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일요일.
시하가 잠을 자면서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오늘은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날이라서 시혁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
평일에는 일찍 일어나고 주말에는 좀 늦게 일어나고.
물론 시혁은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시하가 먼저 일어났다.
“우웅.”
시하는 옆에 형아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이불을 들춘다. 형아의 몸과 팔이 아주 잘 있다.
도도도 아래로 달려가 다시 이불을 들춰본다.
형아의 다리와 발도 아주 잘 있다.
“하나, 둘, 서이, 넷, 다섯.”
발가락도 아주 잘 있다.
찬 바람이 갑자기 들어오는지 시혁이 몸을 뒤척이자 시하가 깜짝 놀란다.
조용히 이불을 덮는다. 그리고 시하 옆에 있는 이불도 펴서 시혁에게 덮어준다.
“두 개면 더 따뚜테.”
베개도 그 보탬이 되라고 시혁의 옆구리에 올려둔다.
음냐. 그냥 잠꼬대하는 것뿐인데 시하는 철석같이 형아가 춥다고 알아듣는다.
시하는 형아를 더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방을 나와서 삼촌 방으로 들어간다.
삼촌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차고 배를 긁적이며 잔다.
이불을 그대로 가져다 도도도 튄다.
괴도 이시하. 삼촌이 춥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형아다.
도도도 달려서 이불을 형아 위에 덮는다.
또 뭔가 덮을 게 없나 생각하다가 시하 방에 담요가 있다는 걸 떠올린다.
형아 꺼와 시하 꺼.
바로 방으로 가서 그 담요도 형아 위에 올린다.
“형아 이굴루 대써.”
알다시피 겨울 이불은 두꺼운데 시혁, 시하, 삼촌 이불에 배게 그리고 담요까지 올리니 볼록하게 아치형을 그렸다.
“이굴루 다뚜테.”
이글루 집이 따뜻하다고 형아에게 들었다.
시하는 이제 할 건 다 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형아 폰.”
시하는 형아가 일어날 때까지 형아 놀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거실에 있는 책상 위에는 어제 시혁이 덮은 노트북도 있었다.
위로 들어 올리자 검은 화면이 보였다.
안 켜져 있는 건 시하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형아 놀이이니까.
노트북 위에 손가락으로 독수리 타법을 보였다.
‘ㅇ’, ‘ㅅ’, ‘ㅎ’ 키를 연타한다.
타닥타닥타닥.
“휴. 다 해따. 전하 와써. 여보세여.”
시하가 시혁의 폰을 들고 열심히 전화통화를 한다.
“이케이케 하는 거 어때여? 그래써여? 아라써여. 이케이케 해주세여. 고마어여.”
정확한 대사는 생략하는 미덕을 발휘해 준다.
느낌만 알면 되니까.
“이거 세어야 해.”
시하가 형아의 폰 뒤에 붙여진 그립톡을 늘렸다.
그렇게 책상 위에 세우려고 하는데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툭. 빠각.
“!!!”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서 재빨리 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그립톡에 금이 가서 부서져 버렸다.
실제로 시혁이 쓰면서 뭔가 이 그립톡 위험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하가 떨어뜨린 게 결정타가 되었다.
“다쳐써. 다쳐써.”
시하가 안절부절못하다가 집 티비 밑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펭귄 캐릭터 대일밴드를 꺼냈다.
상자를 열고 대일밴드 하나를 뜯어서 금이 간 그립톡에 붙였다.
“큰일나써. 빨리 나아야 해.”
시하가 그립톡을 쓰담쓰담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시하 손은 약손. 형아 폰은 똥배. 시하 손은 약손. 형아 폰은 똥배.”
순식간에 똥배가 생겨버린 폰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 있는데 삼촌이 깨는 소리가 들렸다.
“어? 내 이불 어딨지?”
시하가 헉 하면서 소파에 있는 쿠션에 머리를 숨겼다.
몸과 다리는 숨길 시간이 없었다.
삼촌이 배를 긁고 나온다.
“응? 시하는 왜 저러고 있어?”
그러면서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시혁의 방을 들여다본다.
“내 이불 여기 있네. 뭔 산을 만들어 놨어?”
삼촌의 말소리에 시혁이 눈을 떴다.
“으응?”
새우잠을 자고 있던 시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산이 있다.
이불이라는 산이 말이다.
