다.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한 발로 서서 양팔을 벌린다.
슬쩍슬쩍 흔들림을 표현한다.
시하가 그걸 보며 손을 들었다.
“시하 아라! 시하 아라!”
“뭔데?”
“폰 가게 아페 이써써.”
“???”
“바람 인형. 바람 풍선 인형이야. 시하가 바써.”
핸드폰 가게 앞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웨이브를 추는 바람 풍선 인형.
시하는 그걸 말했다.
윤동은 고개를 저었다.
“땡!”
“바람 마니 부니까 가을이야.”
“그건 정답…….”
그래도 계절은 맞춘 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