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네모난 두 개의 사각형에 아이들의 그림이 채워진다.
엄마, 아빠에게 줄 그립톡 두 개.
아이들이 자기 거 만들면 안 되냐는 말에 물론 자기가 가질 걸 그려도 된다고 했다.
안 될 이유가 없으니까.
엄마, 아빠 거는 똑같은 거 주면 되지.
아니면 세 개 그릴 사람은 세 개 그려도 된다고 말했다.
“자자. 여러분. 다 그렸나요?”
“네!”
“그럼 뭐 그렸는지 보여줄래요? 누가 먼저 친구들에게 보여줄래요?”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기.
어디 가서 발표할 기회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여러 기회의 장이 된다.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도 이제 이런 발표가 익숙한지 아주 잘 말한다.
중요한 건 조리 있게 말하는 게 아니다.
뭐라도. 다 한 문장이라도 앞에서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 용기를 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더 큰 용기를 꺼낼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부끄러워하거나 잘할 수 없다고 해도 나중에는 반드시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성격이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인간관계를 맺는 이 사회에 결국 내 의견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꼭 닥치게 되어 있으니.
강인 어린이집은 미래를 이끌어나갈 아이들을 교육한다.
강인 재단 역시도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집을 지원하고 있다.
언젠가 이러한 아이들이 사회에서 활약할 그 날을 기대하며.
“저요!”
오늘도 먼저 손을 든 건 승준이었다.
자신만만한 걸음걸이.
스트라이커를 꿈꾸는 승준이답게 먼저 공격적으로 치고 나온다.
“나도 시혁이 형아 생일 선물 그림 준비했어. 봐봐. 이 그림이야.”
축구공이 가운데 하나 있고 주변에 번개가 3개 있다.
배경색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다.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만 가질 수 있는 거야.”
축구 동호회 로고!
가입한 사람은 승준과 시하와 시혁.
그걸 위한 그림이었다.
“시하도 가질 수 이써?”
“응. 시하도 썬더 쓰리 사커 동호회니까. 이거 하나 가져야 해.”
“!!!”
“이 옆에는 아빠한테 줄 그림이야.”
사람 얼굴만 크게 그린 거였는데 돼지코에 입 벌리며 혀가 구불구불 튀어나온 그림이었다.
어딘가 승준이 사진 찍을 때 짓는 괴상한 표정과 닮아 있었다.
“웃긴 표정이야. 아빠랑 엄마가 나 사진 찍을 때 맨날 이상한 표정 짓는다고 웃어. 엄청 좋아해.”
그 말에 하나가 반박했다.
“오빠 맨날 이상한 표정 한다고 엄마가 고개 도리도리하는 거 다 봤어.”
“아니야. 좋아하는 거거든.”
“엄마가 그냥 평범한 포즈하라고 맨날 그러거든.”
“그럼 재미없지!”
승준은 당당했다.
하나가 그림을 들고 일어섰다.
“오빠 다 했으니까 이제 하나야. 하나 그림 보여줄 거야.”
“그래!”
하나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하나도 시혀기 오빠 선물 그려써.”
하나가 첫 번째 그림을 가리켰다.
생일 케이크에 초가 세 개 꽂혀 있다.
시혁의 나이와 아주 무관하다.
시하만이 ‘서이!’라면서 호응해줄 뿐이었다.
“하나는 시혀기 오빠한테 케이쿠 줄 꺼야. 구리고 이건 엄마 꺼.”
하트가 가득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 마이크가 있는 건 덤이다.
“히히. 하나도 이거 가질 거야.”
다음은 연주.
이번에도 시혁의 선물이었다. 알고 보니 아이들 전부 시혁의 선물을 하나씩 그렸다.
연주가 선물할 그림은 책 한 권이었다.
“시혁이 오빠는 책 많이 읽어. 그래서 똑똑해서 이걸 그렸어.”
“마자! 형아 똑똑해!”
“이거는 강아지 그림이야. 재휘랑 똑같지?”
재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가 축 처진 강아지. 어딘지 모르게 재휘랑 비슷하게 생겼다.
연주가 그런 재휘를 보며 살며시 웃는다.
재휘는 그 모습에 괜히 부끄러워한다.
“그, 그럼 나도. 나도 그림 보여줄게.”
선물 그림은 멋진 검은 셔츠였다.
두 번째는 고양이 그림이 있었다.
“이건 연주랑 비슷한 고양이 그림이야.”
“귀엽네?”
“으응.”
“그런데 나 닮았다고?”
“어? 어? 으응.”