“???”
이게 뭔 일이지 생각하다가 시하가 그랬겠지 싶어서 일어난다.
비몽사몽 한 얼굴로 이불을 걷으며 시하가 쌓아 올린 산을 치웠다.
삼촌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시하가 도도도 달려온다.
“형아. 일나써?”
“응. 이거 시하가 한 거야?”
“형아 발이 추어 해서 시하가 따뚜타게 해써!”
“와. 진짜 따뜻하더라. 찜질방에 온 줄 알았어.”
“정말?”
“응.”
삼촌이 시하의 머리를 헝클였다.
“시하야. 삼촌은? 삼촌은 이불이 없어서 추웠는데?”
“아냐. 삼춘 이불 안 더퍼써. 시하 다 바써.”
“일어나면 춥거든! 이불 덮어야 하거든!”
“갠차나. 갠차나. 형아가 따두테서 갠차나.”
“내가 안 괜찮은데?”
시혁은 아침부터 한 방 먹은 삼촌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하가 또 어딘가 도도도 달려가다가 돌아온다.
“형아!”
“응?”
“형아 폰 다 쳐써. 시하가 밴드 부쳐져써.”
“어? 그러네. 그립톡이 부서졌네?”
“마자.”
삼촌이 그거 보며 히죽 웃는다.
“시하야. 너 사고 쳤네. 그거 붙여도 안 나아.”
“아냐. 부치면 나아.”
“그거 사람이 다쳤을 때 붙여도 안 낫는데?”
“아냐.”
“진짠데?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볼래? 그거 붙여서 낫냐고? 안 낫는다고 할걸? 그리고 저거 부서져서 버려야 해. 봐봐. 형아는 저거 버릴 생각일걸?”
시하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형아를 보았다.
시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곤란해할 뿐이었다.
“형아. 정말? 버려?”
“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구럼 장난감 병언 가자. 할부지가 고쳐져.”
“아무리 그래도 어렵지 않을까? 괜찮아. 새로 사면 돼.”
털썩.
시하가 바닥에 손을 짚는다.
“시하가 형아 폰 똥배 버리게 해써.”
“???”
시혁은 대체 저 말이 왜 갑자기 나오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삼촌이 말한다.
“똥배 버리면 좋은 거 아니야?”
***
회사를 다니면 가끔 야근이 필요한 때도 있다.
시혁이 그랬다.
해외 업무를 맡아 보니까 서로 통화나 회의를 좀 같이해야 할 때가 있는데 시차가 있어서 오후 6시가 넘는 경우.
이런 경우는 잘 없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시하를 삼촌에게 맡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시하야. 오늘 형아가 좀 늦을 거거든. 그러니까 삼촌이 데리러 올 거야. 알았지?”
“아라써. 형아 일하고 와?”
“응. 일이 늦어질 수도 있어서. 7시에서 8시 사이에 올 거 같아. 늦으면 8시 좀 넘겠고.”
“형아. 레드 형아 대서 빨리 파박 해야 해.”
“어. 알겠어. 형아가 빨리 끝내도록 힘내볼게.”
“시하 형아 올 때까지 기다리 꺼야. 안 자고 이쓸래.”
“응. 알겠어. 알겠어. 삼촌이랑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 알았지?”
“아라써! 시하가 삼촌이랑 집 지키께!”
시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삼촌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시하를 본다.
지키기는 누굴 지킨다는 걸까? 그런 표정이었다.
시혁이 말했다.
“삼촌. 시하랑 같이 밥 먹어야 해요.”
“응. 나가서 먹을까?”
“삼촌 마음대로요. 여기 있는 반찬으로 먹어도 되고. 시켜도 되고. 시하가 매운 것도 잘 먹어서 괜찮을 거예요.”
“오케이.”
시혁이 시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시하는 어린이집으로 오는 동안 형아의 폰을 보았다.
그립톡이 벗겨져 있는 폰.
형아는 아직 그립톡을 사지 않았다.
“시하야. 무슨 생각해?”
승준이 시하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옆에 털썩 앉았다.
“시하가 형아 폰 똥배 부써써.”
“???”
“여기 폰 뒤에 이써. 똥배.”
“아! 그거 뭔지 알겠다!”
그립톡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두 아이였지만 대충 알아들었다.
아이들에게 뭔가 영상을 보여주거나 세워주는 경우가 요즘 많아서 잘 알고 있다.
종수가 그걸 들었는지 자신 있게 알려준다.
“야! 그거 그립톡이라고 하는 거거든.”
“구래톡?”
“아니! 그립톡! 구래는 무슨 구래야!”
“구래 톡 해?”
“그립! 톡!”
“그림! 톡!”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종수가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쳤다.
괜히 알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준이 말했다.
“근데 시하가 부쉈어?”
“시하가 떨어뚜려 버려서 부서져써.”
“으악.”
“밴드 부쳐써. 군데 안 나아.”
“헐! 그런데 그립톡은 딱딱하니까 뼈 같은 거잖아.”
“아?”
“깁스를 해야 하지 않을까?”
“깁스?”
“응. 이렇게 붕대로 뼈를 고정하는 거야!”
“!!!”
듣고 있던 종수가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냐는 듯이 말이다.
“차라리 새로 만들어 주는 게 낫겠다!”
“!!!”
시하는 종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꼬옥 잡는다.
종수가 당황해서 ‘뭐야? 뭔데?’ 하고 시하를 쳐다본다.
“마자! 만드러야 해! 그립톡 시하가 만드러! 종수 대다내!”
“어? 어? 그래. 만, 만들면 되지.”
잠시 당황했지만 다시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종수였다.
“어때! 내가 어?! 바로 막! 어?! 생각했단 말이야.”
“대다내!”
“하하하. 시하야. 너 이렇게 간단한 것도 생각 못 했어? 어?! 하하하!”
“군데 종수야. 어떠케 만드러?”
“어? 그건. 그러니까. 인터넷! 인터넷에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돼!”
“정말?!”
“어. 돈도 줘야 해!”
“얼마나? 돈 마니 져야 해? 시하 대지저굼통에 돈 이써.”
“얼마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종수가 아무렇게 말했지만 되게 인터넷에 찾아보면 다 나오는 법이다.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휙 하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시하야.”
“아?”
“곧 있으면 형아 생일이잖아.”
“!!!”
“생일 선물이라고 함께 주면 되겠네.”
“!!!”
선생님은 보통 학부모 생일까지 외우고 있지 않지만 시하 생일과 시혁의 생일의 숫자가 같아서 그냥 외워지게 되었다.
“선생님이 도와줄게. 그리고 다들 그립톡 하나씩 만들어봐요.”
“샘. 만들 줄 아라여?”
“후후후. 선생님은 만들기 장인이야. 그립톡 쯤이야. 손쉽게 만들 수 있지.”
“!!!”
“그립톡은 사면 되니까.”
“???”
“문제는 그립톡에 들어갈 그림이에요. 원에 그림 그려져 있었죠?”
“마자!”
“그 부분을 다들 그림으로 그리면 선생님이 예쁘게 프린트해서 그립톡에 붙여넣을게요. 어때요? 재밌겠죠?”
강인 어린이집은 언제나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를 놓치지 않는 법이다.
자유로운 대화 속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가 있다.
선생님이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한테 어떤 그림 선물 줄지 생각해 보렴.”
“시하 그림 형아가 조아해!”
시하가 그건 확실한 진리라는 듯이 배를 쭈욱 내밀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럼 다들 생각해서 그려볼까요?”
“네!”
“아! 아! 잠시만. 얘들아. 생각만 하고 있어 봐.”
선생님이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서 인쇄를 해왔다.
엄청 큰 두 개의 정사각형이 프린트됐다.
“여기다가 그리자! 여기다 그리면 동그랗게 잘라서 만들면 돼.”
“샘 엄청 커여! 엄청 큰 거 만드러여?”
“아니. 그림은 큰데 선생님이 나중에 작게 만들 거야.”
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샘 마술사에여?”
“푸흡. 아니야. 컴퓨터로 누구나 할 줄 아는 거야.”
“!!! 형아 대다내!”
“???”
선생님은 의문이 들었다.
뭘 어찌 들으면 형아 대다내가 나오는가?
조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컴퓨터 쓸 줄 알면 누구나 가능하다. 형아는 컴퓨터를 쓴다. 고로 형아는 대단하다.
아마 이런 루트로 생각이 된 거겠지.
어마어마한 알고리즘이었다. 컴퓨터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흠흠. 그럼 다들 그림 시작!”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쥐었다.