연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재휘는 연주의 말에 당황했다.
괜히 연주 따라 닮은 고양이를 그렸다고 한 것 같았다.
이러면 마치 공개적으로 연주가 귀여워 보여!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개져서 더는 발표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후다닥 재빨리 자리로 돌아온다.
“그럼 이제 내 차례다.”
종수가 벌떡 일어섰다.
시혁이 형아가 제일 좋아할 그림을 준비했다.
오늘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나는 시혁이 형아가 제일 좋아하는 걸 그렸어. 다들 이걸 안 그리다니. 봐봐! 시하야!”
“시하 보고 이써.”
“아니! 이 그림이 시하라고!”
“아? 아냐. 시하 아냐.”
“맞거든. 시하 너랑 똑같지?”
“시하 형아 달마서 머시써! 군데 종수 그림은 시하 아냐. 몬생겨써.”
“야!”
펙트를 아주 세게 때려버리는 이시하였다.
사실 종수도 알고 있었다.
막 그렇게 자신이 잘 그리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부정할 줄은 몰랐다.
“아, 아무튼! 이건 시하야!. 다음으로 넘어갈게!”
후다닥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는 종수였다.
두 번째 그림은 곰돌이였는데 의외로 이건 귀엽다고 칭찬을 들었다.
뭔가 찝찝한 느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뭐지? 뭔가 열심히 그린 그림은 칭찬을 못 받고 그냥 대충 그린 곰돌이는 왜 칭찬을 받는 거지?
그런 의문이 종수의 눈에 빙글빙글 돌아갔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더 안 되는 법도 있다.
“자. 그럼 남은 사람은 세 명이네요?”
다음은 은우가 나왔다.
두 개의 그림이 똑같은 헤드셋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는 빨간색이고 하나는 파란색이었다.
“푸하하. 레드형아페페니까 빨간색은 시혁이 형아 꺼. 파란색은 내 꺼. 레드라이트! 블루라이트! 뿌뿌!”
그렇게 말하면서 은우가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선생님은 그걸 보며 다들 엄마아빠에게 줄 선물을 어디 갔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만든 것 중에 전해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음은 윤동.
“이거. 강아지야. 시혁이 형아 선물.”
“???”
두 발로 서 있는 외계인.
강아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대충 보면 강아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림이었다.
여전히 윤동은 그림을 잘 못 그렸다.
“그리고 이건 내 꺼. 윈드밀 할 때 모습.”
“???”
굳이 따지자면 허리가 뒤로 접혀서 바닥에 발을 대고 있는 모습이다.
손도 바닥에 있다.
굉장히 공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한 귀신.
하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굉장한 배려심이다.
“다음은 시하!”
“그래! 시하야. 이제 시하 하자!”
선생님은 빨리 체인지를 했다.
시하가 자신 있게 나와서 종이를 펄럭였다.
“시하는 페페 그려써.”
몸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반창고를 들고 있는 페페였다.
등에는 천사 날개가 있었다.
그립톡이 실제 반창고로 다 낫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림에 반창고를 넣어서 상시 낫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제 떨어져도 안 다쳐. 미리미리 밴드 부쳐.”
백신도 아니고 미리미리 밴드 붙인다고 예방되는 건 아니었지만 시하는 예방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리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구리고 여페 다음 그림이야. 이거는 삼춘 주꺼야.”
페페에 악마의 날개와 꼬리가 달려있다.
선생님은 푸흡 하고 웃었다.
전에 봤을 때 외국인 삼촌분이 너무 짓궂은 장난을 많이 거시던데 아무래도 시하 눈에는 장난 많이 치는 악마로 보였나 보다.
“삼촌이 악마야?”
“삼춘 장난꾸러기야. 시하도 그러케 장난 안 하는데 삼춘은 어룬인데 맨날 장난쳐.”
“아하하.”
아이들이 그림 발표가 끝이 났다.
다들 선생님을 보았다.
“으음. 지금 당장은 못 만들어요. 나중에 그립톡을 시키기도 하고, 그림을 넣어서 붙이기도 할 거예요. 아! 다들 몇 개 만들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일단 한 사람당 기본 4개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는 분을 통해 구매할 예정이기 때문에 단가 자체도 쌌다.
잘하면 만 원 안쪽으로 해결 가능한 정도.
이런 좋은 교육을 하는 데 아주 싸게 가능하다.
그래서 많이 만들어도 상관은 없었다.
“시하는. 형아, 삼춘, 시하, 문도 삼춘, 백동 형아, 개굴 누나, 알리사, 샘, 언장 샘.”
“시하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거 아니니?”
“아?”
“천사는 형아 꺼니까 다 악마로 줄 거니?”
“우웅. 안대. 앙마 안대.”
“그렇지?”
“구럼 시하 하나 더 그릴래여.”
“그렇게까지 다 주려고?!”
4살 이시하. 생각보다 손이 컸다.
***
오늘은 시혁이가 야근이라서 삼촌이 시하를 데리러 왔다.
보통 시혁이라면 들어와서 시하야! 하고 불렀겠지만 삼촌은 조금 달랐다.
“어머. 시하 삼촌 씨.”
선생님이 삼촌을 먼저 발견해서 불렀다.
삼촌은 쉿! 소리를 내며 검지를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살금살금 시하가 있을 방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아이들끼리 잘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폰을 꺼내서 녹음 파일 하나를 연다.
소리를 최대한 높여서 재생한다.
[시하야!]
시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하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세워진다.
황급히 일어나 도도도 뛰어서 방을 나온다.
“형아!”
[시하야!]
“형아!”
행복한 표정으로 현관을 봤는데 문 뒤에서 쭈구려 앉아 있는 삼촌이 폰을 흔든다.
[시하야!]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씨익.
삼촌이 또 시하를 놀렸다는 웃음을 보인다.
시하는 속았다는 생각에 삼촌의 어깨를 두 주먹으로 두드린다.
“잉잉!”
“푸하하. 완전 속았어! 오늘 삼촌이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푸하하.”
“삼춘! 형아인 척 해써!”
“아닌데? 삼촌은 그냥 시혁이 목소리 녹음한 걸 들고 있었을 뿐인데?”
“삼춘 나빠. 앙마야. 앙마!”
“어?! 뭐?! 시하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삼촌이 깜짝 놀라서 시하의 어깨를 잡는다.
엄청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바람에 시하도 덩달아 깜짝 놀란다.
“앙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삼촌은 사실 진짜로 악마인데. 너 누구한테 들었어?!”
“시하가 생각했눈데?”
“뭐라고?! 이건 정말 비밀인데 삼촌은 악마로 이 한국에 온 거야. 너 지금 삼촌의 비밀을 알아버려서 진짜 큰일 났어. 지금 형아도 위험해져.”
“!!!”
삼촌이 살며시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고 손으로 시하의 입을 막고 끌어안았다.
벽에 등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지금 여기 감시하는 사람이 두 명 있어.”
“!!!”
“자. 시하야. 이제 조심해야 해. 알았으면 고개를 두 번 끄덕여.”
끄덕끄덕.
아주 심각한 상황의 연출이었다.
선생님은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너무 실감이 나는 표정에 이게 진짠가 싶었다.
“지금 감시하는 사람이 이야기 중이네. 뭐라고 하는지 시하는 안 들리지?”
끄덕끄덕.
“뭐라고 하냐면…….”
“…….”
“시하야. 이거 다 뻥이야, 라고 하네.”
삼촌이 시하를 막은 손을 뗐다.
시하가 또 두 주먹으로 삼촌의 팔뚝을 토닥토닥 때렸다.
“잉잉!”
“어이구. 시원하다.”
“삼춘 또 거짓말해써!”
“하하하! 어때? 실감 나지? 하하하!”
“삼춘 자꾸 거짓말하면 산타할부지가 선물 안 져!”
“괜찮아. 삼촌은 갖고 싶은 거 선물 사면 되거든!”
“!!!”
“그리고 산타할아버지는 어린이만 주지롱!”
“아냐. 전에 산타할부지 시하 소언 들어져써. 형아도 선물 바다써.”
“오호. 그래? 그래도 삼촌은 돈 많아서 괜찮아.”
“삼춘 백수라서?”
“응. 삼촌은 돈 많은 백수야! 하하하!”
“앙마 백수.”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시하랑 삼촌은 이상하게 친해 보였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뭔가 자주 싸우는데 서로 친한 그런 사이.
그런 게 아니면 시하가 그립톡 그림을 삼촌 걸 따로 챙겨주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그림이 악마이긴 해도.
“이제 가자.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게.”
“삼춘. 시하한테 거짓말해쑤니까 서이 개 사져야 해.”
“아니. 왜 세 개야?”
“시하가 서이 개 조아하니까.”
삼촌이 어이없다는 듯이 시하를 보았다.
“그래. 서이 개 사줄게. 대신 다 먹어야 한다?”
“남으면 싸서 가.”
“누굴 닮아서 이리 똑똑하지?”
“형아!”
“아주 답이 자판기 수준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